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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7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 (64:8-12) 316/322

 


본문은 [진흙과 토기장이] 라는 제목으로 설정됨직 하지만, 설교자는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우리 아빤 대통령이예요”, “우리 아빤 OO 회사 사장이예요”, “우리 아빤 OO대학교 교수예요하는 자기 아빠(아버지)에의 소개에 비하자면,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하는 자신의 아버지에의 소개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절대진리라는 감추인 보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아버지(father)‘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혈연적 관계에서의 친아버지에서부터, ’가깝거나 먼 조상의 原流‘, ’존경받는 연장자등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입니다.

 

우선 창세기 42:13을 보시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서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열 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니이다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도 하나는 없어졌나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버렸던 형들이 요셉을 중심으로했을 때, (요셉)가 보지 못했던 막내 동생이나 있었다가 없어진 아들(요셉)을 거론하며 한 아버지의 실존을 거론함은, 곧 혈연적 관계의 인정을 공공연히 현재화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4:11의 경우는 祖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이 말 자체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포괄적 개념을 현재화 하고 있는 말이지요.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으로 말미맘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잘 해설해 놓은 것입니다.

 

끝으로, 사무엘상 10:12과 요한일서 2:!3을 보시면, 사울이 왕위를 받기 이전의 해프닝이 있었을 때의 경우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언급된 아비들이라는 용어 등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을 아버지라 지칭하는 경우의 예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작금 청소년들의 경우는 그런 예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설교자의 쳥소년 시절과 청년의 시기에는, 친구의 아버지를 아버지 혹은 아버님이라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경은 그대로 묘사하며 이것이 히브리식 사유의 한 예인 것입니다.

 

이렇듯 광범위한 용례는, 이 단어가 그만큼 히브리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친아버지는 히브리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의 재산 분배에 있어 결정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녀의 생사여탈권까지도 가지고 있었지요(22장 참고). 즉 그는 자녀들을 노예로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역사에 기록되거나 인구에 회자된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세자의 경우는 참 공공연한 역사실록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다양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아버지라는 용어를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적용시켰습니다. 즉 본문에서 보시듯 그들은 거리낌 없이 주는 우리 아버지이시니이다(8)’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 계약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19:5/31:33).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히 거래관계를 의미하는 계약이 아닌, 하나님 일변도의 언약 즉 Covenant로써의 계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이 담긴 계약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부르시사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던 것입니다(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신약에서 우리가 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8:15)’라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언약이라는 계약 때문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을 전제로 하여 새 언약(26:27-28)’을 세워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父子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 주님의 피 흘리신 그 새로운 언약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여기서 계약관계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혈연관계라는 뜻도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계약은 반드시 피흘림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계약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신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하신 말씀을 보시면 살인 죄의 값은 그를 죽이는 것이 합법적인 것을 보게도 됩니다. 최근 어느 나라의 형량에 대해 기사화 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400하고도 수 십 여년의 형량이 구현된 것을 보았습니다. 사형제에 대해 가부를 여러분께 묻는다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테니 이는 차치하고라도,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세월이 신속히 간다고 하였거늘 100년 아니, 200300년을 산다고 치더라도 400여년의 형량을 받은 것이 징계라면, 그 벌을 상상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희생 제물사이를 지나시거나(15:9-17, 34:18-19), 희생 제물의 피를 요구하셨습니다(24:6-8; 9:1-7). 새 언약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흘림을 근거로 세워진 것입니다(31::20).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데에는,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신 예수의 피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런 값도 없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다만 이 분명한 구속 사역을 단지 믿기만 하면 즉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하여 그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헐어진다는 사링릉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리는 복된 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알고 보니 설교자는 블로그 이름 하나도 [복된블로그-1]라고 이름 짓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복, 내게 있는 복음을 확신할 뿐 아니라 확증하며 나아가 더 많은 자들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증거하는 삶! 그것이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하고 교회 공동체로 모여 예배하는 이유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2. 피조 관계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으로 비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성도간이, 창조자와 피조물로서의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분은 친히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시며, 인류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 분(하나님), ‘자기 형상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1:27), 그들(인생)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아버지)과 조화롭게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나의 생명과 삶의 근원으로써의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겸허히 복종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불복하거나, 그 분의 주권적 사역에 의문을 품는 것은 天父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경배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까지 다 外人이요 어둠의 세력의 아들들이었습니다(2:19). 그러나 주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부자 관계를 가로막던 담이 헐리고 우리는 그 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게 회복된 이 관계는 또한 우리에게 신실한 책임이 요구됩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부름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결여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는 를 범할 따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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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2020-05-2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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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21C 목회는 19C 목회일 수 없다! (고후5:17-21) 305/304

