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공부 -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조윤제 지음 / 흐름출판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래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큼 계발서가 가진 구조론적 모순에 대해 차갑게 비판해온 리뷰어도 드물 것이다. 내가 계발서에 냉담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계발서의 형태적 구조가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를 예외없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러나 가끔 그럭저럭 읽어볼만한 실용서를 만나게 될 때도 있다. 물론 달콤한 이야기로 무장했다는 점에서 다른 계발서와 별반 다를 건 없다. 하지만 주제를 추출하는 방식과 내용을 전개해가는 수준에 있어 가볍지 않은 밀도가 포착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된다. 대개 인문학적 재료와 방법을 적용한 책들이 이들 부류에 속한다. 즉 같은 계발서라 하더라도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는 내용상의 내공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조윤제의 <말공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분명한 계발서지만 인문학적 콘덴츠를 적절히 융화시켜 꽤 괜찮은 실용서를 만들어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한 저자의 경험이 실용적인 텍스트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뻔한 얘기지만 지루하지 않게 글을 쉽고 유려하게 뽑아내는 저자의 공력이 눈에 띈다.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쉽고 실용적인 계발서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말(言語)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500년 인문고전에서 찾은 말 공부'라는 강력한 책 제목은 이 책이 인문학을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을 홍보한다. 『논어論語』, 『맹자孟子』,『사기史記』 등 동양사상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불멸의 텍스트를 통해 '말 공부'의 각론을 훑는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소통해야 하는지 고전의 가르침과 예화를 통해 관통한다.

   이 책의 매력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을 동양고전 속에서 한 토막의 글감을 추출하여 재미있게 버무려낸 데 있다. 본격 실용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서술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치도 않은 적정선을 잘 포착한다. 여기에 매끄러운 문장이 결합되어 책의 주제와 카테고리에 맞는 적확한 힘을 지니게 됐다. 온갖 자극적인 미사여구로 도배가 되어 있는 서점가의 대부분의 계발서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현실 세태에 대한 시의성에 있을 것이다. 21세기는 그야말로 언어의 홍수 시대다. 작금의 대한민국도 소통의 중요성이 화두가 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말이 통하지 않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작게는 부부 사이에서 크게는 국민과 대통령 사이까지, 현실 한국은 극심한 소통부재로 적지 않은 피로를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의 공부를 전면에 내세운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며칠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했다. 짧지 않은 분량에 눈물까지 흘린 담화였지만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나는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말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소통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꼭 해야만 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담화에 엄청난 조직 개혁과 눈물의 사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던 것은 '꼭 해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사회가 이토록 극심한 소통부재에 직면한 본질적인 원인도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낸 데서 온 후유증이 아닐까. 청와대 참모진은 이 책을 대통령에게 추천해주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한 카뮈의 <이방인>이 번역 논쟁에 휘말리며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는 역자와 출판사, 댓글러들 간의 치열한 토론이 전개 중이다. 출판사의 요란한 마케팅 방법과 역자의 공격적인 논조, 즉 '태도'를 비판하는 댓글이 주류를 이루지만 개중에는 이번 논쟁의 핵심인 '번역'의 디테일을 놓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댓글도 적지 않이 눈에 띈다. 긴 연휴 기간(어린이날-석가탄신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출판사 측에서 그간의 댓글들을 일괄 삭제하기도 했지만 당분간 이 논쟁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 사람의 독자이자 리뷰어로서 다양한 주관적 해석을 엿보고, 그 와중에 간주관적(intersubjective)인 것을 추출하며, 종국적으로 가장 '카뮈적'인 게 무엇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을 생각할 때 역자의 논증과 새 번역본의 가치를 깊게 탐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한계 때문에 생산적이고 학습적인 책읽기에 더욱 열정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이방인> 탐구의 선순환적 피드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 본문과 긴 역자후기 모두 꼼꼼히 읽었다. 단어와 쉼표, 어느것 하나 허투루 읽지 않고 세밀히 살폈다. 느린 속도는 불가피했다. 물론 모든 책은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이는 평소 내 독서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에 우선하는 특별한 이유가 존재했다. 역자(이정서)가 지금까지 최고의 번역으로 꼽혀왔던 기존 번역(김화영 역)이 오역이었다고 지적하며 강렬한 논리로 비판하고 재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자가 자신의 번역이 카뮈의 의도와 <이방인>의 본래성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치열한 정독은 불가피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힌다. 문장이 매끄럽다. 낱말의 의미를 풀어내는 일차적인 해독력은 무난하다. 딱히 막히는 부분은 없다. 번역본이 매끄럽게 읽힌다는 건 일단 장점이다. 사실 기존의 김화영 역은 매끄러운 문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유의 밀도나 표현상의 의도와 무관하게 문장 자체만으로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맞춤법, 주술 호응, 문단의 전후 맥락, 단어 선택 등에서 김화영 역은 다소 투박한 듯 읽혔고 일부분에서는 조악한 느낌마저 들었다. 최소한 가독성에 있어 김화영의 번역은 그리 좋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두 번역본(김화영 역, 이정서 역)을 비교한 결과 단어와 문장이 주는 외연상의 어감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화영 역은 마치 교정이 되지 않은 글을 읽는 듯한 단절성의 비문을 자주 사용한 데 비해, 이정서 역은 거침없이 미끄러울 정도로 유려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을 일관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매끄러운 문장이 무조건적으로 옳거나 좋다는 뜻은 아니다. 번역의 핵심은 원문을 얼마나 충실히 옮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카뮈의 문체가 본래적으로 가독성과는 거리가 먼, 투박함과 불명확성을 구조적으로 내재한 것이라면 그 고유성을 그대로 살리는 게 제대로 된 번역이다. 어려운 건 어려운대로 모호한 건 모호한대로 오류는 오류대로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게 최고의 번역인 것이다.

