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21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요15:12)                517/518장

 


 ‘誡命(commandment)’ 이란 우리 성도의 생활규범이며, 우리 기독교는 ‘주권자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으로써의 戒律과 ‘그에 대한 순종’의 관계로 출발합니다. 유교적 개념의

‘順天者興逆天者亡’ 의 논리도 이 양자택일의 명령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이 계명 가운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출 20:2-17)으로써, 이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것으로 시내산 에서 주신 것입니다. 첫 네 계명들은 敎義, 禮拜 등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계명이고, 다음 여섯 계명 들은 人間 사이의 도덕,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요. 이 십계명은 처음에는 석판에 새겨져 법궤(언약궤)에 보존 되었으며, ‘모세의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신약성서에서의 계명은 사랑의 실천인데 구약과 신약의 계명은 그 형식과 수여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같은 것이니 구약의 계명도 본래의 바탕은 ‘사랑 (對神愛對人愛)’이며 신약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량의 표현이 석판의 계명과 그 계명의 준수를 위해 보내신 예언자, 선지자, 사지, 제사장, 왕과 짐승의 피였다면, 신약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그리고 그 위에서 흘리신 피와 땀방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의 표현으로 주신 성서를 통한 가르침과 교훈과 의지적 요청에 성실히 응답하는 실천적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보십시오, 앞서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요5:10)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내(예수그리스도) 계명을 지키면 내(예수그리스도)안에 거하리라(요5:10)”하시면서 “이것을 너희 (우리, 오늘의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름은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5:11)” 하셨습니다. 결국 오늘 당신 속에 기쁨, 평강, 희락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잘 지켜 행하고 있음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계명에의 준행에 다소 게으름이 있다 보아도 큰 물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언한 내용을 잇대어 이 ‘계명’이 곧 ‘사랑’일진대 오늘날 여러분은 “사랑을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직설적이면서도 간접적인 고도의 질문(High Question)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분들께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이제 다시 본문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명 = 서로 사랑하라

The Lord's Commandment = Love one another

 

간단하지만 위와 같은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삼은 요15:12을 중심으로 15장 전체에서 언급하고 계신 이 말씀은, 지금 예수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으로 명명되고 있는 ‘ 마지막 성찬 ’의 자리에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는 제 길로 나갔고, 남은 제자들은 지금 언급하고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님은 “Love are another!" 하고 언급하시면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예수그리스도)게 주신 계명이요, 이것이 내(예수그리스도)가 너희들 (제자들, 오늘의 우리 성도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는 Commandment라” 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 말 ‘계명’은 자주 듣는 용어이기에 그냥 계명, 계명 할 수 있을지 모르나 Commandment 의 직역은 ‘命令’을 의미합니다. 명령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You must do it)’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의 사랑을 실천함은 must doing 이란 것입니다.

 

13-17절을 보세요, 우리가 주님의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립되는 것은 主從의 관계가 아닌 친구, 벗 즉, 우정 관계로의 등급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과의 벗이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등급 올리기’ 라는 것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등급 승급을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근본 나눔인 사랑의 실천으로 神과 우정관계로 승급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다고 神이 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실천하는, 지극히 보편적 사랑 실천은 우리에게 있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살아 가십시다. 할렐루야~

 

특별히 요15:16을 보세요. 이 말씀을 읽노라면 요한복음 5;5에서 보이는 38년된 환자에의 치유사역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38년된 환자는 ‘자력구원 확률’이 거의 없었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5:6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의 이 환자의 답변은 불가능의 긍정이었습니다(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 나이다”

 

바로 그때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하셨고 그 환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요5:9). 38년간의 不動席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치유 사역에서 6절을 주목하게 됩니다. 먼저 5절에 의하면 분명 당시 상황은 38년 고착화 된 환자 앞에 서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자를 향하신 주님의 반응은 그 누운 것을 ‘보셨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를 보고, 그 아픔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부분을 묻는 이 행위는 분명 사랑의 동기이자 실천행위를 위한 기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겠는지요?

당신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시겠는지요?

 

누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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