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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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입소문을 탄다. 유명한 작가(저자)나 메이저 출판사의 책이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광고 세례를 퍼부은 책이 아니더라도 잘 쓰인 글은 필히 독자의 마음을 타고 전도되고 확산된다. 때와 대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양서는 언젠가는 적당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의 손에 놓인다. 내가 그간 많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공식이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도 그 공식을 증명하는 책 중 한 권이다. 현재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제목이 흥미롭다. 마치 시집 제목 같다. 과학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의 위치를 감안하면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얼지 궁금했다. 이 모호한 호기심이 책의 첫 장을 여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달음에 달려 읽었다. 책의 막장을 덮었을 때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내게 닥친 충격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겠다. 하지만 제목이 무언가의 시적 표현이나 상징을 내포한 게 아니라 문장 그대로를 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쯤 독자는 예상치 못한 반전과 씁쓸한 충격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 룰루 밀러의 영혼의 에세이다. 저자의 지적 열정과 호기심, 고뇌와 좌절, 깨달음과 희망의 이야기가 논픽션으로 적나라하게 쓰였다. 사실은 사실대로, 주장은 주장대로, 회고는 회고대로 저자는 자유롭게 시점과 문체를 바꿔가며 단단하고 다채로운 에세이 한 권을 만들어냈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면서 주요한 대목을 넘을 때마다 혼란함을 겪는다. 이야기 흐름에 큰 전환이 이루어지고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을 때쯤이면 전체적 맥락에서 각 대목의 변화와 전환이 저자가 의도한 네러티브적 장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이자 어류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동경한다. 이에 데이비드의 자서전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기까지 발견된 물고기의 1/5 이상의 이름을 명명한 데이비드의 업적에 크게 도전받는다. 생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던 데이비드에게 1907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은 엄청난 위기였다. 지진 때문에 데이비드가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어류 표본이 든 수백 개의 유리병들이 바닥에 내팽개쳐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물고기 하나를 집어 들고 바늘에 실을 꿰어 물고기의 목살에 이름표를 꿰매기 시작했다. 엄청난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삶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저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의 족적을 계속해서 추적하게 만든다.

책의 중반부까지는 한 어류학자를 존경한 저자의 동경기 혹은 그것을 통해 삶의 긍정을 깨우치는 자기계발서처럼 읽힌다. 하지만 중반부터 저자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던 데이비드의 삶에 악랄한 모순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책의 내용과 분위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이야기의 흐름이 완전히 뒤집혀 피의자의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 기록,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역사 기록, 과학의 한 분야를 설명하는 교양 서술, 심각한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르포, 여러 경험을 통해 걸쭉한 사유를 이끌어낸 저자의 성장 기록 등이 펼쳐지며 책이 얘기하려는 본 주제를 도출해낸다.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완벽히 다르며 그렇기에 개별적으로 모두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유명한 모 유튜버는 "보수적인 입장의 크리스천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책"으로 평가했다. 저자가 지독한 무신론자이고 다윈의 추종자이며 성(性)적으로는 양성애자라는 것을 감안한 코멘트였을 것이다. 책 곳곳에 다윈의 진화론을 절대 진리로 전제하고 보는 저자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주목한 이유가 있다. 명명과 범주라는 잣대로 존재와 세계에 선을 긋고 다양성을 재단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존중이야말로 인류가 지켜야 할 보편의 가치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아직도 여기저기 수없이 많은 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종교적인 것은 물론 단순한 사적 개성에 이르기까지.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대략 10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밀양의 어느 깊은 산속으로 회사 워크숍을 갔다. 회의를 마치고 산장 야외에서 저녁 회식 자리였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한 영업부 막내 사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과장님은 어떤 사안과 가치에 대해 항상 선을 그어놓고 접근하십니다." 그때는 "무슨 개소리야" 하고 넘겼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그 녀석의 얘기가 내 삶 속에서 자주 복기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 나에게는 법칙과 기준이 너무 많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가지각색일 텐데 내 신앙과 신념을 잣대로 선 긋기 하는 태도가 내 언행 속에 크게 존재해 있었다. 나만의 선악의 가치판단이 심했다. 그래서인지 타인과 세계를 좁게 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많이 나이브 해졌지만 아직도 그 잔존함에 자유롭지 못함은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힐링 서적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힐링 서적이든 종국적으로 자기계발서와 매한가지라는 독서의 경험적 축적 때문이다. 이 책도 과학 에세이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메시지 측면에서는 분명한 힐링 서적이다. 저자 자신이 닥친 삶의 위기에서 한두 세대 이전의 과학자 평전에서 답을 찾겠다는 설정 자체가 작위적인 면도 없지 않다. 어떻게 보면 모든 메시지가 저자 개인을 위한 변명이자 수식어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의 작위성과는 별개로 내용의 정교한 구성과 저자의 문장력이 진부한 메시지를 압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술술 읽히는 매끄러운 번역은 덤이다. 에세이란 장르에서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이 책은 정점의 수준에서 독자에게 보여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서두에 언급한 대로 좋은 책은 반드시 입소문을 타고 독자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다. 저자가 국내에 잘 알려진 유명 작가가 아니고 출판사에서 대대적 홍보행사를 한 것도 아님에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유다. 환언해서 평가하자면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이 풍기는 기묘한 호기심만큼이나 매혹적인 에세이다.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메시지를 음미하며 여유 있게 지평을 넓혀 읽으면 충분히 감동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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