 

 

바울의 첫 서신을 받은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배척하도록 선동한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변덕스럽고 거만하며, 외모나 언사가 출중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디도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였으며, 그가 돌아와 고린도교회의 자세가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한 다수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아직 거역하는 소수에 대하여는 자신의 권위를 권고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습니다.

 

크게 나누어 고린도후서는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해명(1-7)’성도들을 위한 모금 활동(8-9)’ 그리고 바울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자기 변호(10-13)’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쓰고 있는 전반부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와 편지(고후 3:2)’로 표현된 성도관이 매우 귀하게 돋보입니다.

 

우리는 聖徒 거룩한 무리로서, ‘하나님의 자녀왕 같은 제사장일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풍겨나는 향기처럼 분출할 사명을 부여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전도란, 바로 그와 같은 실천 방법 중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직접 전도가 되었든 간접전도가 되었든 아니면 국내선교, 해외선교를 무론하고 우리 성도들을 통해 풍겨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되는 일에 우리 스스로는 항상 성결성을 잘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서신입니다. 편지를 보내는 이가 그 자신의 마음과 뜻을 글로적어 보내면, 그 서신은 곧 그 발신자의 마음이자 뜻이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이말하고 행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의 행적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언행심사 하나 하나는 얼마나 조심스러운지요!

 

이러한 우리 성도됨에의 자기 정체성을 전제하며 다시 4장을 보시면,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도는 우리가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고후5:9에서의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 현재화 되기에 비로소 이 고린도후서도, 신약도 구약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귀하고 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화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잠시 오늘의 제목 삼은 世紀論을 잠시 피력하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 오늘의 제목인 21C 목회는 19C 목회일 수 없다!”는 내용을 보셨을 때의 생각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긍정? 부정?

 

그 어떤 것이 되었든, 여러분들의 그 생각은 다 옳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긍정은 분명 우리는 19C가 아닌 21C를 살고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며, 여러분의 부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19C의 복음주의의 도도한 흐름 안에 있는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패턴을 긍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잠시 오늘 우리가 찬양곡으로 택한 305장에 주목 해 주시기 바랍니다.

 

Amazing Grace로 유명한 이 곡은, 많은 분들이 익히 아시고 애송하는 찬송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작사와 작곡의 시기를 한 번 살펴 보십시오. 분명 작사는, 존 뉴튼(1725-1807)1779년에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곡은, 전통 어메리칸 멜로디로써 1900년으로 명기 되어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18C의 가사를 19C의 말에 붙인 곡으로 20C의 큰 반응 하에 이 21C에도 우리는 여전히 귀하고 은혜로운 곡으로 애송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다시 19C를 돌아보십시다. 전언한 바, 19C에는 복음주의 시대였다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 시기는 교회사적 구분과 평에 따른 표현입니다. 그 복음주의 전통을 따른 우리 교단과 교회는 오늘에 이르러도 그 명맥을 잘 전승, 유지, 보존 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작금에 와서는 20CWCC라는 거대한 물결과 파도의 뒤 끝에 우리의 선택과 교회의 재정립이라는 중차대한 선택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만, 이미 이 파고는 한차례 지나가기도 하였지요. 물론 그 파고는 현재에 이르러 더 큰 높이로 우리에게 이미 몰려 와 있습니다.

 

복음주의가 무엇입니까?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 , 성서에 밝혀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입니다. 복음주의(福音主義, 독일어: evangelikalismus, 영어: evangelicalism)는 기독교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의 성향을 지칭하던 용어이며, 우리 교단적으로는 교단 헌법 제2장 제13교리와 신조(信條)’에서 본 교회에서 믿는 교리와 신조는 기독교 개신교파가 공통으로 믿는 복음주의니 이는 신앙의 생명이며 골자이다.” 하는 신앙철학도 정체화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설교자가 언급 드린 16C 부터의 개신교 전통을 복음주의라 하는데 어찌 19C를 복음주의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시는 분이 있을 줄 압니다. 여기에는 잠시 해설이 필요합니다.

