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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대한민국 교육계가 시끄럽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정계와 교계는 물론, 언론과 국민들까지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예비 인가안을 둘러싼 분란은 일파만파이기도 하다. 일부 대학은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하고, 최종 인가권을 가진 교육부장관과 상위기관인 청와대의 아이러니한 대립각은 볼썽사납기까지 하다.
사실 대한민국 공교육 정책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뀌는 교육정책과 일관성 없는 정책 추진, 그리고 철저히 대학입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교육의 획일성 등은 한국 공교육 오류의 지난한 역사를 대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공교육의 문제점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인 일본도 공교육의 문제점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과 유사한 문제점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공교육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답지 않은 후진적인 것이라고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최근 공교육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총리 직속기구로 교육개혁 추진조직을 공식적으로 만든다는 일본정부의 발표는 솔깃하다. 우수한 인재의 조기 진학, 글로벌 체제에 대한 경쟁력 강화, 탄력적인 학교 운영방안 등을 개혁안으로 내세우며 공교육 정상화를 꾀하는 일본정부의 역동성을 보면서 동일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이웃국가의 국민으로서 그 관심은 배가 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간다』는 교육에 대한 에세이다. 1998년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성장과정을 다룬 『오체 불만족』을 출간, 한일 양국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주인공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이 책을 통하여 '교육'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비전을 얘기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2005년 4월부터 '신주쿠구 아이들의 바른생활 파트너'로서 구내의 초·중학교를 돌아다니며 체험하고 사유한 내용들을 정리한 교육 에세이다. 책 속에는 오토다케가 목도한 일본 공교육의 현실은 물론, 자신의 교육 철학과 비전이 오롯이 담겨 있어 읽는 내내 훈훈하면서도 감동스러움을 선사한다.
다른 나라의 교육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독성으로 흥미있게 읽혀졌던 이유는 한국과 비슷한 문제점을 갖고 있는 일본교육의 현실에 있다. 지나친 입시 위주의 획일적 교육으로 오랜 기간을 잃어버렸던 한국 공교육와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국·영·수 중심의 특정한 학문적 능력만을 추구하는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의 오류에 빠져있다. 저자 오토다케는 이러한 일본 교육의 문제점을 직접 체험하고 목도하면서 그에 파생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음을 지적한다.
'학력'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이 학력이 떨어졌다, 는 등의 학력저하 담론은 이미 가담항설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학력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토다케는 이에 대해 '정보 처리력'과 '정보 편집력'으로 이원화하여 설명한다. '정보 처리력'이란 축척해둔 지식에서 순간적으로 '정답'을 끄집어내는 능력을 의미하며, '정보 편집력'이란 자신이 가진 지식, 기술, 경험 등 모든 것을 어떤 상황하에서 조합하여 발휘하는 능력을 말한다. 요컨대, 현재 일본학생들은 일반적 언어·추론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정보 처리력'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창의력과 조합력을 필요로 하는, 다시 말해서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정보 편집력'은 형편이 없다는 얘기다. 날카로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오토다케의 지적은 비단 일본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전쟁과 가난의 지난함 가운데 일본 못지 않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의 경우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결핍된 획일적 교육으로 번민에 빠져 있다. 교육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학문적 능력'과 '지능'의 지속적인 혼동이다. '학문적(academic)'이라는 단어는 '교육적(educational)'이라는 단어와 흔히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위정자들은 학교의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학문적 수준'이라고 답할 것이다. 학문적 능력이라는 개념이 교육적 성과에 대한 사고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그냥 상식처럼 느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많은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정권이 바뀌고 교육정책이 바뀌며 그에 반하는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획일적인 교육은 학교에서 더 이상 '튀면' 안 되는 아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오토다케는 어느 중학교에서의 발표수업을 통해 목도한 심각한 비관용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되도록 남 앞에서 발언하려 들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오토다케는 충격을 받는다. 타인들 앞에서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타인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는 우려와 두려움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과연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사회로 진출하여, 또는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로 진출한다면 어떤 결과가 그려지겠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두려워서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포장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개인은 물론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욱이 경쟁과 협력, 이기와 이타가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이상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내가 나로 존재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 전제조건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더욱이 남을 포용하며 인정하는 관용 문화야말로 선진사회의 필요충분조건임을 단언한다.
저자는 열한 개의 카테고리 속에서 교육 현실과 문제점, 그에 따른 문제 제기와 미래의 비전 등 다양한 교육 담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한 편의 교육 에세이에 침투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음의 속도로 읽음을 종결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목도한 일본의 교육 현실과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 갖는 강한 동질감에서 연유한 것일 게다. 현실이 비슷하니 진단도 비슷하고 원칙도 비슷하다. 나는 "교육은... 결국엔 인격, 그리고 인성이다."라고 설파하는 오토다케의 말에 오롯이 동의한다.
저자는 현재 도쿄에 있는 한 구립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다고 한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이 주는 힘을 신뢰하며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리드미컬한 삶을 나는 지지한다. 『오체 불만족』을 통해 "장애는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얘기한 그의 명문장처럼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되기를 기대한다. 더 나아가 그의 삶과 꿈이 참교육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Thanks to 매우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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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