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리커버)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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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한국인의 지적 수준과 인간적 품격을 몇 단계 도약시키는 데 공헌한 3대 선생님이 있다. 오은영, 백종원, 강형욱이 그들이다. 동시대 한국인은 그들의 지혜와 노력에 빚지고 있다. 오은영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백종원은 음식에 관한 맛과 철학을, 강형욱은 인간과 반려동물 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그들은 세 분야에서 전에는 생각지 못하고 무시해온 것에 대해 강도 높은 일갈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탁월한 선생님이지만 나는 단연 오은영의 공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음식과 동물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먼저 인간 됨이 더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음식과 반려동물은 그다음이다. 인간이 인간 같지 않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반려견을 잘 돌본다 하더라도 공허나 허위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점은 어떤 인간이든 죽어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유산을 결정하는 기초적이고 결정적인 만남은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다.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육아에 관한 세밀한 지침서가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바쁘고 고달팠기에 자녀를 이렇게 키우고 저렇게 훈육한다 하는 전범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물론 우리 선배 세대는 정말 자식을 사랑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안 사랑하겠는가. 단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부모의 역할이 물질적인 것의 충족, 즉 부양권에만 국한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소중한 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 아이에게 하는 말, 표정, 태도, 기준, 일관, 공의 등이 아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중추였다. 오은영의 공이 이 지점에 있다.

과히 오은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오은영이 대단한 건 기존에 없던 이론을 새롭게 창시했거나 무슨 위대한 가르침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위대한 건 "자녀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다"라는, 이미 서구 교육학에서 완벽히 정리된 사실을 이 나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여 대중화시킨 데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인간 교육의 본질이 사회가 아닌 가정에 있음을 간파했다. 한 사람의 내적 기질과 성격은 만 3세 이전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의 축적과 연구의 결과로 발견해낸 것이다. 이후 서구사회는 인간교육의 방점을 사회에서 가정으로 턴하기 시작했다.

오은영의 『화해』는 가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작가인 저자 자신이 실제 상담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과거 한국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인데 최근 여러 방송과 미디어에서 그녀가 전하는 내용의 초본집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수많은 실제 사례를 풀어내면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내적 상처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의학적·사회적 연구의 적용, 실제적인 개선 효과 등이 상세히 기술되었다.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 저자의 설명에서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역량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동시에 포착된다.

책에는 수많은 내담자들의 사연이 나온다. '나'로 기술되고 있는 내담자들은 각기 다른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동인이 있다. 바로 가정의 상처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의 위치에서 가지각색의 사연과 이유로 '나'가 된 내담자들의 상처는 한결같이 깊고 치명적이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나'의 상처와 억압은 정상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저주와 같다. 안타까운 것은 가정에서 받은 상처는 외부에서 치유되기 정말 힘들다는 점이다. 마치 지하 암흑세계로 잡아당기는 사탄의 중력과 같다. 쉽지 않고 치명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벗어나야 함을 저자는 일관되게 강조하며 치유한다.