 

16C가 종교개혁의 시기였다면, 17C는 미국을 만든 청교도운동이 있었던 세기입니다. 그 흐름 안에서 18C에는 경건주의가 미국교회를 중심으로 흘렀는데, 이 시기에는 제1차 대각성 운동과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C는 미국 내 남북전쟁과 1863년 노예해방이 선포되는 기념비적 사건이 미국 전역을 흔들면서 미국 교단은 분열로 치달았고, 미국 내 이단도 이 시기에 엄청남 기승을 부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Dwight L. Moody, Billy Sunday 등의 부흥운동이 혼란 속 미국교회와 사회를 정화했고, 그 핵심에 절제생활과 지화론 반대 등을 사회 잇슈화 하는 미국 복음주의 운동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상 우리의 교단적 정체성도 이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 하에 오늘에 이르게 되었기 까닭에 오늘의 제목이 논하는 바 19C란 바로 그 맥락으로의 19C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6C의 복음주의도 19C의 복음주의도 사실은 1C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순수 복음주의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대속 그리고 부활하심 등을 골자로 하는 핵심 가치 선상에 있기 때문에 19C 복음주의는 1C의 맥락 하에 있고 그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핵심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19C 복음주의 시대가 있었던 그 이후 20Cdml 세계사를 한 번 생각 해 보십시오. 20C의 세계사에서 교회사 외 일반 세계사로 가장 큰 잇슈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1,2차 세계대전입니다.

 

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WWI 또는 WW1)1914728일부터 191811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입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있는 [동맹국]의 마찰이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에 ,이탈리아, 일본, 미국 등이 참전하여 전투원 900만명 이상이 사망한 전쟁입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Second World War 또는 World War II)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으로 193991()새벽 4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에 의해 생긴 것이지요.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한 독일 외에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1939917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193777일 일본의 중국 침략, 1939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하는데, 전사자 약 2,5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 약 3천만 명이 발생했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이 19453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6일과 9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34만 명을 살상하였고,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1945년 한 해만 世界戰에서 89만 살상. 우리 한반도와 중국, 아시아 등은 수에 계상 않음)

 

이 엄청난 전쟁은 바로 19C 미국 복음주의의 벅찬 활동들을 타고 발전하기 시작한 WCC(세계교회협의회)가 왕성했던 20C의 역사입니다.

 

가만히 보면, 19C미국 복음주의가 순수복음주의로 발전하는 동안, 20C에 진입하며 이미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있었던 유럽에서는 한 편으로 교회연합을 도모하는 일이, 한 편으로는 전쟁을 옹호하는 일이 있었으니, 오늘날 그 피를 부른 유럽 교회들이 피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지지하게 묻겠습니다.

 

그러면 제3차대전은 언제입니까? 그 전쟁은 이러 났으며, 그 결과는요?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만, 위키백과사저은 웹을 기반으로 하여 전 세계 여러 언어로 만들어 나가는 자유 백과사전으로,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는 전자사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용 해 보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만 그 사전은 제3차 세계 대전(第三次世界大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3차 세계 대전(第三次世界大戰)은 제2차 세계 대전(19391945) 이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가상의 세계 대전이다. 1차 세계 대전(1914-1918)의 뒤를 이어, 2차 세계 대전(1939-1945), 냉전시대(19451991)에 개발, 실험, 사용된 핵무기는 일찍이 다음 세계 대전을 널리 추측하게 해준다.”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한반도가 終戰이 아닌 休戰이란 범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부한의 핵무기를 통한 한반도 주변 불안정이 작지 않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면, 이와 같은 세계적 분쟁과 종말론적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상존하다는 점을 여러분은 어느 정도 느끼며 사십니까? 핵무기 하나로 발생되는 인마살상과 각종 피해으 정도는,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섬찟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우리는 평시 이를 무념 속에 태평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일인 셈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향기요 편지인 성도들에게, 그 질그릇과 같은 몸에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는, 크게 한 가지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和睦입니다.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이라는 의미입니다. 18절을 보시면 자기(하나님), 누구와요? . 하나님과 우리(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성도)에게 和睦하게 하는 職分(직무상의 본분, 마땅히 해야 하는 본분)을 주셨다 하였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무엇을 주셨다구요?

