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상상하시지 못할 동성애 혐오의 논리
2010년 5월 27일자 신문에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라는 지면 광고가 실렸다. 동성애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무너뜨린다는 경고와 함께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다며 시청 거부 운동과 광고 안내기 운동을 시작하자는 내용이었다. 동성애를 비하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신문 기사와 칼럼은 그동안 여러 번 실린 적이 있었지만 광고가 실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9월엔 다시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가 책임져라”라는 타이틀로, 10월엔 “교회가 침묵하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통과됩니다”라는 내용의 광고가 연이어 실렸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군형법에서 ‘계간’을 형사 처벌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두고 마치 군대 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으로 오도하며 “동성애 군대, 내 아들 안 보낸다”로 대응하고 있다. 이런 광고를 내는 주최 단체는 ‘동성애 허용법안 반대 국민연합’이나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연합’, ‘참교육 어머니 전국 모임’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동성애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허용’이란 학교나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훈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교육과 설교를 통해 동성애를 금지하지 않으면 동성애자가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AIDS가 창궐하며, 가뜩이나 바닥인 출산율은 더욱 떨어져 국가 노동력이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죄라고 금한 동성애자 목사가 교회로 들어올 것이고, 위기의식이 높아지며, 심지어는 남한이 동성애로 타락하면 북한에게만 도움이 될 뿐이라고까지 목청을 높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 관계도 맞지 않을뿐더러 논리의 비약도 지나치게 심하다.
예를 들어 그들이 말하는 법이란 2007년도에 정부가 인권 선진국이라는 위상을 갖기 위해 성별, 인종, 나이, 장애 등의 모든 차별을 아울러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제정하려 한 것일 뿐, 이 법의 시행이 동성애를 특별히 권장한다고 할 수는 없다. 법안에 명시된 정확한 차별 금지 사유는 ‘성적 지향’인데, 만약 이를 두고 동성애를 권장한다고 한다면 장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장애를 권장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므로, 이로 인해 동성애가 새삼스레 허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동성애가 나쁘다고 말만 해도 벌금을 물거나 처벌을 받을 것이라며 잔뜩 겁을 주지만, 아쉽게도 정부가 만들려는 차별금지법은 차별 억제의 실효를 위해 있어야 할 시정명령권이나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은 규정조차 없는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법안에 불과할 뿐이다. 위의 단체들이 여당의 국회의원을 비롯한 쟁쟁한 정치인들, 변호사들과 목사님, 교수 등이 지도자로 있는 연합 단체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것을 모르고 광고를 냈다고 보기엔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알고도 그런 것이라면 이 활동의 목표가 국민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해 동성애자를 다 없애버리고 싶어서인 셈이니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 어느 교회에서 했던 강의가 생각난다. 그날 나는 강의 도중 한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만약 신께서 내일 오전 10시에 이 세상의 동성애자들을 모두 없애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내일 10시에 사라질 사람들은 누구일까요?”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신께서 그런 약속을 하신다면 동성애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나는 당연히 없어지고 말 것이다. 또 누가 해당될까? 10년 동안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남몰래 동성의 선배를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사라질까, 아니면 동성 친구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는 조숙한 초등학생이 사라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한때는 동성의 애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싱글이 되어 금욕 생활을 한 지 8년이 넘는 이도 사라져야 할까,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시기까지는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봐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럼 몇 살을 기준으로 잡아야 할까. 이러한 이유로 이 아이들을 없애지 않았는데, 이들이 끝까지 동성을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때 다시 추가로 동성애자를 없애는 작업을 하셔야 할 텐데 그런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모두 없애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동성애자가 될 갓난아기도 가려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 아기의 어미는 신에게 묻고 싶지 않을까? 없애실 거라면 왜 처음부터 동성애자를 만드셨냐고…….
이렇게 내가 마땅히 사라져야 할 동성애자를 골라낼 질문들을 꼼꼼히 이어 내자 가만히 듣고 있던 한 교인이 마침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그건 신도 못하실 일이에요.” 그 말에 나 역시 비로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렇죠. 그런데 신도 하시지 못할 일을, 신도 하시지 않을 일을 왜 인간들이 하려고 이리도 애쓰는 걸까요?”
