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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원행. 園幸. 표지에 한자를 표기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당연히 遠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이야 서울에서 수원까지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조선 정조시대에 왕과 왕의 어머니와 수행원들이 그 길을 간다면 족히 2,3일은 걸렸을 터. 죽은 아버지에게 가는 길, 조선을 당쟁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러 가는 길, 그 길이 정조에겐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며, 그 길이 또한 얼마나 위험한 길이었을까.
[원행]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갑을 맞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화성으로 행차했던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한 역사추리소설이다. 정조를 시해하려는 세력, 그에 맞서는 수원성 축조의 절대공신 정약용의 활약. 매력적인 구도다. 설득력있는 설정이고, 흥미로운 인물이다.
소설의 시작은 딴소리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이야기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게 될 장인형, 그의 내연녀인 기생, 그리고 아마도 사건의 열쇠를 갖고 있을 여러 인물들이 숨가쁘게 등장, 음모의 윤곽이 가차없이 드러나며 진행된다. 그러나 정작 '추리소설'이라고 부를만한 미스터리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또다른 세력의 음모에서 비롯된다. 무언가 수원성의 비밀을 감추려한 살인사건.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자, 정약용의 등장은 필연이니, 이 때부터 정약용 대 시해세력의 본격적인 두뇌싸움이 시작된다.
사건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때마다 정약용의 번뜩이는 지혜와 재치로 겨우 수습하여 위기를 넘기고, 정조를 시해하려는 두 세력이 따로 또 같이 시해를 도모하고.. [원행]은 계속해서 뭔가 일어나고 뭔가 수습되기를 반복하는데, 그 뿐이다. 긴박하거나 초조하거나 조마조마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상황 자체는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지만 도대체 몰입되지가 않으니,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글쓴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원행]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약용. 그의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정조를 보호하려는 일념 하에 어떻게든 수습해보겠다며 가상한 노력을 기울이는 자, 그 뿐이다. 이렇다 할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미가 넘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캐릭터를 가진 것도 아니고. 사실 거의 모든 사건은 정약용이 해결했는데도 그의 존재가 이처럼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글쓴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클라이맥스에만 잠깐 등장하는 정조 역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그려졌고, 당체 위기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맥빠지는 클라이맥스와 결말. 아, 이거 정말 실망이다.
아쉽다. 충분히 재미있을 소재라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책장 넘기기가 더 힘들어졌다. 생각해보니 오세영 작가의 베스트셀러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었던 이유가 기억난다. 그래도 [원행]은 한 권짜리라 끝을 보았던 것이로군. 이제 오작가와는 바이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