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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과 영혼의 경계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면 '병원'이라는 곳은 책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좋은 배경일 수 있겠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아슬아슬한 곳, 건강한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료진과 환자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눈물겹고 감동적인, 기쁘고 때로 절절하게 슬픈 장면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도 그 점을 잘 활용했다. 의사와 간호사,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의 이야기에 범인의 이야기를 하나 더 넣었으니 그 점을 십분 활용하고도 남은 작품, [사명과 영혼의 경계].
이른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 애초부터 범인을 감추지 않고 있지만 그 다음 또 그 다음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스릴러이고, 현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여전하다. 아버지의 죽음에 의혹을 가진 딸이 의사가 되어 그 의혹의 대상인 명의 밑에서 수련을 받는 중이고, 모종의 원한을 갖고 있는 범인은 그 원한의 대상인 듯한 병원에 경고장을 보내놓고 계획을 착착 진행 중이다. 사실 이 스릴러만 놓고 보면 별로 스릴있지 않은 이야기다. 일단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드러나있는 상태이고 교묘한 트릭이나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니 본격 스릴러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범인이 왜 그런 범죄를 계획했고, 어떤 과정으로 범죄가 진행 또는 어긋나는지, 또 어떤 식으로 결말지어지는지, 거기에 더 중요한 이야기의 핵심이 있고, 거기에 더 열광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있을 터. 한편 범인 외에 이 소설의 또다른 축이 되고 있는-이 책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고 있는-주인공 수련의의 의혹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더 깊은 의혹의 고리가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그 끝이 궁금해 도저히 중간에 읽기를 그만 둘 수 없도록 만든다.
이 소설의 결말은 정말 착하다. 착한 범인, 착한 의사, 착한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제법 두꺼운 이 책을 통해 '사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의사의 사명, 기업인의 사명, 경찰의 사명, 그리고 인간의 사명, 또 설혹 그 사명들이 서로 상충하여 불의의 결과로 이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명. 주인공 수련의의 아빠가 늘 강조했던 "인간은 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사명이라는 것을 갖고 태어나는 법이다"라는 말은 곧 작가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 그야말로 착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책이 아닐 수 없다. 다소 고리타분한 주제일 수 있지만 작가는 [사명과 영혼의 경계] 속에서 의사와 환자와 범인의 역할과 비중을 어느 하나 처지거나 넘치는 것 없이 잘 분배하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선보임으로서 독서의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았다. 재미있고 의미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