책 내용 중 깊게 공감한 대목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학력이 아니라 결국 따뜻한 기억, 행복했던 추억뿐이라는 걸 일깨운 부분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이런 추억과 기억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걸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아주 오래전 기억이 호출됐다.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아빠와 엄마가 동시에 나를 사랑스러운 미소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생생히 기억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정확한 시기는 모호하지만 당시 그 장면만은 완벽한 캡처로 남아 내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우울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고비를 넘겼다. 저자의 말대로 결국 우리 인간은 이런 에피소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제목 '화해'의 의미를 고찰했다. 저자 오은영이 제시한 화해란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가 아닌 나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타인과 우주에 다가가지 못한다. 나와 화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상처의 시작과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환언하자면 나(의 상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 나'가 된다. 즉 오은영의 『화해』는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라는 부제를 여러 내담자들의 사례를 통해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나를 찾는 교과서'다. 내가 그토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면서도 자기계발서에 살짝 걸쳐 있는 이 책을 탐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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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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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입소문을 탄다. 유명한 작가(저자)나 메이저 출판사의 책이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광고 세례를 퍼부은 책이 아니더라도 잘 쓰인 글은 필히 독자의 마음을 타고 전도되고 확산된다. 때와 대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양서는 언젠가는 적당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의 손에 놓인다. 내가 그간 많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공식이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 공식을 증명하는 책 중 한 권이다. 현재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제목이 흥미롭다. 마치 시집 제목 같다. 과학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의 위치를 감안하면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얼지 궁금했다. 이 모호한 호기심이 책의 첫 장을 여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음에 달려 읽었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내게 닥친 충격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겠다. 하지만 제목이 무언가의 시적 표현이나 상징을 내포한 게 아니라 문장 그대로를 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쯤 독자는 예상치 못한 반전과 씁쓸한 충격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 룰루 밀러의 영혼의 에세이다. 저자의 지적 열정과 호기심, 고뇌와 좌절, 깨달음과 희망의 이야기가 논픽션으로 적나라하게 쓰였다. 사실은 사실대로, 주장은 주장대로, 회고는 회고대로 저자는 자유롭게 시점과 문체를 바꿔가며 단단하고 다채로운 에세이 한 권을 만들어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주요한 대목을 넘을 때마다 혼란함을 겪는다. 이야기 흐름에 큰 전환이 이루어지고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전체적 맥락에서 각 대목의 변화와 전환이 저자가 의도한 네러티브적 장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어류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동경한다. 이에 데이비드의 자서전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기까지 발견된 물고기의 1/5 이상의 이름을 명명한 데이비드의 업적에 크게 도전받는다. 생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데이비드에게 1907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엄청난 위기였다. 지진 때문에 데이비드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어류 표본이 든 수백 개의 유리병들이 바닥에 내팽개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물고기 하나를 집어 들고 바늘에 실을 꿰어 물고기의 목살에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했다. 엄청난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삶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저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의 족적을 계속해서 추적하게 만든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한 어류학자를 존경한 저자의 동경기 혹은 그것을 통해 삶의 긍정을 깨우치는 자기계발서처럼 읽힌다. 하지만 중반부터 저자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데이비드의 삶에 악랄한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책의 내용과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혀 피의자의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 기록,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기록, 과학의 한 분야를 설명하는 교양 서술, 심각한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르포, 여러 경험을 통해 걸쭉한 사유를 이끌어낸 저자의 성장 기록 등이 펼쳐지며 책이 얘기하려는 본 주제를 도출해낸다.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완벽히 다르며 그렇기에 개별적으로 모두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유명한 모 유튜버는 "보수적인 입장의 크리스천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책"으로 평가했다. 저자가 지독한 무신론자이고 다윈의 추종자이며 성(性)적으로는 양성애자라는 것을 감안한 코멘트였을 것이다. 책 곳곳에 다윈의 진화론을 절대 진리로 전제하고 보는 저자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 명명과 범주라는 잣대로 존재와 세계에 선을 긋고 다양성을 재단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존중이야말로 인류가 지켜야 할 보편의 가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아직도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종교적인 것은 물론 단순한 사적 개성에 이르기까지.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대략 10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밀양의 어느 깊은 산속으로 회사 워크숍을 갔다. 회의를 마치고 산장 야외에서 저녁 회식 자리였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한 영업부 막내 사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은 어떤 사안과 가치에 대해 항상 선을 그어놓고 접근하십니다." 그때는 "무슨 개소리야" 하고 넘겼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그 녀석의 얘기가 내 삶 속에서 자주 복기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 나에게는 법칙과 기준이 너무 많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가지각색일 텐데 내 신앙과 신념을 잣대로 선 긋기 하는 태도가 내 언행 속에 크게 존재해 있었다. 나만의 선악의 가치판단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타인과 세계를 좁게 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많이 나이브 해졌지만 아직도 그 잔존함에 자유롭지 못함은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힐링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힐링 서적이든 종국적으로 자기계발서와 매한가지라는 독서의 경험적 축적 때문이다. 이 책도 과학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메시지 측면에서는 분명한 힐링 서적이다. 저자 자신이 닥친 삶의 위기에서 한두 세대 이전의 과학자 평전에서 답을 찾겠다는 설정 자체가 작위적인 면도 없지 않다. 어떻게 보면 모든 메시지가 저자 개인을 위한 변명이자 수식어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의 작위성과는 별개로 내용의 정교한 구성과 저자의 문장력이 진부한 메시지를 압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술술 읽히는 매끄러운 번역은 덤이다. 에세이란 장르에서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 책은 정점의 수준에서 독자에게 보여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서두에 언급한 대로 좋은 책은 반드시 입소문을 타고 독자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다. 저자가 국내에 잘 알려진 유명 작가가 아니고 출판사에서 대대적 홍보행사를 한 것도 아님에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다. 환언해서 평가하자면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풍기는 기묘한 호기심만큼이나 매혹적인 에세이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메시지를 음미하며 여유 있게 지평을 넓혀 읽으면 충분히 감동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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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 교양으로 읽는 마약 세계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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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OTT 서비스가 인기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쿠팡 플레이 등 국내외 OTT 사업자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국내 소비자는 즐거운 선택의 숙제에 빠져 있다. 더욱이 최근 국내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드라마의 인기가 녹록지 않다. <킹덤>, <오징어 게임>, <마이네임>, <지옥> 등 한국 드라마는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던 나도 넷플릭스에 수록된 다양한 해외 드라마의 목록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으로 본 드라마가 남미 마약의 역사를 다룬 <나르코스> 시리즈다. 세계 최대의 마약 제국을 건설한 콜롬비아의 마약왕 에스코바르의 일대기를 다룬 실화다. 엄청 재미있다.