 

, 그것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다 하였습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씀 나누자면,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17절에서부터 보았습니다. 17절 말씀은 참으로 유명한 말씀이고 또 많이 암송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번 외워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샀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잘 외우고 계시며 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줄 믿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 주님의 부탁, 우리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가진자들로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한 세상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 해 온 앞선 시대의 복음주의도 중요하고 그 주의의 전통에 입각한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계대전을 일으켜 온 것과 같이, 세계를 두루 살피는 안목 없이 엉뚱한 곳으로부터의 전쟁 등으로 인류가 스스로의 不和로 인하여 공멸하는 일 없도록 하는, 그런 스마트한 복음주의 목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는 진정 성결한 목회, 나아가 우리 차세대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전승될 수 있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돌아보고 살피는 순수 목양 중심의 목회.

 

이것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1C 예수 그리스도의 전통에 입각한 거대한 복음주의의 흐름과 19C 복음주의가 미처 지켜내지 못한 21C 우리 자신의 목회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순한 양 같이 선한 목자같이 성도로서의 이중성을 부정하지 말고 보다 긍정적이고도 능동적인 복음주의 목회를 동역한다는 자세로 이 새 성전 건축의 始點에서 우리 자신을 정체화 하여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한 번 해 주시기 바랍니다.

 

和睦하게 하기 위한 火木 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바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지나간 시대의 복음주을 잘 계승 할 분 아니라, 그 시대를 뛰어 넘어 새 시대를 향해 주신 이 보고와 같은 예배의 현장에서, 새롭게 전개 될 새 소망과 새 희망을 꿈꾸며 화목하게 하는 메신저로, Peacemaker로 온전히 精進하고 나아가 正進하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를 안위하시사 으로 함께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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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1 “사랑하지 말라?” (요일2:12-15) 503/524

 

 

 

요한일서의 핵심은, “하나님은 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전체를 하나의 통으로 읽으면 이것이 자연스레 읽혀지지만, 굳이 그 구절을 밝혀야 한다는 유아기적 요구를 따르자면 우선 15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이시라하면서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하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48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면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에 있습니다만, 우리 속에 미움, 시기, 질투, 정욕, 싸우는 마음, 당짓는 마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염려하는 마음 등이 있어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속상하게 함이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520절을 보세요. “그는(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니라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은 생명인데 하나님은 영생이시다함을 우리에게 明記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이신 하나님께서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것이 곧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백성된 우리는 이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복음을 믿고 영접할 이유가 있는 것이니, 믿는 자는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 믿지 못하는 자들은 믿음을 사모하고 마음 문을 열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겠습니다.

 

빛이요 사랑이요 생명이신 하나님!

 

생각만 해도 희망이 솟고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이 위대하심 앞에 모인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치 않고, 혹여 낙심스러운 상황에서도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랑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려 할 뿐 아니라 생명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 보는 믿음의 부요한 성도 되시기르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방금 여러분은 Amen하셨고, 저는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자하는 히브리서 12:2 말씀을 드렸는 바, “생명의 주요 또한 또한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자하였는 바, 결국 생명은, 그 생명의 原人子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존재 여부에 있다 할 것입니다.

 

최근 사회성의 동향이 애완동물大勢로 가고 있다 합니다. 물론 이는 아직 일반화 되진 않았으나, 사람에게 식상한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정이 가다가, 거기에서도 싫어지면 식물로, 식물도 싫어지면 인형으로 인형마저 지루하면 그 대체물로 로봇을 찾는데, 로봇은 제 마음대로 조종하며 움직이게 하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8/31 오전 KBS1 R. 방송 중). 이러한 로봇도 통제 시스템상 바이러스나 오류 프로그램 등에 의해 한 번 감염되면 예측 불허의 상황이 발생되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그 영혼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빛이요, 사랑이신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산다는 것은 복중의 복인 줄 믿으시고, 이 복된 삶을 증거함이 우리 생의 복된 가치인 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자는 이 빛과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어찌 사랑하지 말라는 주제를 하는 것일까요? 애초 제목을 사랑하지 말라!” 한 것이 아닌, “사랑하지 말라?” 한 것은, 말 그대로 사랑하지 말 것이 있다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면 사랑을 떠올리고, 일반적으로는 사랑하라. 사랑하자. 사랑. 사랑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근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에게 사랑해서는 안될 것, 사랑해서는 안될 일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는 애초에 오늘 설교를 여호수아서를 증거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커뮤니티 중 금주 내용 같이 사랑해서는 안될 일들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과감히 주어진 주제를 택하였고 그 動機, 아직 面對面 해 보진 못하였으나 꾸준히 커뮤니티 활성화로써 메시지를 공유하는 한 커뮤니터의 메일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 메일링 소스 제공과 유튜브를 통한 영상 사역 등으로 활동하며 농사와 기타 일상을 통한 복음전도자 역할을 수행 중인 未知人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내용은 얼마나 중요한 한 주간의 이 되었던지요. 더욱이 전국적으로 태풍 이상의 뉴스가 되고 있는반란이란 용어가 사용된 반란 모의 죄(반란 선동이든 모의든 이는 자유 대한을 전복하려는 초기 단계에 다름 없는 노릇입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한 죄이기도 합니다)’ 관련 소식은, 그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정말이지 사랑해서는 안 될, 아니 사랑하되 공의의 사랑으로 참 사랑이 이 겨레에는 急要되고 있구나 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이 위험하고도 혼란스런 시점에 어찌함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갈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게 된 것입니다.

