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의 이유
보니 추이 지음, 문희경 옮김 / 김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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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로운 새벽 바닷가에서, 어떤 책임감이나 거창한 장비 없이, 단출한 내 몸뚱이 하나로 바다에 뛰어든다. 나를 받쳐주는 바다 위에서 편안히 몸을 맡기고, 거대한 지구 위를 유영한다.
 잔잔한 바다에 떠서 해변과 도심을 바라보면 더없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꼭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하느냐는 반성과 함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커다란 바다는 나를 더욱 작게 만들지만, 내 안의 세상은 더욱 넓어진다.


  새해를 맞아 1월 첫날에 바다수영을 했다. 작년 같았으면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시간에 차가운 해운대를 찾았다. 바람과 수온은 차지만 일단 물에 들어가면 그런대로 적응이 된다. 힘차게 오리발을 젖는 동호회원을 따라 첫 해가 떠오른 바다로 나갔다. 올 한해도 바다수영으로 건강을 지켜달라는 기원과 함께...
  아쉬운 마음에 저녁에는 인터넷서점에서 수영, 바다수영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봤다. 수영에 얽힌 일상을 기록한 산문집은 몇 권 보였지만 좀더 진지하게 읽을만한 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 책을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10년 가까이 수영을 하다보니 수영일기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수영에 대한, 바다에 대한 조금은 진지한 책을 읽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책이 바로 <수영의 이유>다.


  책은 크게 5부로 나눠 바다에 얽힌 인간의 생명과 건강,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쟁, 그리고 (종교적)이 담겨있다.
  1부에서는 얼음장 같은 아이슬란드 남쪽 바다에서 조난당한 뒤, 6시간 동안 5.6km를 수영해 살아 돌아온 구드라우구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옛날부터 어떻게 물에 적응하고 살아왔는지 보여주면서, 그 극한의 한계를 넘어온 사건을 따라가며 바다에 적응하고 극복해 온 인간의 역사와 강인함에 대해 전해준다. 
  나는 아직 바다에서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지는 않았지만, 바다는 언제나 무섭고 겁난다. 해운대 앞바다와 같이 유명한 관광지를 수영할 때, 수면 아래 거뭇하게 보이는 해초나 테트라포트를 볼 때면 식인 백상이리나 동화 속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겁난다. 바다는 무한한 자원과 재미가 있지만 저 깊은 곳은 여전히 어둡고 두렵다.


  2부에서는 바다가 우리를 얼마나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설명하면서, 겨울바다로 뛰어들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한때 유명한 마라톤 선수였지만 사고를 통해 잃을 뻔했던 다리를 수영을 통해 재활에 성공한 킴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바다는 거대한 존재에 몸을 의지한 채 부유하는 편안함과 함께, 약간의 기술만 있으면 무중력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선사해준다. 체중과 관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고, 깊고 고요한 숨은 몸과 마음은 가볍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적당히 간이 된 바닷물은 일상의 면역력까지 높여준 것 같다. 바다수영을 하고 난 이후부터는 감기에 걸린 적이 없으니 말이다.


  3부에서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수영이라는 운동을 통해 휴식과 안정을 찾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피부색과 문화가 달라도 물에서는 모두 하나가 된다. 물은 모든 이질적인 것을 감싸고 포용할 수 있다.
  바다수영을 할 때면 다른 동호회와 마주치거나 초면의 사람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든다. 수모 색깔이나 영법이 다르더라도 바다라는 평범한 공간에서, 수영이라는 특별한 기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만 가지고도 오래된 친구가 된다.  


  4부에서는 경기라는 측면에서 수영을 이야기한다. 펠프스와 같이 올림픽 수영 영웅부터 마스터즈 수영대회 참가자까지 다양한 동기와 목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이들을 통해 생존과 놀이 이상의 역동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생활이 느슨해지거나, 뭔가 강력한 동기를 유발하기에 대회만 한 것이 있을까. 달리기를 하더라도 마라톤대회를 신청(2002년)하고 난 뒤에는 신발 끈을 묶는 강도가 달라졌고, 오픈워터 수영대회(2014년)가 코 앞일 때는 50m 수영장을 쉼없이 왕복했다. 수영과 싸이클, 달리기를 함께하는 트라이애슬론 대회(2015년)에서는 비록 최하위권으로 완주했지만, 국가대표라도 된 듯이 뿌듯했다.
  "수영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상대는 물이다."(229페이지) 경기는 상대와 승패를 떠나 운동을 좀 더 재미있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5부에서는 수영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몰입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물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수양한다고나 할까….
  한참 수영장을 돌다 보면 시간은 정지되고 생각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 다가온다. 수영한 거리를 센다거나 수영 이후의 일정을 고민하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나는 사라져버리고, 일상을 온갖 스트레스가 수면 아래로 잠겨버린다. 이런 느낌이 몰입이랄까…