미국에서 제작된 수많은 범죄 영화와 드라마가 마약을 소재로 한다. 마약 청정국으로 불리는 한국적 관점에서 마약은 딴 나라 이야기가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을 위시한 소위 선진국 클럽에 속한 대부분의 국가는 마약에 제법 크게 노출되어 있다.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등 세계 최대 규모의 범죄조직과 연관되어 있고 지하세계에서 유통하는 물동량도 어마어마하여 이를 모르면 미국 범죄 영화나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수월치가 않다. 이에 현대사 공부도 할 겸 교양 수준 정도의 마약 관련 책을 찾았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2019 세종도서 교양 부문 우수작'이라는 홍보문구를 책 표지 전면에 배치한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는 마약의 역사와 종류를 알려주는 책이다. 학술도서나 전문서적이 아닌 대중교양서다.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마약에 관한 개괄적 내용을 잘 정리했다. 저자 오후는 마약 전문가가 아니다. 기자나 작가로 세계 많은 곳을 여행하며 이것저것을 보고 공부하는 걸 취미로 삼는 사람이다. 유튜브 방송을 통해 개인적으로 학습하고 메모한 내용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이러한 저자의 비전문성이 이 책의 강점이다. 학술적이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인과 소주 한 잔 먹으며 나누는 얘기처럼 쉽고 친근한 문체로 마약에 관해 들려준다. 그래서 더 흡입력 있게 읽힌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된다. 마약거래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타 선진국에 비해 유통되는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이다. 술·담배에는 관대한 데 비해 유독 마약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고 보수적인 한국적 정서가 작용된 탓도 있다. 가령 국내에서 불법인 대마초는 네덜란드에서는 합법이다. 대마초 정도는 미국이나 네덜란드에서는 즐거움을 위한 기호로 논란 없이 사용된다. 저자는 마약과 관련해 나라(문화)마다 정서와 수용의 온도가 다름을 밝힌다. 물론 저자가 마약 찬양론자는 아니다. 해외 사례를 두루 살피면서 국내 사례에 국한되어 있는 한국 대중의 마약 관련 정보를 국제적으로 탐색해 보는 것이다.

저자가 정리한 마약 정보는 흥미롭고 체계적이다. 마약은 제조 방식에 따라 대마, 아편, 코카인 같은 천연마약과 필로폰, LSD, 엑스터지 등 합성마약으로 나뉜다. 이 중 합성마약은 대부분 일반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명돼 흥미로움을 더한다. 또 천연마약 중 코카인은 약효의 지속시간이 짧고 각성 효과가 크다는 점을 이용해 일부 화이트칼라들이 업무 중 농도를 약하게 해 복용하기도 한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필로폰은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감기약을 만들다 발명된 약품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대량으로 투여됐지만 종전 이후 일본에서 마약으로 분류되며 투약과 생산 모두 금지됐다. 이에 우리나라가 중간 생산기지로 부상해 일본에서 소비되지 않은 물량이 범죄 조직의 루트를 타고 국내 곳곳에 퍼지게 됐다.

