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성 결혼과 성적시민권

 

당신은 네 번이나 하고 왜 나는 못하게 합니까

독일에서 ‘동성 커플 파트너십 등록법’이 제정되기 전인 1999년 6월 26일에 열린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적소수자들의 자긍심 퍼레이드에서 한 참가자는 게하르드 쉬로더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새겨진 피켓을 들고 나왔었다.

‘쉬로더씨, 당신은 네 번이나 결혼하고서 왜 나는 못하게 합니까?’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다음의 소송에서 동성 간의 관계에 대한 법적 해석을 살펴볼 수 있다. 엑스존 소송이 진행되던 2003년 3월 17일, 20여 년을 애정으로 함께 살았으나 계속되는 파트너의 폭력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결별을 선택하게 된 한 40대 동성애자가 법원에 ‘사실혼 관계 해소로 인한 재산 분할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모든 재산상의 명의가 상대편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 재산 분할을 받지 못하면 20년간의 노동과 헌신이 빈털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해 6월 22일, 서울고등법원은 겨우 7,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은 내렸다. 두 사람이 21년간 모은 재산이 10억 원이 넘는 점을 감안할 때, 7,000만 원이란 배상금은 너무도 터무니없었다. 이는 법원이 두 사람을 ‘동반자 관계’로 해석한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다음 해인 2004년 7월 27일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아예 판결문에 “우리 사회의 혼인이라 함은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는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을 의미한다”라며 “동성 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더라도 사회 관념상이나 가족 질서 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소송은 당연히 기각되었다. 당시 이 판결은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인권 단체들의 비판 성명서가 발표되는 등 사회적으로 꽤 큰 논란을 일으켰다.

법원 판결의 근거는 우리나라 헌법 제36조 1항이었다. 이 조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라는 내용인데, 이때 ‘양성’을 남자와 여자로 해석한 것이다. 판결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설사 틀림없는 ‘동성 간 사실혼 관계’였다고 해도 동성 간에는 혼인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사실혼으로도 ‘법’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는 동성 결혼이 시민권 논의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결혼을 중심으로 많은 사회적, 경제적, 법적 혜택이 편성되어 있는 사회에서 부부와 같은 연을 맺은 동성 간의 관계가 우정 이상의 관계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즉 친하긴 하나 결코 가족은 아닌 단지 ‘타인’으로서만 그 위치가 해석될 때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아왔더라도 그의 삶의 근거가,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일순간에 박탈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가

대체 결혼이란 무엇일까. 왜 법은 그 관계의 의미(사실상의 혼인 관계라는 점)를 파악하면서도 혼인이 아니라며 관계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법적으로 부과하기를 회피하는 것일까. 그저 ‘성별’이라는 하나의 기준에 의해 한편으로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부여받는 사회의 본연적인 질서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접근 불가의 영역이 되는 것은 모순이지 않나.

결국 문제의 핵심은 ‘독점’이다. 우리는 결혼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만 남겨두려는 이 지독한 독점욕이 과거 백인과 흑인의 결혼을 막기 위한 ‘인종 간 결혼 금지법’으로도 발휘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1948년도에 결혼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권리’임을 밝히며, 미국에서 최초로 인종 간 결혼 금지를 철폐했던 과거 전례를 언급하며, 그로부터 60년 후인 2008년 5월에 역시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주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판결은 그 해 11월 캘리포니아 주 헌법을 ‘결혼은 오로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유효하다’는 조항으로 개정하자는 ‘주민발의안 8호’가 주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 통과됨에 따라 다시 뒤집어졌다. 이로써 동성 결혼 관련 업무들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2010년 8월 4일, 이번에는 연방지방법원이 ‘주민발의안 8호’가 미국 헌법의 정신에 위배되며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동성 간 결혼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이번 판결에 항의를 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인종 간 결혼 금지가 그러했듯이 이 논쟁도 결국 연방대법원에 가서야 결론이 나게 될 것이다.