  주말이면 바다수영을 한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존이나 건강, 공동체나 경쟁, 몰입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저 세상에 오롯이 떠 있는 느낌이 좋을 뿐이다. 바다에서 보는 도심에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직원으로서의 책임, 친구로서의 도리가 무겁게 따라오지만, 여기서는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모든 것을 맡기면 그만이다. 물에서는 세상의 스트레스를 ‘바다’들이며, 나를 쉬게 한다.
  단, 몸에 힘이 들어가면 가라앉으니 주의하시라! 물에서는 모든 것을 놓고, 그저 릴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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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지구는 없다
타일러 라쉬 지음, 이영란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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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 독서동아리에서 추천받은 책으로 한 손에 잡히는 판형과 간결한 표지, 외국인 저자와 의미심장한 제목 때문에 시집인 줄 알았다. 원래 시를 잘 읽는 편이 아니기에 한 곳에 밀쳐뒀던 책인데, 이번 주로 다가온 토론회를 계기로 부랴부랴 집어 들었다. 시가 난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페이지를 스르륵 넘기니... "이건 산문집이잖아!". 제목에 적힌 '두 번째 지구'는 작가의 '갬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구가 아니라,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현재 진행형의 지구였던 것.

   이렇게 헛다리를 긁으며 책을 펼치자 프롤로그에 적힌 첫 두 문장이 내 눈에 꽂혔다. "나는 버몬트의 숲,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래서 계절의 냄새도 알고, 계절에 따라 비 내릴 때 여향이 다른 것도 알고, 좋은 흙과 안 좋은 흑의 차이를 냄새로 안다."(p6)

   불일암의 법정스님과 월든 호수가의 소로우의 냄새가 가득 느껴져 '타일러 라쉬'라는 생소한 저자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타일러 라쉬, 타일러 라쉬? 오쇼 라즈니쉬 같은 명상가인가?" 그러고는 표지 안쪽 면에 적힌 저자 소개를 보니 시카고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이라는 긴~ 가방끈과 함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에서 훤칠한 외모와 유창한 한국말로 프로그램을 주도하던 그 사람이 책 저자라고? 어제 합석했던 사람이 연예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놀라움과 반가움, 감탄으로 그가 들려주는 지구 이야기를 듣는다. 아니 지구와 환경에 대한 시를 읽는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 ‘모두가 파산을 앞두고 있습니다’에서는 지구의 자정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소비로 점점 ‘채무불이행’으로 치닫고 있는 지구를 걱정한다. “지구가 줄 수 있는 양이 1이라면 매년 1.75를 사용”(p27)하는 우리들의 무분별한 개발과 근시안적인 생활 습관을 이야기하고, 이 과정에서 우리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고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실천적 방법도 제시한다.

   일회용품 사용과 육식을 줄이고, 물건을 아껴 쓰고 분리수거를 잘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보다는 기업의 문화와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환경을 고려한 제품을 이용함으로써 친환경적이지 못한 기업을 도태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이런 이야기들이 과학자의 논리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높이로 설명함으로써, 텔레비전의 교양프로그램을 보듯이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내가 더 관심 있게 읽은 부분은 2부 ‘모든 시작과 끝인 이곳에서'로, 타일러의 성장 환경과 유년 시절의 경험을 조화롭게 써 내려간 점이 인상적이었다. 심한 알레르기와 어머니의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 자연환경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깨달아가고, 버몬트의 자연환경과 환경 중심의 교육환경 속에서 자연의 힘과 소중함을 배워나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생전 처음으로 오로라를 경험했던 순간은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늘 새벽에는 송정 바닷가에서 수영한 후 출근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물이 상당히 맑고 투명했다. 제법 깊은 수심에서도 모랫바닥의 웨이브 무늬가 훤히 들여다보여, 물살을 가르면 마치 사막 위를 비행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순간 나는 바다와 함께 자연이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는 유일하다. 여유가 있는 것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첫 번째 지구에서 나와 우리 가족, 우리의 아이들이 커나가야 한다. 지구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대출한도 안에서 생활해야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다가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아늑한 바다를, 자연을, 지구를 좀 더 오랫동안 즐기고 싶다. 쓰레기가 뒤덮인 오염된 장소가 아닌, 우리 모두가 편하게 즐기고 쉴 수 있는 상생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www.freei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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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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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노보(학명 : Pan paniscus) : 영장목 성성이과에 속하는 유인원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98.7% 일치)를 가졌으며, 학계 일부에선 현존하는 세 영장류(침팬지, 인간, 보노보)의 '원형'과 가장 닮은 꼴로 본다. 침팬지보다 체구가 작지만 공감 능력은 훨씬 뛰어나며, 온순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p6)