마약은 인류와 친밀한 관계였다.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그림, 토기를 보면 양귀비, 대마, 코카, 환각 버섯 등을 사용한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도 아편을 고통의 구원자라 부르며 '명약과 독약의 차이는 복용 비율에 의존한다'고 했듯이 가치중립적으로 마약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신성한 존재로까지 보아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신이 등장할 때 양귀비가 함께 있기도 한다. 이런 마약이 인류와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기독교 때문이다.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으되 기독교는 술과 마약을 강력히 금지시켰다. 그 여파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외 마약과 관련한 여러 정보를 저자는 특유의 해학적 문체로 흥미롭게 기술한다.

저자의 논지에 한 가지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저자의 부정적 시선이 그것이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조롱하고 비하한다. 종교가 마약보다 나을 것 없다는 주장을 농담 식으로 내비친다. 종교도 마약의 한 분야이며ㅡ물론 농담이라고 선을 그었지만ㅡ차라리 마약을 하는 게 낫다는 투로 비아냥댄다. 마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희화화하는 것 같다. 특히 기독교를 가부장제에 함몰된, 여성 혐오가 가득한 종교로 규정한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비뚤어진 시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독교 역사의 일부를 떼어내 마치 인권을 유린하고 여성을 핍박하는 종교인 양 주장하는 저자의 논지는 책 전체 맥락에서 어색하고 어설프다. 아쉽다.

간간이 보이는 저자의 편견스러운 종교관을 제외하고는 크게 무리 없는 교양서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마약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와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미치고 있다.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라는 닉네임을 붙이기 힘든 대한민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마약 정보를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긴요하다. 마약의 세계적인 규모와 생산량, 여파와 영향력을 감안하면 교양 수준에서 한 번쯤 정리해놓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볍게 일독 정도 하면 넷플릭스에 수록된 다양한 범죄물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딱 그 수준에서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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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 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딸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 돈과 물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배워가는 중이다.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금일봉을 받을 때마다 '세종대왕'보다 '신사임당'을 열망하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누군가에게 용돈이나 금일봉을 받으면 바로 엄마·아빠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자기 지갑으로 먼저 들어간다. 아직까지 돈은 부모가 관리하는 것이기에 1만 원 이상의 수입이 있을 경우 본인 계좌에 넣어주다고 압수하곤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현금 회수가 가능할지 미지수다. 요컨대 돈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해(구정)를 맞이해 스마트폰을 바꿔주기로 약속했다. 두 딸 모두 바꿔준다고 약속했기에 최근 어떤 기종이 좋을까 검색 삼매경에 빠졌다. 지금 첫째 딸이 사용하는 기종은 내가 과거에 사용한 '갤럭시S7'이라는 오래된 모델이다. 출시 시점으로 보면 만 6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게다가 액정이 깨졌고 디스플레이에 잔상과 번인까지 있어 그간 불편하게 사용해왔던 게 사실이다. 둘째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이에 전격 바꿔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고민하지 않았겠다. 그냥 내가 쓰던 것을 주거나 조금 더 쓰라고 얘기하면 큰 탈 없이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돈 개념과 물질 가치를 아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에게 무조건 "이거 그냥 써라", "저것으로 그냥 바꿔 써라" 라는 접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책정한 예산이 있었다.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보급형 새 모델을 사줄까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선택 후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급형이라 해도 새것은 제법 비쌌다. 가족결합으로 요금제가 묶여있어 자급제로 구매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었다. 기기 자체를 생돈으로 구입해야 했다. 돈이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게 맞나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성능이 우수한 상위 기종을 중고로 구매하는 것을 생각했다. 남이 사용한 제품이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한 모델은 새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성비와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관심 모델들을 검색한 결과 보급형 신품보다 하이엔드 중고가 가성비 차원에서 높은 효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이미 무선 충전, 방수, 지문 인식 등의 고급 기능을 사용해온 아이가 이를 지원하지 않는 보급형 기기를 사용하는 건 왠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돈의 가치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당* 마켓'에서 괜찮은 S급 중고품을 찾았다. 거래 의사를 타진했다.

