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사람들의 넋이 쌓여 이여진다. 그 역사가 우리의 눈앞에 있다. 어김없이 찾아 온 5월의 광주는 어떤 내력을 품고 있는지 알아 볼 일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전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지켜졌다.  


 서구나 일본 등 선진국들이 그랬듯이 우리나라도 근대 공업도 섬유공업에서 시작됐다. 특히 20세기 이후 전남은 면화와 누에고치의 주산지였던 탓에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각광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목포항에는 면화의 1차 가공시설이 밀집했고 여기서 가공을 마친 면화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내륙도시인 광주에도 면화, 누에고치 등과 관련된 기관과 영농 및 교육시설이 들어섰고 점차 제사와 방직공장이 등장하면서 전국 굴지의 섬유산업 도시로 변모해갔다.


 광주의 섬유산업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광복 후에도 광주.전남 지역의 산업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종연방직주식회사(종방, 1887년)가 광주에 대규모 면방공장을 짓게 된 배경 중 하나는 화순의 석탄(무연탄)도 큰 몫을 했다. 석탄은 공장 가동의 주요 에너지일 뿐 아니라 기숙사 등 편의시설의 난방을 위해서도 없어서눈 안 될 연료였다. 종방은 1934년에 화순탄광을 인수하여 전남광업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 전래섬유의 대표적인 것은 명주이다. 하지만 면화는 일제 침략과 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농가의 부녀자들이 누에치기를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식상법을 반포하여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게 했다. 전남의 경우 1930년대에 생산량이 6만 석이었다. 그중 최대 생산지는 나주로 1만 석이었으며 광주는 5천 석이었다. 전남이 경북에 이어 두 번째 생산규모였고 양잠이 전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쌀, 면화에 이어 세 번째였다.


 이흑.일청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삼백이라 했다. 이흑은 화순의 무연탄과 완도의 김, 일청이란 담양의 대나무(죽세품)를 가리켰다. 내륙도시 광주는 경방, 평양방적에 비해 매우 잘 나가는 섬유산업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1896년 8월에 13도 체제로 지방행정제도가 바뀌면서 전남도청의 소재지가 광주로 정해졌다. 여기에는 세가지의 배경이 있다. 첫째, 광주는 지리적으로 약간 북쪽에 치우쳐 있기는 했으나 거의 전남의 중앙이라 해도 무방할 만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둘째, 역사적으로 광주는 과거 무진주 및 무주 중심도시였다. 셋째, 무엇보다도 전남관찰부의 광주 확정은 1896년 초 행정구역 개편 직전의 나주 단발령 항거에 대한 중앙정부의 징벌적 행정조치의 측면이 강했다.  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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