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리커버) -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
오은영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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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한국인의 지적 수준과 인간적 품격을 몇 단계 도약시키는 데 공헌한 3대 선생님이 있다. 오은영, 백종원, 강형욱이 그들이다. 동시대 한국인은 그들의 지혜와 노력에 빚지고 있다. 오은영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백종원은 음식에 관한 맛과 철학을, 강형욱은 인간과 반려동물 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그들은 세 분야에서 전에는 생각지 못하고 무시해온 것에 대해 강도 높은 일갈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탁월한 선생님이지만 나는 단연 오은영의 공을 우선으로 꼽고 싶다. 음식과 동물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먼저 인간 됨이 더 우선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음식과 반려동물은 그다음이다. 인간이 인간 같지 않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반려견을 잘 돌본다 하더라도 공허나 허위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다가 인간답게 죽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점은 어떤 인간이든 죽어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유산을 결정하는 기초적이고 결정적인 만남은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다.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육아에 관한 세밀한 지침서가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바쁘고 고달팠기에 자녀를 이렇게 키우고 저렇게 훈육한다 하는 전범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물론 우리 선배 세대는 정말 자식을 사랑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안 사랑하겠는가. 단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부모의 역할이 물질적인 것의 충족, 즉 부양권에만 국한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 소중한 것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 아이에게 하는 말, 표정, 태도, 기준, 일관, 공의 등이 아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중추였다. 오은영의 공이 이 지점에 있다.

과히 오은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오은영이 대단한 건 기존에 없던 이론을 새롭게 창시했거나 무슨 위대한 가르침을 전달해서가 아니다. 그녀가 위대한 건 "자녀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다"라는, 이미 서구 교육학에서 완벽히 정리된 사실을 이 나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여 대중화시킨 데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인간 교육의 본질이 사회가 아닌 가정에 있음을 간파했다. 한 사람의 내적 기질과 성격은 만 3세 이전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의 축적과 연구의 결과로 발견해낸 것이다. 이후 서구사회는 인간교육의 방점을 사회에서 가정으로 턴하기 시작했다.

오은영의 『화해』는 가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작가인 저자 자신이 실제 상담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과거 한국일보에 연재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인데 최근 여러 방송과 미디어에서 그녀가 전하는 내용의 초본집과 같다고 보면 되겠다. 수많은 실제 사례를 풀어내면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내적 상처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의학적·사회적 연구의 적용, 실제적인 개선 효과 등이 상세히 기술되었다. 여러 사례를 소개하는 저자의 설명에서 의사로서의 전문적인 역량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동시에 포착된다.

책에는 수많은 내담자들의 사연이 나온다. '나'로 기술되고 있는 내담자들은 각기 다른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이 공유하는 동인이 있다. 바로 가정의 상처다. 부모, 자식, 남편, 아내의 위치에서 가지각색의 사연과 이유로 '나'가 된 내담자들의 상처는 한결같이 깊고 치명적이다. 영혼까지 파고드는 '나'의 상처와 억압은 정상 인간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저주와 같다. 안타까운 것은 가정에서 받은 상처는 외부에서 치유되기 정말 힘들다는 점이다. 마치 지하 암흑세계로 잡아당기는 사탄의 중력과 같다. 쉽지 않고 치명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벗어나야 함을 저자는 일관되게 강조하며 치유한다.

책 내용 중 깊게 공감한 대목이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학력이 아니라 결국 따뜻한 기억, 행복했던 추억뿐이라는 걸 일깨운 부분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이런 추억과 기억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걸 알려준다. 이 대목에서 아주 오래전 기억이 호출됐다.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낮잠을 자다가 눈을 떴는데 아빠와 엄마가 동시에 나를 사랑스러운 미소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생생히 기억나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정확한 시기는 모호하지만 당시 그 장면만은 완벽한 캡처로 남아 내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우울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며 고비를 넘겼다. 저자의 말대로 결국 우리 인간은 이런 에피소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제목 '화해'의 의미를 고찰했다. 저자 오은영이 제시한 화해란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가 아닌 나 자신과의 화해를 의미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타인과 우주에 다가가지 못한다. 나와 화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상처의 시작과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환언하자면 나(의 상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 나'가 된다. 즉 오은영의 『화해』는 '상처받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용기'라는 부제를 여러 내담자들의 사례를 통해 입체적으로 통찰하는 '나를 찾는 교과서'다. 내가 그토록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면서도 자기계발서에 살짝 걸쳐 있는 이 책을 탐독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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