   선술했듯이 각 사건의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이정서 역이 보다 높은 가독성을 가진다. 또한 주인공 뫼르소를 위시한 소설 속 주요인물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데에도 이정서 역이 명확한 입장에 서 있다. 역자 이정서 씨는 이례적으로 긴 역자후기에서 김화영의 오역을 거침없이 지적한다. 무려 58개의 오역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오역으로 규정한 문장과 문단을 세밀게 해부하며 소설 <이방인>의 개별적 각론들을 주석한다. 역자의 논증은 구체성, 성실성, 일관성에서 부분적으로 어느정도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그래서인지 출판계의 잡음과는 별개로 서점에서 불티나게 판매되고 있다.

   기존 번역을 재단하는 역자의 논거 중 핵심은 단연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동기다. <이방인>이 부조리 문학으로 불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살인 동기와 법정 태도에 있었다. 기존 번역서들은 공통적으로 뫼르소의 살인 동기를 '태양'에서 찾았다. 그러나 역자 이정서 씨는 '칼날'에서 찾고 있다. 태양은 칼날을 수식하는 형용적 위치에 있을 뿐이다. 역자는 뫼르소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정당방위였고 사건 전후에 우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진행과 사건 전개가 명징한 인과관계로 구성된 필연성의 소설이라는 것이다. "우연성만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두고 위대한 소설이라고 하면 카뮈를 모욕하는 것이며 노벨문학상 위원회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힘을 주어 강변하기도 한다. 즉 역자는 부조리 문학으로서 소설 <이방인>이 분출해왔던 특질에 대한 기존 통념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해석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발적이다. 김화영 교수의 오역으로 한국인들이 여태까지 <이방인>을 잘못 이해해왔다,는 역자의 주장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뿐만 아니라 해외의 출판계와 비평가, 독자들도 역자와 비슷한 선상에서 <이방인>을 읽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태까지 쏟아낸 역자의 논증 중에서 이에 대한 디테일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사르트르의 해설을 위시하여 <이방인>에 대한 해외의 권위있는 비평과 해석에 대한 대응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역자의 일차적인 공격 대상은 김화영 번역본이지만, 논쟁의 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역시 핵심은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은 역자의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역자의 정당방위 주장은 철저히 역자 자신의 '해석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 실제로 역자의 번역이나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나 뫼르소의 살인 장면에서 보이는 사건 전후의 인과적 전개과정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과 필연의 문제로 볼 사안도 아니다. 위대한 소설은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고 역자는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뫼르소의 행동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뫼르소 당사자의 머리속에 들어가보지 않은 이상은 불가해하다. 시종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1인칭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뫼르소가 가진 생명력을 외면한 채 소설 구조의 형식적 기제에 해당하는 우연과 필연을 연역적으로 대입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뫼르소가 소설 속 가상인물이 아니라 살아숨쉬는 생명력 있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도 우·필연의 프레임은 불필요하다. 그렇기에 이는 번역을 넘어서는 영역, 즉 열려있는 텍스트로서의 '소설적 자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개별 수용자가 가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역자는 정당방위라는 연역적 결론을 상정하고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에 구속시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번역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역자가 카뮈의 세계에 그토록 자신이 있다면 <이방인>뿐만 아니라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비롯한 카뮈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번역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필수적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부조리는 우리가 인간의 내재적 가치와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과,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이를 카뮈가 어떻게 픽션화했는지, 그리고 두 텍스트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와 긴장이 어떻게 부조리라는 개념을 입체적으로 천착해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시지프 신화>의 번역은 꼭 필요하다. <이방인> 한 권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다.