 

핵심적으로, 그러면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 입니다(52:3 a).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둘째, 거짓입니다(52:3f).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셀라)”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십니다(21:8, 27, 22:15 / 지옥백성)

 

셋째, 異邦女人입니다(16:15).

 

여기서 이방여인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정욕 우선, 애정 우선, 현실만족우선 등을 의미합니다. 삼손을 병들게 했던 들릴라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넷째, 世上享樂입니다(7:18).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밤을 새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며 유흥하는 일들에 우리 젊은이들은 단호히 삼감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러한 류의 사업은 사회적으로도 절제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賂物입니다(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정치계 인사들의 배경에는 드러나지 않은 뇌물 문제가 깊이 부리 내려 있을 것입니다. 크게는 이런 문제들 외에도 작은 뇌물도 삼가는 사회가 Wellbeing State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어그러진 길입니다렘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일곱째, 입니다(딤전3:3, 6:10, 13:5).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3:3)”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돈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기에 이를 정도로 이성을 잃으면, 여기서부터 불행이 시작 됩니다.

 

여덟째, 世上입니다(딤후4:10, 요일2:15).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에 대한 사랑 없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낙심하여 다시 세상으로 나아 가는 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아홉째, 不義의 삯입니다(벧후2:15-16).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거짓 선생들이 발람에 비유되고 있습니다(22:5-24:25). 발람은 선지자였으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재물을 더 좋아하던 중 나귀에 의한 책망을 받습니다. 미친 발람의 수모는 거짓 선생들이 받을 몫이기도 합니다.

 

열째, 異邦神입니다(2:25).

 

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말며 목을 갈하게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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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근본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삶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할 일 이면에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음은, 그것은 근본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일러 주신 것들임을 알아, 세속에 물들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 경성하며 승리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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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가 공유해 주신 이미지는 트라이앵글적 신학 사유를 통한 트리니티를 객관적으로 이야기 할 좋은 소스가 됩니다! ^^ 감사합니다~




20130526 오직 그에게(계1:4-6)” 242/241장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금주는 또한 교단적으로는 1907년 교단창립일이 있는 주간이자 제107년차 교단총회가 있는 주간입니다. 특별히 STU 100주년 기념관이 open 되는 28일 행사는 보다 아름다운 행사가 되도록 위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이면서도 하나’인 기독교 신학의 진수이자 신앙의 고백이며 신비에 속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믿기도 하고, 알고 있기도 하며, 그 신앙을 고백하기도 합니다만, 일상에서 이러한 신앙고백 혹은 신학적 논리가 무슨 상관인가 질문하기도 합니다. 사실, ‘삼위일체주일’이라는 자체도 제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것이 범 국가적인 기념일도 아니며, 모든 성도들에게 관심 있는 주일도 아닌 것이 사실이겠으나, 우리는 오늘의 이 기념일이 갖는 ‘가치’와 ‘의의’에 대해 중요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실체를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셨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확답할 수 있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며 성령의 역사하심이 피상적인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중심에 계시거니와,

‘오늘’ 이곳에 우리가 함께 있음이 이를 증거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하심입니다.