 

  콩고에서 밀렵당한 보노보를 못 본체하고 지나쳤던 경험 때문에 진이는 영장류센터 사육사를 그만둘 참이었다. 하지만 한 별장에서 발견된 보노보를 영장류센터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지니'라고 이름 붙인 보노보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녀의 영혼이 바뀌는 영화나 유체이탈을 그린 드라마처럼 다소 엉뚱한 소재라 처음에는 잘 적응되지 않았다. 책 초반에 느꼈던 정유정 특유의 흥미진진한 빠른 전개에 몰입한 감정이 한순간에 몸 밖으로 튕겨버린 것 같아 난감했다. "뭐야, 잘나가던 서스펜스 소설이 왜 갑자기 판타지 소설로 바뀐거지?"

  하지만 보노보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시각이 교차하고,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면서 허구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마치 콩고에서 밀렵되 먼 이국땅으로 밀반출되는 철창 속 유인원이 되기도 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조련사가 되기도 한다. 어린 동생의 탄생을 지켜보는 지니가 되었다가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는 진이가 되기도 한다. 
  특히 진이의 귀환(?)을 돕는 민주라는 인물이 소설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었다.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집에서까지 쫓겨나 노숙생활을 하던 그는 진이를 도우며 삶의 목적을 찾아 나간다.

 

  <진이, 지니>는 인간과 동물, 판타지와 코미디, 치열함과 느슨함이 교차하면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완급을 조절한다. 힘껏 전력 질주한 다음에 느린 걸음으로 숨을 고르듯, 리드미컬한 강약조절로 독자를 이끈다. 그래서 기어이 다음 회차까지 보게 만드는 주간드라마나 시리즈 영화처럼 맛깔스럽다. 아마 책을 영화로 만들어져도 충분한 재미를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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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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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방학이 시작할 즈음,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와 함께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에어컨을 켜도 그때뿐이고,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둔 창에서도 열대지방 같은 뜨거움이 밀려온다. 무덥게 늘어지는 일상에 나는 물론이고 아내와 아이들까지 처져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짜증을 부리는 아이들을 보다 못한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여름방학 때 읽어야 할 책을 빌리자며 인근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는 최근 들여온 책과 함께 올 초에 아내가 신청한 책들이 들어와 있었다. 거기다 아이들 학교에서 지정한 권장도서와 논술학원에서 숙제로 나온 책, 그리고 내가 고른 책까지 합하니 족히 삼 십여 권은 넘는 것 같았다. 이번 여름방학을 함께할 책을 낑낑거리며 빌려와서는 한 권씩 페이지를 넘기려고 한다.


  내가 처음 고른 책은 천명관 님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로, 제목의 느낌만으로도 거침이 없고 시원하게 다가왔다. 특히, '천명관'이라는 이름 속에는 언제나 기발함과 재미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망설임 없이 펼쳤다.

  책은 연안파 두목인 양사장을 중심으로 그 부하들과 주변의 조직들 간의 이권 다툼을 좌충우돌 그리고 있다. 돈만 된다면 사기나 절도는 물론이고 감금과 협박, 폭력과 살인 등 가리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액수의 다이아몬드가 증발한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속셈으로 다이아의 행방을 찾아나서고, 결국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깡패의 이야기다보니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면서, 무식하고 예의가 없다. 하지만 소설의 리얼리즘이나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 등 심각한 고민은 접어두고, 한편의 코미디나 액션활극을 본다고 생각하면 심심하지 않게 읽힌다.

