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무리하며

 

이번의 글로 연재는 마무리된다. 성적시민권이란 화두를 잡고 참 많은 곳을 쏘다니다 돌아온 느낌이다.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 운동의 역사도 이제 스무 해 가까이를 채워가지만, 동성애의 정상성 여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거리이고 동성애자 인권의 사회적 수용 여부를 둘러싼 의견 역시 분분하다. 이런 현실에 일일이 맞대꾸할 수도, 그렇다고 깡그리 무시한 채 발목 잡히지 않게 앞으로만 저벅거리며 갈 수도 없기에 대범하지 못한 필자가 중언부언 논의를 펼친 건 아니었나 하는 걱정도 이제야 슬그머니 든다. 하지만 성적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지금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는 ‘시민됨’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풀무질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이 신선한 자극에 고무된 수많은 질문들을 터트려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은 한 명의 동성애자가 시민이 될 수는 있지만, 한 명의 시민이 동성애자로 사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었다. 동성애자가 시민으로 사는 것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하는 ‘간주(regard)’의 힘이다. 그 덕에 집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그리고 길거리에서든 사람들이 일단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부터 밝히라는 질문을 불쑥 던지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이성애자인 척하기란 너무 쉬운데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연기가 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동성애자는 이성애자가 아니어도 안전하게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안전 보장의 유일한 계약 조건만 지킨다면 지속 가능하다. 절대 동성애자임을 들키지 말 것.

동거하는 두 명의 여성이나 남성의 관계가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형제, 자매나 친척 간 혹은 친구 사이도 아니라면 통상 사람들이 머릿속에 남는 가능성은 한 가지, ‘섹스하는 사이’뿐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는 항상 이성애자에 비해 더 ‘성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이제 이야기는 인간의 욕심이 화를 부르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과잉된 성욕 역시 불행을 자초할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지고, 이것이 인간의 비뚤어진 마음, 나약한 정신, 기능이 고장 난 몸에 의한 것이라면 엄격한 교육과 처벌, 그리고 세심한 치료로 회복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변경이 불가능한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 혐오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는 바로 이러한 치료 가능성의 기대 때문에 새로운 비극을 빚는다. 이제 사회는 아프거나 다칠 위험이 있는 것처럼 동성애에 빠질 위험을 제시하고, 마약 중독처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전염병처럼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각심에 도취된다. 그래서 반드시 이들을 찾아내 의사에 데려가는 것이 위엄 있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진 이 논의는 근대와 함께 등장한 시민권과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엮이는지를 보여준다. 인류의 역사에서 없었던 사랑도, 섹스도 아니었건만,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에 새삼스레 만들어졌다. 용감한 여성학자들이 밝혀냈듯이 남성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 남성이 되지 못한 존재로서 여성을 정의하고, 남성다움을 칭송하기위해 남성성이 결핍된 결과로서 여성스러움을 위치하게 하는 숨겨진 과정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결코 없어질 수 없(어야 하)는 성차를 지키기 위해 이성애라는 신화를 원했고, 동성애 혐오라는 자기 검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왕과 귀족, 노예와 같은 신분제가 없어지고 천부 인권을 부여받은 독립적인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약속하는 국가와 계약을 맺는 것이 시민권의 시작이라 배우지만, 아무리 둘러보고 재차 심사숙고해보아도 ‘누구’여도 상관없는 세상이 아니라 여전히 ‘누구’여야만 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만약 정말 내가 누구여도 상관없는 세상이 되려면, 내가 누구여도 전혀 개의치 않고 평등하게 대할 기회를 상대에게 주려면 동성애자는 가장 먼저 커밍아웃부터 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상관치 않음도 성립할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수록 이건 사기극이다! 차별의 해결책으로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구호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는 소수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기극의 화려한 허울이 된다.