   언어학자 롱랑 바르트는 <이방인>의 문체를 두고 가장 '이상적인 문체'라며 극찬했다.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전부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작가로서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거리두기로 수렴될 수 있다. 그 결과 신비스럽게도 사실만을 담담하고 적확하게 기술하는 건조하고 울림 좋은 문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바르트 개인의 해석이지만 최소한 작가와 주인공, 즉 카뮈와 뫼르소 간에 존재하는 '객관적 여백'은 분명 존재해 있는 것이다. 카뮈도 이럴진대 이정서 씨의 주장은 타언어권 번역자의 입장치고 지나치게 일방적인 면이 있다.

   양비론을 싫어하지만 김화영 교수의 침묵도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논쟁의 흐름상 가만히 있어야 할 단계를 넘어섰다. 물론 새움출판사와 역자 이정서 씨의 문제제기 방식과 태도에 문제점이 없지 않다. 선술했듯이 아무리 자신의 번역에 확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선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 오해를 살 만했고 비판 받을 만했다. 김 교수로서는 불편할 만하다. 그러나 이번 논쟁의 핵심은 번역의 질이다. 어떤 번역이 카뮈와 <이방인>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정서 씨는 집요하고 일관되게 기존 번역의 오류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왔다. 또한 김 교수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응답은 없다. 개정판에 참고하겠다는 말 외에는 침묵으로 일관 중이다. 지식인의 참된 실력은 질문을 대하는 태도와 실력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성실한 답변은 지식인이라면 의무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원칙이다.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히 답하는 게 위대한 학자의 태도다. 이런 차원에서 김 교수의 적절한 답변을 기다리는 독자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이번 번역 논쟁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 하나와 쉼표 하나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반으로 텍스트의 해석은 개별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구심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내 책읽기의 부끄러운 현재상을 직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인식이 있었다. 그랬다. 고백컨대 난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카뮈가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를. 쉼표 하나도 무의미하게 사용하지 않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뒤늦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 책(새 번역본, 이정서 역)이 나에게 준 선물은 녹록지 않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aibal 2014-05-2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객관적으로 쓰시려고 노력은 하신 것 같습니다만...

김화영에 대한 공격이 시정잡배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언 수준이라... 오로지 김화영을 매장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눈에 핏발 세우고... 그렇게까지 안해도 충분한 일이고, 오히려 더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일인데...

문화, 출판 종사자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금도는 지키면서 사업을 했었는데, 이정서에 오면서 그런 금도가 최초로 무너졌습니다. 이런 글을 쓰시면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는 셈이 됩니다.

정당방위인데 번역이 잘못 되어서 몇십년 동안 한국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정서가 주장하고 대대적으로 마케팅하였는데, 이제 정당방위는 아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고...

정당방위가 잘못되었다는 반론에 이정서는 일체 재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방위 주장은 소설의 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엉뚱한 주장이고, 세계적인 코메디라 할 것입니다. 재반론을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잘못된 정당방위 주장에 사과를 하여야할 것입니다.