단 아이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아이가 "돈 아끼려고 새것이 아닌 남이 쓰던 것을 사주는 게 아니냐" 반문(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면 알아듣기 쉽게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겠지만 첫째 아이는 한참 예민하고 효율성을 잘 모르는 초등학생 5학년 여자아이였다. 이 대목에서 내 고민이 깊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기능적으로 더 좋은 제품을 아이 손에 안겨주고 싶었고 다만 내가 예상한 금액 선을 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엔드 중고제품이 가장 적합했다. 한편 아이가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기보다 남이 쓰던 것이라 해도 내용이 괜찮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외연보다는 내면을, 비본질보다는 본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들여다볼 줄 아는 아이로 커가기를 갈망했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고 나무랄 사람들이 있겠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새 거 사주면 되지 유난 떤다 말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두 딸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고 시각적 인지 이면에 있는 고결한 가치를 탐색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새것의 화려함보다 옛것의 묵직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욕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의 가치를 아는 아이로 자라가길 원한다. 그래서 우리 세계 곳곳에 존재해 있는 여러 헌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목도하면서 본질적으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단 이 시대 부모들이 가진 잘못된 전제 중 하나는 '좋은 것'을 '새것' 혹은 '비싼 것'으로 아무 고민 없이 환치한다는 데 있다. 새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비싼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시기와 상황에 맞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누군 능력이 없는가. 나도 아이에게 사과 회사에서 만든 최신 하이엔드 스마트폰을 사줄 경제적 역량이 있다. 사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아 안 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산을 미리 정해놓았던 것이다. 아이가 주변 친구 중 몇 명이 위아래로 접히는 최신 스마트폰을 갖고 다닌다며 자랑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비싸고 히트작인 신상을 사주려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과연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잠시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새것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비싼 것도 근원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못한다. 별이 아름다운 건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별에 도달하는 순간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와 같은 유행가는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아이에게 가질 수 없는 것,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 나중에 가져도 되는 것, 을 가르치는 건 전적으로 부모의 역할이다. 이런 내 신념에서 이번 선택은 아이와 나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하나의 시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국 나는 계획대로 중고 스마트폰을 아이에게 선물했다. 비록 새것은 아니지만 성능 면에서 아이에게 꼭 필요한 기기를 사준 나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기분 좋았던 건 아이의 반응이다. 새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쓰던 것보다 나아진 성능에 고무되어 마냥 즐거워하는 첫째 딸의 모습에서 궁극의 기쁨을 엿본다. 아빠에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연신 춤을 춘다. 성능 떨어지는 새것보다 성능 좋고 상태 좋은 헌것이 더 좋다, 라 말한다. 괜히 우려했던 나 자신만 멋쩍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농밀한 감동에 가슴을 적신다. 부모에게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힘들고 속상할 때도 많지만 아이가 가끔 이렇게 순수한 영혼의 빛을 뿜어낼 때마다 부모는 행복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맛본다. 첫째 딸이 아빠의 '헌것 철학'을 잘 받아주고 이해해 줘서 너무 기쁘고 대견하다. 정말 기분 좋다.

사랑하는 나의 첫째 딸 다인아. 아빠의 작은 선물에도 밝고 명랑하게 반응해 줘서 고맙구나. 아빠는 오늘 너의 모습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단다. 아빠는 기도한다. 다인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새것의 획득됨에 잠시 기뻐하기보다 헌것의 실용성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그래서 새 친구를 사귀는 일 못지않게 옛 친구를 챙길 줄 알고, 알 수 없는 새로운 미래에 두려워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새로운 사상과 조류에 흥분하기보다 옛것의 본질인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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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는 사무엘서
김진수 지음 / 합신대학원출판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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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후임목사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후 리더십과 관련한 독서가 갈급했다. 여러 책들을 두루 훑었다.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는 이 여정의 끝자락에 읽은 책이다. 세상의 리더십과는 다른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다윗'이라는 인물이 호출됐다. 이 위대한 인물의 행적을 복기하면서 교회 젊은 교육목사님의 책 추천이 있었다. 추천과 함께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은 이스라엘 왕조사의 시작을 다룬 성경 <사무엘서>를 강해한다. 김진수 합동신학대학원 교수(목사)가 썼다.