 

세상에 많은 존재가 있지만, 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됨을 가능하게 한 ‘그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도 우연히 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집마다 집 지은이가 있듯이 만물을 지은이는 하나님이시다(히3:4)” 하고 고백도 하거니와, “나는 스스로 있느니라(출3:14)”하신 하나님의 자기존재 현현 사건은 단순히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존재 증명 정도의 의의만이 아니라, 피조물을 향하신 그리고 하나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自存 하심에 대한 확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존하시는 신존재 증명에 대한 피조물에의 기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있습니다. 한 형제는 지혜와 지식이 특출하기도 하지만 형제애가 부족합니다. 한 형제는 다소 덜 지혜롭고 지식도 짧지만 형제애가 강하고 가족애도 넘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예기치 못한 분열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불편한 관계가 부모님께도 알려졌습니다. 서로가 자기는 의로운데 상대가 그르다고 다툽니다. 급기야 그 아버지께 대들 듯이 큰 소리로 얘기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를 낳으신 것 맞긴 맞나요?”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때에 무어라고 답하시겠으며 그 심정은 또한 어떠할까요?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너를 낳았다” 그 한마디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내가, 언제 어디서 누가와 어떤 something이 있었는데 시간적으로 얼마가 지나자 네 어머니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울고 소리 지르더니 얼마 후 네가 태어났다. 네 이름은 ㅇㅇ이며 그 이름의 뜻은 ㅇㅇ이고 그 때의 날씨는 어땠고 기온은 ㅇㅇ였다.” 뭐 이런식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야 할까요?

 

네 물론 현대 문명시대에서 정확한 것을 요구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지닌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답변을 기다릴지 모르나 아버지께서 “넌 내 아들(딸)이야!” “내가 너를 낳았어” 이 한마디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한마디를 못해서, 그 한 마디를 못 들어서, 그 한 마디를 꼭 들어야만 하겠다는 심리, 아버지면 아버지로서 무한 책임을 지라는 공박심, 아버지도 완전치 못하면서 아버지의 기대치를 강요만 한다고 하는 이유 없는 반항심 등 어쩌면 이러한 아버지에의 이질감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父子관계는 전에 없이 서먹해 지는 것은 없는지 한 번 스스로와 주변에 물어보세요.

 

어머니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내가 너를 낳았단다. 넌 내 아들이야” 라는 한마디는 어쩌면 아버지의 그 한마디보다도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것을 숨길 수 있겠어요? 요즘은 자궁착상을 인위적으로 쉽게 하여 인공적 출산이 가능해 진 세상이지만, 어머니의 태로부터 출생한 인간의 출생에 있어 “아니요” 부정할 사람은 우리 중 누구도 없는 줄 알며, 혹여라도 필요에 따라 인간출산을 조절하려는 과학적 현실주의, 생명공학적 합리주의, 바이오 산업의 경제우선주의가, 창조 신앙과 무관히 창조 경제니 창의경제니 하는 시각에서 고정화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참으로 僞된 사람의 신 바벨탑 문화이자 반드시 무너질 ‘한계적 문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과학은 하나님 안에서 겸손히 善用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증명이나 그 존재 증명을 위한 수많은 신학적(특히 조직 신학적) 이론 등은 ‘이미’ 성서와 더불어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떤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소유와 유지’에 대한 더욱 더 간절한 사모함이 각자각자 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 ‘정기적인 예배모임’ 참석, ‘기도회’ 참여 ‘성경 읽기’와 ‘성서연구 프로그램 참여’ 및 ‘성경 필사’ 등 ‘개인의 경건 생활’ 없는 믿음에의 기대는, 가능은 하지만 참 어렵고, 자칫 지나친 주관화 맹목적이고도 이탈 가능한 정통 신앙으로 부터의 괴리로, 이단화, 사이비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와 목회자의 가지를 성도 여러분 자신이 인정하고 긍정하시는 것 아닌가요? 목회자와 신학자 등 설교자를 위해서도 많은 기도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동의하시고 긍정하신다면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긍정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전제 된 믿음’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사유 자체에는 ‘絶對神’, ‘創造主’에 대한 原初的 本能으로써의 믿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행 17 :25)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행17:25)로 고백하고 확증하였다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적 신앙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는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사 44:24)’ 하심으로, 느헤미야를 통해서는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여호와(느9:6)’로 묘사되고 있거니와(느헤미야서에서의 고백은 저자 느헤미야가 아닌 5절의 등장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 사람 예수아, 갓미엘, 바니, 하삽느야, 세레뱌, 호디야, 스바냐, 브다히야 등이었고 이때는 이스라엘 공동체적 회개운동의 시기였습니다), 시편 기자(시119:91, 146:6)나 예레미야(렘10:16)등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3:4)” 함으로써 시원스레 표현하고도 있는 것입니다.