한국 성적시민권의 시험대, 차별금지법
시민이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국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바깥쪽, 그러니까 비시민/이등 시민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조지 모스는 <내셔널리즘과 섹슈얼리티>에서 국가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통치 전략으로 쓰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나치의 민족주의를 언급한다. 주지하다시피, 나치는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우생학으로 묶어내기 위해 흑인, 유대인, 동성애자 등에 대한 혐오를 활용했다. 특히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는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되어야 할 남성성을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쓰였다. 이것이 독일의 상황이라면 한국은 어떨까. 김동춘 교수는 한국의 시민권 역사를 분석하며 내전을 겪은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반공주의 국가에 대한 충성 여부로 시민과 비시민을 구별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국가보안법을 통해 쉽게 증명된다. 생각의 차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누구든 걸면 걸린다는 국가보안법은 범죄자라는 명목으로 어떤 시민이든 일순간에 그 지위와 자유, 그리고 생명권까지 박탈할 수 있었다. 집행의 정당성은 국가의 안위라는 명분 앞에서 더 이상 질문될 수 없었다. 시민들은 국가 앞에서 주체적 존재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받을 뿐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라는 부추김에 정신이 팔리면 우리는 정작 토론해야 할 ‘시민으로서의 권리’라는 주제를 놓친다. 2007년에 법무부는 차별 금지 사유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라는 일부 보수 기독교와 시민 단체의 반대에 굴복해 ‘성적 지향’ 항목을 없앴다. 학력, 병력(病歷), 언어,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출신 국가 등 다른 여섯 가지 사유도 함께 법안에서 사라졌다. 총 스무 개의 차별 사유 중에 왜 이 일곱 가지만 삭제 대상이 되었을까. 일곱 가지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필요한 권리인 것은 결코 우연이 일치가 아닐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2007년에는 17대 국회회기의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고, 이후 3년째 법무부가 곧 입법 예고를 한다는 소문만 돌고 있다. 언젠가 다시 내놓을 법안에는 과연 삭제되었던 일곱 개 항목이 복원되어 있을까. 이젠 법의 제정 여부보다 법의 논리가 무엇을 배제하고 무엇을 포함시키는지, 우리 사회가 차이와 차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물론 신문 광고를 낸 이들도 “동성애자의 인권은 존중한다”라고 말한다. 다만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과 우리 사회의 상식이 지켜지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의 인권도 소중하므로 동성애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도 필요할 뿐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동성애 혐오가 학습된 결과라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을 앞세워 신의 뜻으로 포장하고 상식을 들먹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심지어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사적인 의견이며 그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논리의 역은 성립하는가. 이성애에 대한 호불호 역시 개인의 몫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를 싫어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설명이 아니고서야 이는 완전히 사적 영역의 일이 될 수 없다.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듣고 배우지 않고도 동성애를 입에 올리거나 머리에 떠올릴 재간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관계 맺어지는 타인에 대한 그 어떤 호불호도 사회적 학습의 과정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혐오를 조장하며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로서 동성애자를 각인시키려는 시도는 다름 아닌 시민권을 박탈하려는 과정이다.
이제 시민들 간의 차이, 우리 안의 차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묻자. 그러나 그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 만들어진 차이인가를 물어야 한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차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 혹은 이성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는 이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만 이성애자는 동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일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동성애자는 비이성애자로서 이등 시민으로 밀려난 것이며,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 맞는 정치적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변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것이라는 주문이다. 애당초 동성애와 이성애가 얼마나 같은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얻어질 평등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과정에서 배제되어온 집단이 시민권을 요구하려면 기존의 제도 안에서 추가되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시민권 자체의 해체와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도전을 할 수밖에 없다. (정상성의 획득이 아니라 정상성의 울타리 자체를 허무는 것이다. 추가의 멤버십을 주거나 허용되는 예외의 자리를 받는 것으로는 정상성을 약화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이다.)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의 성원권과 평등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이성애만이 유일한 정상이 아니라 이성애 역시 인간의 여러 성적 지향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헤게모니를 뺏기지 않으려는 방어와 공격이 있겠지만 그 싸움 이후에는 분명 변화가 들어설 자리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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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조지 모스, <내셔널리즘과 섹슈얼리티: 근대 유럽에서의 고결함과 비정상적 섹슈얼리티>, 서강여성문학연구회 역, 소명출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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