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깃발 도난 사건의 전말
이것은 한 기이한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이화여자대학교이며, 도난품은 한 장의 무지개 깃발이었다. 피해자는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이하 변날)>라는 ‘해학적’ 이름을 가진 레즈비언 인권운동 모임이다. 사건의 범인은 두 명이었다. 범행 동기를 제공한 것은 그들의 종교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의 범행은 CCTV에 의해 찍혔고 자백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명백한 도둑질임이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범인들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변날’은 2003년부터 해마다 학내 동성애에 대한 인식 개선 및 교우들과의 소통을 위해 ‘레즈비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거의 매해 섬뜩한 사건이 발생했다. 첫 해에는 동아리방에 두었던 문화제 자료집 수백 권이 사라진 채 기독교에서 쓰는 성유로 추측되는 액체가 뿌려져 있었고, 문화제를 홍보하기 위해 학교 내에 붙여둔 포스터도 모두 뜯어져 있었다. 세 번째 문화제가 열렸던 2005년에는 행사가 열리는 학생문화관에 걸어두었던 무지개 깃발을 밤사이에 도둑맞았고, 관련 대자보 17장이 모두 갈가리 찢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6가지 색깔의 무지개 깃발은 전 세계에 공통된 동성애자의 자긍심을 뜻하는 상징물로, 행사장에 무지개 깃발을 걸어두는 것은 다양성 존중과 인권 지지의 장으로 공간을 재창조하는 의미가 있다. 결국 사라진 무지개 깃발은 다음날 아침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후 레즈비언 문화제 기간이면 깃발을 지키기 위해 불침번을 서는 것이 ‘변날’의 관례가 되었다.
그럼에도 3년 후인 2008년 문화제에서 또다시 무지개 깃발이 없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무지개 깃발을 가져가는 장면이 CCTV를 통해 찍혀 범인들이 교내 기독교 동아리의 회원임이 밝혀진 것이다. ‘변날’은 깃발의 반환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범인들은 반환은 할 수 없고 깃발 값만을 변상하겠다고 답했다. 이들은 물건을 훔친 것은 잘못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무지개 깃발이 “이화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학생문화관의 전 방향에서 보이도록 걸려 있는 것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며 끝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이후 연일 대자보가 붙는 공방이 벌어졌다. 많은 이화여자대학생들이 학생문화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종교적 헤게모니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 및 정치적 입장을 공적 공간에서 재현할 권리를 지지했다. 이 사건이 오랫동안 되풀이되어왔지만 조금도 시정되지 않은 편견과 폭력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가해자들이 반성이나 사과의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학교 당국의 태도는 기대 밖이었다. ‘변날’에서 가해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을 때, 학교 측은 도리어 ‘변날’ 회원들의 이름, 학과, 학번 등의 신상명단을 함께 내야만 사건 접수가 된다는 답변을 했다. 법원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분을 동일하게 파악하듯이 너희들도 신분을 밝히는 것이 공평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이는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상황을 이용해 아예 신고 자체를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2003년에도 학교는 같은 논리로 ‘변날’이 레즈비언 관련 행사를 열기 위해 강의실을 신청하자 대관을 불허한 적이 있다. “학내 기독교 단체의 레즈비언 활동 반대 행사를 불허했기 때문에 변날 행사를 허락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라는 중립 타령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떤 책임도 느끼지 않고,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애당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 중립이 되었을까.