시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시146: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렘10: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결국 이 천지만물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임마누엘 하신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니 이는 하나님의 자기 존재 증명을 ‘肉化된 하나님’으로 친히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 자기희생’에 다름 없는 것입니다(마1:23, 28:20). 생각 해 보세요. 마태에 의해 이 하나님의 언약이 예리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아기 몸으로 탄생, 엄청난 사역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하셨으니, 사실 우리 예수님! 참 피곤하시지 않겠어요? 우리가 무엇이기에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빌 2: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되 피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가 아닌 성령께서 강화 감동 주시는 은혜와 은총을 사모하심으로써 ‘全人的인 믿음’, ‘體驗的인 믿음’, ‘변함없는 믿음’의 성도로서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잘 보존’해 가시기 바랍니다(히2:3).

 

셋째 성령의 존재 하심입니다.

 

방금도 성령의 역사하시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잘 간직하시라 하였습니다만, 성령의 존재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인들의 신내림이나 굿을 통한 강신제 혹은 강신술 같은 주술행위도 아니구요. 이 역시 참 주관적이자 피상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긍정하는 바, 감지할 수 없고, 체득할 수 없는, ‘비체험계의 실존’에 관한 인정은 이미 과학계나 일반 생물계 또는 생체계에서도 사실화 된 줄입니다. 그래서 일반자연 과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자연과학자라도 믿음이 없이 행하다 보면 자칫 교만과 그 순수 과학 기술을 이익의 수단화 삼아 부정부폐에 탐닉하고 경제적 손익에서만 빠져 동포도 겨레도 함부로 생각하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聖靈(the Holy Ghost, the spirit of God. Holy Spirit)은 ‘성령론’을 통해 다루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격체이므로 짧은 시간 내에 이를 다 표현키는 어렵습니다. 그 분의 신적인 속성, 인격성, 사역의 내용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경 및 성도에 대한 사역, 나아가 교회에 대한 사역 등이 그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강림과 성령이 충만함 등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성도 각자의 경건 생활과 더불어 해석이 요구되는 일상이므로 우리는 금일, 그 성령의 명칭들을 다음 구절들을 통해 간략히 읽음으로써 ‘말씀을 읽는 작업’과 함께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하시기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신’ 이라는 표현입니다(창1:2).

둘째, ‘주 여호와의 신’ 이라는 표현입니다(사 61:1).

셋째, ‘아버지의 성령’ 이라는 표현입니다(마10:20).

넷째, ‘은총과 간구하시는 심령’ 이라는 표현입니다(슥12:10).

다섯째, ‘진리의 영’ 이라는 표현입니다(요14:17).

여섯째, ‘성결의 영’ 이라는 표현입니다(롬1:4).

일곱째, ‘생명의 성령’ 이라는 표현입니다(롬8:2).

여덟째,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롬8:9).

아홉째, ‘양자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롬8:15).

열 째, ‘아들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갈4:6).

열 한째, ‘영광의 영’(벧전 4:14).

열 두째, ‘대언의 영’(계19:10).

열 셋째, ‘주의 성신’(시51:11).

열 넷째, ‘보혜사’(요14:16).

 

할렐루야!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셔서 우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믿음의 부여자附與自는 “성령”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드린 신앙고백, 한 성경, 한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증거가 바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심인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 되셔서 하나로 역사하시는 복된 은혜와 섭리를 늘 기억하시면서 여러분 각자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범사에 승리하시는 복된 믿음의 가족으로 날마다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오직 그에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본문 삼고 드린 말씀이 낯설으셨다면, 오늘 증거된 말씀 전체가 오직 그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륻 f예수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이를 우리에게 믿음으로 작용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말씀인 것을 확신하시모, ‘전 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추구하는 우리 모든 복된 심령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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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장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 5月 가정의 달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예배자로 저희를 인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믿음은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요, 사람이 준 것도 아니며, 사람을 통해 받을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놀라운 영적 은혜와 복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믿음의 사람됨’을 다시 한 번 확인 하면서, 이 땅에 육신으로 거한 동안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으며 실천적 삶을 살다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노라.” 칭찬 받는 저희 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우리 속에 거하시사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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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경 전체 버전으로 비교합니다.

