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7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 (64:8-12) 316/322

 


본문은 [진흙과 토기장이] 라는 제목으로 설정됨직 하지만, 설교자는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우리 아빤 대통령이예요”, “우리 아빤 OO 회사 사장이예요”, “우리 아빤 OO대학교 교수예요하는 자기 아빠(아버지)에의 소개에 비하자면, “우리 아빤 토기장이예요하는 자신의 아버지에의 소개란, 상대적으로 격하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엔, ‘절대진리라는 감추인 보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아버지(father)‘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혈연적 관계에서의 친아버지에서부터, ’가깝거나 먼 조상의 原流‘, ’존경받는 연장자등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입니다.

 

우선 창세기 42:13을 보시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서 하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열 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니이다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도 하나는 없어졌나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버렸던 형들이 요셉을 중심으로했을 때, (요셉)가 보지 못했던 막내 동생이나 있었다가 없어진 아들(요셉)을 거론하며 한 아버지의 실존을 거론함은, 곧 혈연적 관계의 인정을 공공연히 현재화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로마서 4:11의 경우는 祖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지만, 이 말 자체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의미한다는 면에서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포괄적 개념을 현재화 하고 있는 말이지요.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으로 말미맘아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대해 바울 사도는 그 의미를 신학적으로 잘 해설해 놓은 것입니다.

 

끝으로, 사무엘상 10:12과 요한일서 2:!3을 보시면, 사울이 왕위를 받기 이전의 해프닝이 있었을 때의 경우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언급된 아비들이라는 용어 등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을 아버지라 지칭하는 경우의 예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작금 청소년들의 경우는 그런 예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설교자의 쳥소년 시절과 청년의 시기에는, 친구의 아버지를 아버지 혹은 아버님이라 호칭하며 친근감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성경은 그대로 묘사하며 이것이 히브리식 사유의 한 예인 것입니다.

 

이렇듯 광범위한 용례는, 이 단어가 그만큼 히브리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친아버지는 히브리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의 재산 분배에 있어 결정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녀의 생사여탈권까지도 가지고 있었지요(22장 참고). 즉 그는 자녀들을 노예로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역사에 기록되거나 인구에 회자된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세자의 경우는 참 공공연한 역사실록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다양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아버지라는 용어를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적용시켰습니다. 즉 본문에서 보시듯 그들은 거리낌 없이 주는 우리 아버지이시니이다(8)’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 되시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 계약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19:5/31:33).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히 거래관계를 의미하는 계약이 아닌, 하나님 일변도의 언약 즉 Covenant로써의 계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이 담긴 계약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부르시사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던 것입니다(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신약에서 우리가 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8:15)’라 부를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이 언약이라는 계약 때문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을 전제로 하여 새 언약(26:27-28)’을 세워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父子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우리 주님의 피 흘리신 그 새로운 언약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좋은 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여기서 계약관계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혈연관계라는 뜻도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계약은 반드시 피흘림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계약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신실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창세기 9: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하신 말씀을 보시면 살인 죄의 값은 그를 죽이는 것이 합법적인 것을 보게도 됩니다. 최근 어느 나라의 형량에 대해 기사화 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400하고도 수 십 여년의 형량이 구현된 것을 보았습니다. 사형제에 대해 가부를 여러분께 묻는다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테니 이는 차치하고라도,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세월이 신속히 간다고 하였거늘 100년 아니, 200300년을 산다고 치더라도 400여년의 형량을 받은 것이 징계라면, 그 벌을 상상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언약을 맺으실 때, ‘쪼갠 희생 제물사이를 지나시거나(15:9-17, 34:18-19), 희생 제물의 피를 요구하셨습니다(24:6-8; 9:1-7). 새 언약 역시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 흘림을 근거로 세워진 것입니다(31::20).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데에는,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신 예수의 피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런 값도 없이 이유도 조건도 없이, 다만 이 분명한 구속 사역을 단지 믿기만 하면 즉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하여 그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헐어진다는 사링릉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리는 복된 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알고 보니 설교자는 블로그 이름 하나도 [복된블로그-1]라고 이름 짓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복, 내게 있는 복음을 확신할 뿐 아니라 확증하며 나아가 더 많은 자들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증거하는 삶! 그것이 우리 교회가 건축을 하고 교회 공동체로 모여 예배하는 이유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2. 피조 관계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으로 비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성도간이, 창조자와 피조물로서의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분은 친히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시며, 인류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 분(하나님), ‘자기 형상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1:27), 그들(인생)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아버지)과 조화롭게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나의 생명과 삶의 근원으로써의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겸허히 복종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불복하거나, 그 분의 주권적 사역에 의문을 품는 것은 天父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경배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까지 다 外人이요 어둠의 세력의 아들들이었습니다(2:19). 그러나 주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부자 관계를 가로막던 담이 헐리고 우리는 그 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아들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게 회복된 이 관계는 또한 우리에게 신실한 책임이 요구됩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 부름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결여된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는 를 범할 따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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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2020-05-2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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