주지하다시피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왕직의 의미를 밝히는 성경이다. 선지자 사무엘은 영적으로 암울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사사 시대를 마무리하고 왕이 통치하는 왕조시대를 연 인물이다. 한 여인(한나)의 뜨거운 기도를 통해 얻은 아들 사무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 없던 왕이란 직분에 관해 사무엘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그 첫 번째 사례 사울 왕의 실패와 두 번째 사례 다윗 왕의 성공을 <사무엘서>는 진지하게 탐색한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세종대왕 정도로 비교하면 되겠다. 이스라엘의 왕직이 세상ㅡ혹은 다른 민족(국가)ㅡ의 왕권과 다른 점은 선지자에 의해 세워지고 선지자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데 있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 뜻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왕직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잘 행사한 왕이 이스라엘 왕조사에 다윗을 포함하여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본래 이스라엘에는 왕의 제도가 없었다. 죄악의 관영함과 혼란의 퍼포먼스였던 사사 시대를 겪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에게도 다른 민족(국가)처럼 왕을 주소서"라고 외친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얼토당토않게 인간 왕을 달라는 그들의 목소리에 하나님은 몹시 섭섭해하셨다. 하지만 용인하셨다. 즉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제도는 비록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출발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 출발이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며 초대 왕은 사울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앞서 언급한 이스라엘 왕직의 본분을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다음 왕에 오른다. 그러나 다윗이야말로 진정한 초대 왕이다. 다윗의 왕권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에게 물어봤다.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에게 고백했다. 선지자의 감독을 충실하게 받았다. 큰 죄를 지었을 때에도 곧바로 무릎 꿇고 회개했다. 비록 죄를 졌으나 회개했기에 하나님은 용서하셨고 그의 왕권을 지켜주셨다. 다윗 시대 40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국력과 평화가 가장 클라이맥스에 이른 시점이다. 이런 다윗 왕의 모범은 훗날 왕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 책의 강점은 <사무엘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탁월한 신앙적·신학적·성경적 해설로 기술한 데 있다. 저자 김진수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주제가 '사무엘서'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단단하고 은혜롭게 논지한다. 해외 여러 신학자들의 입장을 비교·대조하며 성경의 원문적 해석을 소개한다. 신학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소개하되 종국 정경적 입장으로 돌아가 <사무엘서>를 강해한다. 어렵지 않되 깊이가 있고 신학적이며 은혜롭다. 책의 구성과 글의 문체는 신학자가 쓴 글답게 논문적·분석적이지만 일반 평신도가 읽어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평이하다.

성경의 부분과 전체라는 큰 틀에서 균형을 갖추고 있는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사무엘서>의 각 장면들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분석하는가 하면 성경 전체 맥락에서 <사무엘서>가 위치한 의미, 그리고 각 세부 사건이 가진 의미를 합주한다. 이런 균형감은 저자의 탁월한 신학적 지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사무엘서>가 가진 고유의 내러티브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통사에서 고대 이스라엘 왕조가 차지하는 맥락을 동시적이고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특히 책의 마지막 8장에서는 '사무엘서와 구속사'라는 테마를 따로 꺼내어 정리한다. 사무엘서에 제시된 제왕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살핀다. 성경 전 역사를 포괄적으로 살피며 연결시킨다. 에덴동산에서의 범죄, 아브라함 언약, 가나안 정복 시기, 사사 시대, 다윗 이후 열왕 시대와 포로기, 예수님이 오신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총체적 관점에서 살핀다. 즉 <사무엘서>에 나타난 왕의 제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이어지는 구원 역사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살피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정리는 <사무엘서>를 그저 다윗의 이야기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책의 막장을 덮은 뒤 내 '높은' 위치를 실감했다.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지위를 부여받은 건 모든 신약 성도들이 가진 특권이다. <사무엘서>에 나타난 왕들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는 오늘도 왕의 신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행복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이 될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에 관한 가장 성실한 신앙적·신학적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지난 2개월간 계속된 '리더십 관련 책 탐독하기'는 일단락되었다. 총 6권의 책을 통해 권위와 리더십을 깊이 탐구했고 성찰했다. 앞서 언급한 리더십 교체기에 직면한 내 현존을 응시하며 어떤 지혜와 명철이 필요한지를 폭넓게 사유할 수 있었음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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