 

계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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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1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요15:12)                517/518장

 


 ‘誡命(commandment)’ 이란 우리 성도의 생활규범이며, 우리 기독교는 ‘주권자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으로써의 戒律과 ‘그에 대한 순종’의 관계로 출발합니다. 유교적 개념의

‘順天者興逆天者亡’ 의 논리도 이 양자택일의 명령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이 계명 가운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출 20:2-17)으로써, 이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것으로 시내산 에서 주신 것입니다. 첫 네 계명들은 敎義, 禮拜 등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계명이고, 다음 여섯 계명 들은 人間 사이의 도덕,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요. 이 십계명은 처음에는 석판에 새겨져 법궤(언약궤)에 보존 되었으며, ‘모세의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신약성서에서의 계명은 사랑의 실천인데 구약과 신약의 계명은 그 형식과 수여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같은 것이니 구약의 계명도 본래의 바탕은 ‘사랑 (對神愛對人愛)’이며 신약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량의 표현이 석판의 계명과 그 계명의 준수를 위해 보내신 예언자, 선지자, 사지, 제사장, 왕과 짐승의 피였다면, 신약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그리고 그 위에서 흘리신 피와 땀방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의 표현으로 주신 성서를 통한 가르침과 교훈과 의지적 요청에 성실히 응답하는 실천적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보십시오, 앞서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요5:10)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내(예수그리스도) 계명을 지키면 내(예수그리스도)안에 거하리라(요5:10)”하시면서 “이것을 너희 (우리, 오늘의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름은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5:11)” 하셨습니다. 결국 오늘 당신 속에 기쁨, 평강, 희락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잘 지켜 행하고 있음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계명에의 준행에 다소 게으름이 있다 보아도 큰 물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언한 내용을 잇대어 이 ‘계명’이 곧 ‘사랑’일진대 오늘날 여러분은 “사랑을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직설적이면서도 간접적인 고도의 질문(High Question)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분들께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이제 다시 본문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명 = 서로 사랑하라

The Lord's Commandment = Love one another

 

간단하지만 위와 같은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삼은 요15:12을 중심으로 15장 전체에서 언급하고 계신 이 말씀은, 지금 예수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으로 명명되고 있는 ‘ 마지막 성찬 ’의 자리에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는 제 길로 나갔고, 남은 제자들은 지금 언급하고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님은 “Love are another!" 하고 언급하시면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예수그리스도)게 주신 계명이요, 이것이 내(예수그리스도)가 너희들 (제자들, 오늘의 우리 성도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는 Commandment라” 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 말 ‘계명’은 자주 듣는 용어이기에 그냥 계명, 계명 할 수 있을지 모르나 Commandment 의 직역은 ‘命令’을 의미합니다. 명령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You must do it)’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의 사랑을 실천함은 must doing 이란 것입니다.

 

13-17절을 보세요, 우리가 주님의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립되는 것은 主從의 관계가 아닌 친구, 벗 즉, 우정 관계로의 등급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과의 벗이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등급 올리기’ 라는 것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등급 승급을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근본 나눔인 사랑의 실천으로 神과 우정관계로 승급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다고 神이 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실천하는, 지극히 보편적 사랑 실천은 우리에게 있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살아 가십시다. 할렐루야~

 

특별히 요15:16을 보세요. 이 말씀을 읽노라면 요한복음 5;5에서 보이는 38년된 환자에의 치유사역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38년된 환자는 ‘자력구원 확률’이 거의 없었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5:6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의 이 환자의 답변은 불가능의 긍정이었습니다(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 나이다”

 

바로 그때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하셨고 그 환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요5:9). 38년간의 不動席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치유 사역에서 6절을 주목하게 됩니다. 먼저 5절에 의하면 분명 당시 상황은 38년 고착화 된 환자 앞에 서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자를 향하신 주님의 반응은 그 누운 것을 ‘보셨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를 보고, 그 아픔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부분을 묻는 이 행위는 분명 사랑의 동기이자 실천행위를 위한 기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겠는지요?

당신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시겠는지요?

 

누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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