앞서 연방지방법원의 반 워커(Vaughn R. Walker) 판사가 "주민발의안 8호는 동성 간의 결혼은 이성 간의 결혼보다 열등하다는 사적인 윤리 판단 기준에 기반했다”라고 지적하며, 이런 발의안은 “결국 동성 간에는 결혼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라고 판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동성 결혼을 싫어하거나 도덕적이지 않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적 판단이나 감정이 헌법에 명시된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쟁의 핵심이 무엇을 더 허용할 것인가가 아닌, 과연 무엇을 금지해도 괜찮은가에 놓여 있음을, 그것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권리

‘동성 결혼 합법화’는 단순히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똑같이 모든 걸 누리고 싶다’는 차원의 요구가 아니다. 누구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없게 하는가’로 바꾸어 질문을 던지면, 사회가 어디까지 인내심을 발휘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시민의 권리를 얼마만큼 잘 보호하려고 애써야 하는가의 문제임을 다시 볼 수 있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회의 한 구성원에 대한 차별임이 명백하기에, 유럽 등 서구 국가들은 고육지책으로 동성 간 파트너십을 등록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결혼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과 유사한 제도를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Civil Unions,Registered Partnership Act, PaCS 등 나라마다 그 이름과 내용이 다르다). 가장 간단하게 기존의 결혼이 동성에게도 적용됨을 인정하고 결혼 제도를 개방하면 될 텐데, 왜 이리 굳이 복잡하게 새로운 이름의 법을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동성 커플에게 허용할 법적 권리의 범위를 세심하게 제한하기 위해서다. 결코 이성 커플과 동일한 지위, 설사 거의 유사한 권리를 준다고 해도 ‘결혼’이라는 그 상징적 지위만큼은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동성 간의 결혼에 대한 주장이 가족 구성의 욕망을 모두 결혼으로 환원해버리고 썩어빠진 결혼 제도를 강화시킬 뿐이라는 지적도 물론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가족 구성의 욕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친밀함의 관계는 훨씬 더 다양하지만 결혼이 지나치게 많은 특권을 움켜쥐고 친밀함을 기혼과 미혼으로만 양분해온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경제적인 특권은 유혹적이며 또한 유용하다. 유산상속권, 연금과 보험, 가족수당 등의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수급권, 주택임대차 승계권, 세금 감면, 일상적 가사 대리권 등은 행정적으로 결혼을 등록한 부부에게만 허용된다. 그리고 나아가 입양이나 인공 수정을 할 권리, 파트너가 아플 때 보호자가 될 권리, 파트너의 국적에 따라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인정받을 권리 등 가족으로서 생활을 안정적으로 영위해나가는 데 필요한 많은 권리 역시 모두 기혼자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정부가 서민들을 위해서라며 소위 ‘생애 최초 주택 구입 자금’, 혹은 ‘근로자 서민 주택 구입 자금’ 등 영세민 전세 자금 대출 정책은 만들었지만, 자격 요건에서 정작 대출이 가장 필요할 35세 미만의 단독 세대주인 미혼 여성은 제외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진 두 이성은 결혼을 할 수 있지만 사랑에 빠진 두 동성은 결혼을 할 수 없다. 결혼을 선택할 권리는 결혼을 하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포함한다. 또 두 이성이 전혀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만 하면 기혼자로서의 모든 혜택을 누린다는 점에서 결혼이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지 않음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가족의 구성 요건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와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나누는 개인 간의 약속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반드시 혈연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굴레만 벗으면, (동성 결혼 반대자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단위로서의 가족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질문을 회피하지 말자. 왜 사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권리를 결혼이 독점하고 있는가? 인간이 만든 사회적, 법적 제도로서의 가족과 결혼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이 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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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Alma Soongi Beck, <사회, 문화, 시민권을 통해 본 캘리포니아의 동성 결혼 법적 투쟁>,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미간행, 2008.
http://cafe.naver.com/hopem/1158, 캘리포니아 연방법원, 동성 결혼 법적 인정 논란, 
검색일 2010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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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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