  하지만 대하역사극 뺨치는 수의 등장인물들, 아니 조폭들 간에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사건으로 인해 조금 산만한 감도 있었다. 여러 사건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데다 인물들이 작대기, 장다리, 뜨근이, 울트라와 같이 별명으로 불리다 보니 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책 중반 이후에는 깡패 족보까지 그려가며 읽었다.  


  보통 삼사일을 지나야 소설책 한 권을 읽는데,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만 하루 만에 뚝딱 읽어버렸다. 스마트폰을 달고 사는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식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빠른 사건 전개와 간간이 섞여 있는 코미디가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를 읽도록 재촉했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은, 코로나19 확산 방지와 무더위를 시켜줄 피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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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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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을 한 시간이나 뒤졌다. 이렇게 아내가 말한 책을 찾다가 '성석제'라는 작가 이름과 인간적인, 너무 서민적인 책 이름(<이 인간이 정말>)이 끌렸다.

 

<론도>

'론도'는 음악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순환되는 형식을 일컫는다. 그는 사소한 자동차 접촉사고를 낸 후에 알게 된 자동차보험의 틈새를 통해 소소한 이득을 챙기게 되는데... <론도>에서는 보험을 둘러싼 순환고리 속에서 결국 자동차 수리업자만 배를 채운다.

돌고 도는 세상의 단면을 보게 된다. 서로의 꼬리를 쫓는 두 마리의 뱀처럼, 눈 앞의 상황만 몰두하며 자신이 '갑'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을'이 되어버린 웃지 못할 현실.

<남방>

라오스에서 만난 꽃무늬 남방을 입은 '박'은 어떤 면에서는 조르바를 연상케 한다. 거침이 없고 떠들썩하지만, 세상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향수가 묻어난다.

습습하지만 따뜻한 라오스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단편으로 한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것 같다. '박'의 여정을 따라 라오스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찬미>

어릴 적 흠모했던 여인을 기다린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몇 번의 스침만으로 우리를 중독되게 만들었던 소녀. 무성한 화제만큼이나 화려한 추문과 소문을 달고 다녔던 그녀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두근두근두근 설레임으로 찾아간 미술관에서 만난 그녀 옆에는 이미 다른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르누아르의 <시골무도회> 속 미녀를 눈앞에서 보는 듯...

아련한 기억 속의 풋사랑과 설레임이 르누아르의 그림과 함께 잔잔하게 다가온다. 가시덤불 속에 핀 고혹적인 장미라 눈으로밖에 볼 수 없지만, 그 존재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설레던가.

<이 인간이 정말>

"처음 데이트하는 자리에서 기후 변화나 온실가스, 화석연료 고갈에 대해 열나게 이야기하는 남자"에 대해 여자는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며 응수한다.

한 남자의 오지랖은 사회 전체의 육갑으로, 우리 인간의 만용으로 다가온다. "지구의 인간들이 증말~"

<유희>

임진왜란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유희를 통해 왜란 당시의 무능했던 조정과 관리를 비판한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전시를 더욱 해괴하게 만들어버렸던 일부 관리의 만행은 유희를 넘어선 비극적인 코미디에 가깝다.

<외투>

아버지의 유품인 외투 덕분에 교통사고를 모면하게 된다. 온몸을 감싸며 전해지는 부모님의 온기가 빠듯하다. 낡고 허름하다는 외형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가치...

<홀린 영혼>

주선은 화려한 말빨과 과장된 행동으로 주변의 관심을 끌고 있다. 뭔가에 홀린 듯...

누구에게나 이런 친구가 한 명쯤은 떠오르지 않을까. 거창하고 요란하지만, 왠지 가벼워 보이는, 가벼운 충돌에도 '텅~' 하면서 빈속을 들켜버릴 것 같은 친구. 하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 또한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해설자>

"아주 간단한 사실을 과장과 허세, 근거 없는 찬양으로 오리무중의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해설자에게는 진실해야 하는 역사마저도 개인적 도구일 뿐이다.

이번 여덟 편의 단편은 심각하거나 모호하지 않고 명쾌하다. 나와 이웃의 일상이나 기억을 통해 가족이나 사회,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읽기 편하고 쉽게 와닿는다.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간이 남을 때면 언제나 폰을 들고 있다. 멍하게 들여다보는 액정화면은 짧은 웃음은 줄지 몰라도 긴 여운을 주지는 못한다. "그만 봐야지", "이제 꺼야지" 하는 스마트한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이럴 때 딱 좋은 선택이 바로 '성석제' 표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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