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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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가 별세한지 3주가 되어 간다. 아직도 고인의 숨결이 우리 주변 곳곳에 생동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인이 남긴 족적이 너무 거대해서 타계 후 더 고인을 갈망하고 우러르는 것 같다. 출판계가 특히 그러한데 고인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저작이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고인의 유작들이 역주행을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고 이어령 교수는 독보적인 다작 저술가로서 60년 동안 130여권의 저작을 남겼다. 이중 생전 마지막 인터뷰집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전 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인터뷰어이자 작가인 김지수가 암 투병 중인 고 이어령 교수를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인터뷰집이다. 책 속에는 죽음을 앞둔 한 거대 지성의 묵직한 사유와 철학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돈, 행복, 생명, 과학, 사랑, 죽음 등 인간의 가장 고밀하고 웅숭깊은 주제들을 총망라하여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암 투명의 끝자락에서 불과 죽음을 얼마 안 남긴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인터뷰는 대범하고 역동적이며 열정적이다.

제목 그대로 죽음 직전의 '마지막 수업'인데 고 이어령 교수의 지적 생명력은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힘이 있고 박력이 있다. 육체는 늙고 변하며 병들 수 있지만 정신은 늙지 않는다는 걸 본인 스스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책 곳곳에 지성의 바다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독자를 압도한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고인 특유의 수다스러움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터뷰어 김지수는 이러한 고인의 박학다식함과 지적 열정에 경도되고 압도된다.

눈에 띄는 건 인터뷰어 김지수의 탁월한 리액션이다. 아무리 훌륭한 지성을 만났다 하더라도 인터뷰어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좋은 대담이 이루어질 수 없다. 말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인터뷰이를 감당할 만한 지력과 실력이 인터뷰어에게는 꼭 필요하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의 지적·인격적 관계 형성, 적절한 호흡과 피드백, 공수를 오가는 건강한 긴장감 등이 훌륭한 인터뷰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저자 김지수의 인터뷰 실력은 수준급이다. 집필 과정에서 어느 정도 편집을 거쳤겠지만 실시간 대담에서 예상치 못한 걸쭉한 사유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어 김지수의 공이다.

책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주제는 바로 '죽음'이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뒤 그 어떤 항암 치료도 하지 않고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꾸준히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고인의 모습은 죽음의 달관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인이 천착한 죽음은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다. 딸과 손주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죽음의 실전을 겹으로 체험했다. 고인에게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시작이고 생명이었다. 죽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며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다.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다"라고 말한 고인의 가르침이 바로 이 지점을 웅숭깊게 웅변한다.

고인은 자기 인생 88년 통찰의 결론이 '눈물 한 방울'임을 고백한다. 핏방울과 땀방울도 아닌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고 일갈한다. 핏방울과 땀방울은 너무 흔하며 서로 박 터지게 싸우는 특성 때문에 결국 피눈물밖에 남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피와 땀을 붙여주는 건 눈물이어야 한다는 걸 고인은 강조한다.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무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눈물은 나약한 것, 비본질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피와 땀이야말로 고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본질적 힘이라 인식했다. 하지만 고인은 88년 통찰의 결과로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한 것이 나오는 법"임을 일깨운다. 소름이 돋으면서 새 세상을 만난 듯한 전회와 같은 깨달음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굵게 하이라이트 한 부분이다.

한달음에 책의 막장을 덮었다. 고 이어령 교수와 동시대를 산 것이 영광스럽다. 정치, 종교, 나이, 성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MZ세대'가 난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세가 되었다. 기준과 질서가 모호해졌다. 물론 새로운 조류와 스타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우리가 새것이라 하는 것 대부분이 옛것의 토대 위에 만들어졌다. 꼰대 같은 소리일지 몰라도 진실이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옛것의 새것스러움을 거대한 지성의 향연 위에 녹여낸 명저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이 빛나는 대화를 지성에 목마른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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