만약 누군가 고양이를 붙잡고 “나는 너와 나의 차이를 존중해. 그러니 고양이 너는 너의 모습대로 살아도 좋아”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필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이제 ‘고양이인 채로 살아도 좋다’라는 그 말 자리에 흑인이나 장애인, 이주노동자, 그리고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 흔히 관용의 대상으로 곧잘 일컫는 소수자들의 명단을 넣어보라. 존재 자체에 그런 식의 관용은 베풀 수 없다. 다른 이의 반대나 찬성, 또는 승인과 불허의 여부에 따라 존재가 있었다가 사라졌다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존재는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모두가 똑같이 존재하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이성애자로 살아도 좋다’라는 관용을 베풀 수 없는 것은 동성애자가 속이 좁아서가 아니라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같은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구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정체성을 본질화하면서, 이성애자들이 사회적 다수인 만큼 관용을 베풀어 소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자고 외치는 외침 따위는 결론적으로 차별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묵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마도 차이가 없어질까 봐, 구분선이 없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차이의 존중은 차이를 유지하는 교묘함을 낳는다.

관용과 차이의 존중을 이렇게 나쁜 것인 양 몰아붙이면 오해받기 쉽겠지만, 이 글의 당부는 동성애자를 관용하지 말라거나 차이를 그대로 두라는 뜻이 아니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자체가 차별을 일으키는 원인은 아니다. 즉 동성을 좋아하고 이성을 좋아하는 차이가 아니라 누구를 좋아하느냐로 우열과 귀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그 차이가 바로 원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만들어진 차이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타자와 맺는 관계에 항상 위치성이 동반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가 정작 의도했던 관용도, 존중도, 평등도 실천할 수 없다. 이에 동의가 된다면 그동안 섹슈얼리티를 배제했던 시민권의 변화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펠란은 “노동과 섹스가 혼합된 일의 지위에 대해 성노동자(sex-worker)라는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혼란을 생각해보라. 이주노동자는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표현해 시민권에 가까운 존재로 인정되고자 한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의 표현은 오히려 성원권에 대한 자격 박탈로 고려된다”라고 지적했다. 성매매의 경험,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등 어떤 섹슈얼리티인가에 따라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따진다. 성노동자라는 말로 노동자 정체성을 강조해 시민권을 인정받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적 차이’에 대한 억압이 강함을 반증하는 셈이다. ‘비정상적 섹슈얼리티’를 포기하고 부인하게 하는 시민권은 결코 모든 것을 완전히 지워주지는 않는다. 탈성매매를 증명하면 받는 혜택이 있지만, 여전히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으로의 낙인은 남는다는 점에서 결코 이등 시민의 꼬리표를 뗄 수 없다. 시민권의 개념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역시 한계에 갇힌다.

성적시민권은 이런 시민이 되는 자격의 범주를 다시 설정한다. 기존의 시민권을 성적시민권으로 재설정하는 것은 바로 ‘성적 차이’ 때문에 사회 밖으로 밀려나고 배제된 삶의 복권이다. 이제 ‘성적시민권이 동성애자를 시민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다. 동성애자가 이미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시민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적시민권이 동성애자들에게 시민으로의 삶을 새롭게 기획하게 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글의 이해를 위해 밝혀두는 것은 이 글에서는 일부러 성적소수자, 퀴어라는 표현을 자제하고 트랜스젠더의 시민권 분석까지 포함하지 않았다. 또한 게이와 레즈비언의 차이도 세세히 고려하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성적시민권 논의의 그 두께가 두텁지 않은데다, 이를 포함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더 많은 지면 그리고 더 많은 시간과 공부가 필요하기에 논의 지점의 확장보다는 동성애자/이성애자로만 집중하려 했다. 다만 앞서 게시된 김주희의 ‘성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성노동자인가’라는 글도 성적시민권의 관점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을 것이고, 다음 연재에서 루인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분석이 더해질 것에 이 글의 부족함이 조금은 덮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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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Shane Phelan, “Bodies, Passions and Citizenship,” Critical Review of International social and Political, Philosohy,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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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npa 2010-11-0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정성이 담긴 좋은 연재물이었습니다. 마지막회, 너무 아쉽습니다.ㅠㅠ 다른 매체, 다른 지면을 통해서도 계속 의미 있는 이야기들 들려주셔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로그인 2011-05-2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나다로 이민을 오고 나서야 동거, 동성애자에 대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나와 함께 일하면서, 직장동료로 만나 친구가 된 뒤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아무렇지도 않더군요. 먼저 그 사람과 친해지고 사정을 알게되면 그런건 그 사람의 개인사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