김화영의 반응은 그 다음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덧글을 달았더니, 고압적으로 글쓰지 말라고, 명령까지 하더군요. 부정적인 덧글, 리뷰글이 우리 문화계에 아주 안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훈계까지 덧붙여서.... 자기네는 아예 김화영을 물고뜯기를 살떨리게 하였으면서 말이죠... 정상적인 출판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전직 조폭들이 모인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다윗 2014-05-21 10:12   좋아요 0 | URL
요청드린 마지막 문장 삭제는 바로 해주셨군요. 빠른 피드백, 고맙습니다.

서평에 기술했듯이 저도 이번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님은 제가 결과적으로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학문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예의와 태도를 보다 중요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정서 씨의 논리가 갈팡질팡하고 있고 궤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학문의 내용조차도 점차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제 서평이 이정서 씨의 편을 들고 있다고 판단하셨다면 님이 제 글을 잘못 읽으셨거나 제가 글을 잘못 쓴 것입니다. 글을 쓴 리뷰어로서 본 서평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각인해둡니다.

제가 이번 번역 논쟁을 보면서 경계했던 건 '불관용'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출판사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구었던 댓글 토론도 출판사측의 일괄 삭제로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댓글을 삭제하고 통제하며, 더욱이 법적 소송까지 운운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첨예한 문제를 토론하다보면 나와 다른 너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인정하는 전제로부터 토론은 출발해야 한다고 보는데, 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 상당히 씁쓸합니다. 물론 입장을 바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정서 씨와 일부 댓글러들 간의 싸움을 보면서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했던 저 같은 미천한 독자는 고개를 떨구게 됩니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하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비통한 마음으로 루터파와 교황파에 관해 말했듯이,"말과 글의 전쟁이 오래가면 폭력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말은 정확한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새움출판사와 이정서 씨의 태도에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 논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즉 생산적인 토론의 장으로 호출할 수 있는 당사자는 바로 김화영 교수로 본 것입니다. 이황 선생이 기대승에게 보인 대학자로서의 크기를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그것을 감히 기대했던 것입니다.

김화영 교수에 대한 제 입장의 취지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분이 번역하신 카뮈 전집을 통해 카뮈를 읽은 사람입니다. 물론 님의 분노하는 마음과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jaibal 2014-05-2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 님....
감사드리며, 고견에도 감사드립니다.
 
그가 그립다 - 스물두 가지 빛깔로 그려낸 희망의 미학
유시민.조국.신경림 외 지음 / 생각의길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무현(불특정다수가 읽는 서평이기 때문에 존칭은 생략)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정치인이 있을까. 동시에 많은 욕을 받은 정치인이 또 있을까. 지극히 나이 드신 분을 제외하고 한 번쯤 좋아했을 법한 정치인이 바로 노무현이다. 좋아할 만한 충분한 매력을 가졌고 동시에 실망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존재했다. 그가 서거한 지 어느덧 5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영화 <변호인>으로 그를 재인색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지만 최근의 어지러운 시국 탓도 있겠다. 그 어느 때보다 주변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많이 회자된다.

<그가 그립다>는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수필집이다. 노무현 5주기 추모집의 성격을 띤다. 많은 저자들이 참여했다. 자칭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었던 작가 유시민을 위시하여 총 22인의 글을 담았다. 집필에 참여한 22인의 이력은 가지각색이다. 작가, 평론가, 교수, 방송인, 연극인, 이발사, 요리사 등 우리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다양한 빛깔을 담았다. 한 권의 소설집처럼 독립된 에세이들은 주제와 문체가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개별성을 가진다.