누구의 공간인가
내친 김에 하나의 사례를 더 살펴보자. 지난 6월, 미국 외교부 내 동성애자모임(GLIFAA)의 주한 미국대사관 지부가 동성애자 인권 행사를 열고 싶다며 퀴어문화축제 기획단에 연락을 해왔다. 자신들은 잘 모르니 활동가들을 좀 모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다 행사 이틀 전에 갑자기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한국에서 동성애자 인권에 관해 논의하는 행사를 공공기관에서 여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여 소마미술관 대관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동성애자를 비시민으로 보는 명백한 차별 행위가 아닐 수 없기에 동성애자 인권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항의했고, 소마미술관 앞에서 동성애자 차별반대 퍼포먼스를 펼치는 등 ‘공적 공간’이 가져야 할 역할의 의미를 묻는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소마미술관에 책임을 넘겼고, 소마미술관은 이런 발언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발뺌을 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고자질하듯 국민체육진흥공단을 탓하던 미국 대사관 주최 측마저 일이 커지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차별 발언을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없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비록 책임을 추궁하는 이도, 책임을 지는 이도 없어졌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소마미술관에서는 동성애자 인권 행사가 열리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동성애자의 상징물이 걸려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던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의 이유와 공공기관에서는 동성애자 인권을 논할 수 없다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논리는 결국 동성애자들이 있어야 할 공간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당시 소마미술관에서 세계적인 팝아티스트이자 동성애자였던 키스 해링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점은 더욱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일견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국의 특정 동성애 문화는 기꺼이 향유하면서도 한국 동성애자들이 일상에서 누려야 할 실질적인 권리는 거부한다. 내 곁에 살고 있는 가까운 동성애자를 부정하는 이 심리적 거리감은 공적 ‘공간’에서 동성애자를 지우고 배제하려는 시도들을 낳는다.
우리는 여기서 두 단계의 차별 전략을 눈치챌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강력한 동성애 혐오와 오랜 인종 차별의 역사를 비교해볼 때, 흑백 인종 차별이 버스와 식당까지 따로 나누게 만들었던 것처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간의 ‘공간 분리’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없다. 왜일까? 그것은 성정체성이 피부 색깔처럼 한눈에 구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동성애자인지를 쉽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성애자 전용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차별 전략은 동성애자라고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드러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이성애 중심적인 공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억압의 절차는 ‘공간 분리’보다 색출을 먼저 시도하고, 이어 퇴출(처벌, 치료나 회개 강요) 감행의 위협을 가하는 순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색출과 퇴출에 오히려 ‘커밍아웃’으로 저항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공간의 독점은 이제 ‘일시적인 공간 할애’라는 겉으로는 다소 유연하고 진일보해 보이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봉합을 거부하라
옛날처럼 게이 바에 앉아 있다고 경찰들이 들이닥쳐 잡아가지는 않는다. 대학 역시 동성애자들에게도 동아리방을 내어주고 있고, 특별히 교내 활동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동성애자들의 거리 행진도 열린다. 하지만 게이 바 밖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그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이성애자로 묻혀버린다. 동아리방 안에서 누리던 자유는 동아리 방 바깥으로 새나가지 못한다. 천여 명이 넘는 동성애자들이 모였던 ‘퀴어의 거리’도 행사를 마치는 순간 뒤돌아보면, 어느새 이성애자들의 평온한 일상의 거리로 둔갑해 있다. 마치 판타지 영화에서 펼쳐지던 4차원 세계가 닫히고 현실 세계가 들어서듯.
질 발렌타인은 공적 공간이 이성애 중심적으로 구축되었음을 드러내고 균열을 일으키는 동성애자의 실천을 ‘가시성의 증가, 공적 공간의 점유, 성적 시민권에 대한 주장, 자신감의 증가’로 설명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간의 할애와 동시에 균열은 재빠르게 다시 봉합된다. 할애된 공간 외에는 접근이 금지되거나 정체성의 표현에 있어서도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묘한 봉합질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거부 역시 필요하다. 이제 낯설지만 바짝 날이 선 질문, 즉 “공적 공간은 과연 누구의 공간인가?”라는 집요한 질문은 제한적으로 공적 영역의 확보만을 허용하면서 관용인 체하는 위선을, 편견과 혐오가 휘두르는 폭력에 눈감으면서 중립인 척하는 허세를 폭로하는 저항이 될 것이다. 아이리스 영의 말대로 공적 공간이 ‘차이’와 조우하는 공간이 되려면, 먼저 ‘차이’ 자체들이 통행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공간 분할이 아니라 공간의 새로운 정체화다. 공간을 할당받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공적 공간의 의미와 역할을 재구성하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 사실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균열을 일으키는 주체는 아닐 수 있지만, 어떤 균열이 일어났을 때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 그 균열을 봉합할 것인지, 그 틈을 더욱 벌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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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이화 변태소녀 테러 사건, 2008.
레즈비언 문화제—무지개 걸개 도난 사건, 변태소녀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사람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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