그중 몇몇 글이 눈에 띈다. 당선 전부터 인연이 되어 청와대 전속 이발사와 요리사가 된 두 저자의 글은 순박하고 따뜻해서 좋다. 이들의 글은 재임 당시 권위와 허례허식 없는 노무현의 소박한 인간미를 잘 소개한다. 특히 퇴임하는 날 함께 기차를 타고 사저로 가는 도중에 필요한 도시락을 준비한 요리사의 애틋한 일화는 훈훈하고 애잔하다. 결국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실린 글이 모두 읽을 만한 것은 아니다. 몇몇 저자들은 이 책의 존재목적인 노무현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아닌 개인의 정파적 입장을 토로하는 함몰성을 보인다. 곱게 읽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특히 저자 중 어느 정신 나간 교수는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국민이 갖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대통령이었고, 그로 인해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무현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책을 읽고 나이를 먹어가며 깨닫는 명확한 진리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한한 능력과 잠재력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진다. 정치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도 우리사회는 역사와 인물을 천착함에 있어 극단적인 진영주의에 함몰되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동시에 놓고 입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지력과 판단력이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을 완전무결한 신의 연역성 위에 올려놓고 모든 비판과 반론을 굴곡시키는 행태는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도 옳지 않은 짓이다.

나 또한 노무현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과 한계까지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가진 명암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거리두기가 결여된 정치인 팬클럽은 교조적 신격화의 경향을 띠게 되고 종국적으로 보편 국민과 반대세력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은, 노무현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한다. "노무현이 매우 후진 국민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했다"고 주장한 얼빠진 교수의 지성과 현실인식에 적지 않은 짜증이 밀려온다. 사랑과 그리움은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다.

내가 노무현을 좋아했던 건 그가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행동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땅의 어렵고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마치 자기 일처럼 관통하려 했던 그의 순수한 마음과 패기를 사랑했다. 또한 그것을 뚫고 나가는 소신과 용기도 존경했다. 적어도 '좌파'를 하려면 노무현처럼 해야 한다. 19세기 원류 좌파들은 인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을 가진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지고한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따뜻한 박애주의야말로 진보좌파가 가져야 할 핵심가치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간 노무현의 진심과 열정을 나는 한없이 사랑한다.

물론 대통령이 된 후에는 많이 실망했고 미웠다. 그러나 그에 대한 향수는 내 가슴 한 구석의 작은 방 안에 오롯이 보관돼 있다.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우리에게 이토록 인물이 없는가 하는 푸념을 하게 될 때, 가끔 나는 가슴속 작은 방 안 노무현의 얼굴을 그린다. 신간 <그가 그립다>는 이 그리움을 애틋하게 불러일으키는, 그러나 몇몇 저자의 정신 나간 주장으로 맥이 빠지는, 그래서 부득불 선택적으로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책이다.

그러나, 나도, 노무현이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뮈 전집 특별판을 질렀다. 오전에 '네24'에서 결제한 것이 보기 좋게 당일 저녁에 집에 도착했다. 2010년 카뮈 작고 50주기를 기념하여 출판사 책세상에서 출간한 것이다. 7권의 두꺼운 양장본으로 구성됐다. 사진에세이집을 제외한 전체 19권을 연대순으로 재배치했다. 연보, 해설, 옮긴이글을 실었다.

   이미 <이방인>을 위시하여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김화영의 번역으로 읽었다. 카뮈의 문학세계를 보다 깊게 천착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가장 자유로운 정신, 가장 첨예한 지성, 가장 명징한 언어, 카뮈의 세계를 연대순으로 읽을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큰 축복이다. '부조리 문학(不條理文學, literature of the absurd)'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어 현대소설의 가장 전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간절히 느껴보고자 했다.

   고백하자면 최근 들어 더욱 카뮈가 읽고 싶어졌다. <이방인> 번역 논쟁이 이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최근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소란들이 기본적으로 카뮈식의 부조리(Absurdity, 不條理, L’Absurde)를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악질적으로 존재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카뮈는 개인의 부조리와 사회의 부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7년 노벨문학상을 카뮈에게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은 멋진 헌사를 남겼다.


   "카뮈는 세계 속 인간의 조건을 특징지음에 있어 거기에 모든 개인적 의미(personal significance)를 부정하고, 오로지 이를 부조리(absurdity)를 통해서만 바라봄으로써, 또한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대표하게 됩니다. (…) 이러한 점이 <이방인>을 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직원인 주인공은, 부조리(absurd)한 사건의 연속 끝에 아랍인을 죽입니다. 그러고는, 자기 운명에 무관심(indifferent)한 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한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합일하여 무기력에 절은 수동성으로부터 탈출합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병들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사회의 오류와 한계는 무엇인가. 개인의 문제인가 국가의 문제인가. 국민으로서 각 개인은 건강한 가치관을 확보해왔는가.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에게 철학은 존재했는가. 정치는 왜 필요한가. 정치인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 중에 무엇이 우선하며 그 사이에서 '박애'는 어떤 형태로 발현하는가.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구조만으로 절반 이상의 부정不正을 지닌 오류 시스템인가. 개인의 책임감과 윤리의식은 어디서부터 태동하는가. 우리사회의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는 위험수위인가. 그렇다면, 종합적으로, 이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인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용솟음친다.

   이 지난하고 서글픈 질문들을 냉정하게 관통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카뮈를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성세대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이 땅의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몹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정말 화가 나는 게 있다. SNS를 위시한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요란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순수하고 일차적인 슬픔의 표출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뿜어내는 방향성 잃은 감정의 폭발들이 문제다. 더욱이 몇몇 SNS의 글들은 거짓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일찍이 강조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곧 '무지無知'를 뜻한다. 무지는 사전적으로 "아는 것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넓은 의미로 확대하면 보다 입체적인 정의를 갖는다. 하나의 지식이나 사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일차적인 무지라면 타인의 마음과 현재의 상황에 몰이해한 것은 보다 궁극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재앙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사회는 후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무지의 집대성적 광기를 양산했다. 뉴스와 신문으로 대변되는 메스컴뿐만 아니라 대중과 위정자들까지도 이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력보다는 비본질에 함몰된 원심력의 방해로 국민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응집성을 잃어왔던 게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었다.

   방송과 SNS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적 표현들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그것을 만들어낸 제삼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 표현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참다 참다 못 참아서 폭발된 것일 수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로는 위로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해 시작된 위로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위로라고 할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의 무지에 대한 격언은 곧바로 공자孔子가 역설한 '중용中庸'의 철학과 연결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주자朱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중용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한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중용이며,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에서 출발한다는 게 중용 철학의 핵심이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하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忌憚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시중時中은 때, 곧 타이밍(timing)을 의미한다. 같은 진리라도 적절(timely)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학에서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시時 속에서 중中을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중용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지 않은 중이 어떻게 때에 맞게 발현되느냐(時中)를 뜻하는 것이다. 시기의 적절함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인 것이다.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폭포수처럼 분출되고 있는 세간의 관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공자 식으로 말해서 적절한 타이밍을 갖추고 있느냐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처한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락된 공허한 언어의 전달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꼭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아픔의 밀도와 궁극을 모르는 입장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할 수는 없는 걸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절제된 자세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게 수준 높은 위로의 모습이 아닐까. 위로가 과하여 잉여가 될 때 상대는 피로를 느끼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씹으면서 '이해'와 '위로'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종속적 선후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소설에서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반드시 관통해야 할 그 시절의 특질이라고 지적하면서,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위로는 분출이 아닌 이해를 전제한 기다림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위로하려는 대상이 현실에서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모호한 고유성과 불가해한 밀도를 가진 상황이라면, 진정한 위로는 나중의 영광을 기도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게 아닐까. 꼭 할 말을 해야 하고 상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할까. 손석희의 침묵이 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언어화하여 표현시켜야만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침묵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게 차원 높은 위로의 바른 순서다.

   절제하자. 차분해지자. 실제적인 것들을 살펴보고 챙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사실을 추출하는 것도 벅차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 지금으로서는 보다 절제하는 게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4-04-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동안 이번 뉴스를 보면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받더라도 그저 관심으로만 남는다면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 없이도 위로의 마음을 느끼고 전달하는 것도 충분하다고 봐요. 이 글을 제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싶은데 괜찮은지요?

다윗 2014-04-18 23:49   좋아요 0 | URL
네. 퍼가셔도 됩니다. 잉여된 위로는 항시 인간 사이의 피로감을 쌓을 뿐입니다. 공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