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흐름 속에 죽음이 있다 [블루베일의 시간]

나는 아직 무한한 생명력을 뽐내며 아침에 눈을 뜬다.
몸이 찌뿌듯하니 운동도 하고 배가 고프니 밥도 먹는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해주고 맛있는 간식도 챙겨준다.
내 숨이 언제 사그러들지 모르지만 지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숨쉬고 있고 즐거이 이 순간을 만끽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도
나름대로 즐겨 보려고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만 늘상 하던 대로 책을 집어든다는 것이 ...[블루베일의 시간]이란 책에 손길이
닿아버렸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은 안된다고 했던가.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이별공식] 가사 중.
비가 오는 날에는 [블루베일의 시간]을 읽으면 안된다.
비가 내 얼굴 위에 흘러내려 온통 축축하게 젖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바리의원은 한국 최초, 동양 최초 호스피스 시설이다. '블루베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마리아의 작은자매회에서 세운 갈바리의원의
100일을 기록한 다큐가 책으로 씌여졌다.
그저 덤덤히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녁밥상을 차리기 위해 압력밥솥에 밥을 안치고 뜸을 들이는 동안 단 10분 동안 몇 페이지 읽어나갔을 뿐인데...어렵쇼...
눈물이 금세 핑 돌더니 방울방울 무게감 있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건 머리에서 심장까지 거쳐 돌아나오는 눈물이기에 쉽사리 멈취지지가 않는다.
세상 끝에 서서 이별을 나누는 이들의 사연으로 채워진 첫 장은 내 이야기가 아닌데도 엄청나게 가슴이 뻐근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내 어머니, 내 아버지 나이대의 분들이시라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을 수 있다.
구구절절 사연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임종 직전에 가족들이 모여들어 각각 한마디씩 가슴속 이야기들을 토해내곤 하는데...
내가 경험했던 단 한 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사르르 피어올랐다.
갓 결혼한 새내기 며느리였던 나를 "아가"라 살갑게 불러주시며 당신의 딸자식보다 귀하게 여겨주셨던 시아버지.
결혼할 당시 간암인 것을 알고 있었고 시한부라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시아버지의 죽음은 황망했다. 임종을 지킨 분은 시어머니 단 한
분이었고, 장례식장에서 차디찬 주검으로밖에 만나 볼 수 없었지만 생전의 기억이 장례식 내내 마음 언저리를 빙빙 돌아서 눈물에 밥을 말아
먹었더랬다.
무뚝뚝한 성정이어서 살가운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지만 한 사람의 "부재"라는 것이 얼마나 큰 공허함을 남기는지 그 때 확실히
깨달았다.
아직 살아 계신 부모님들은 돌아가실 때까지 후회 남지 않도록 잘 모셔야지 했지만 그게 또...살다보니 결심이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건
아니더라.
현재의 내 불효가 퍼뜩 깨달아지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가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오더라.
생의 마지막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치기로 결심한 이들은 병원에서 의식도 없는 채 부지불식간에 "삐---" 하는 무기질의 경고음이 알리는
임종을 원치 않았기에 그곳을 택한 것이 아닌가.

평화로운 임종, 아름다운 임종.
그 순간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 터이다.
100일간의 호스피스 병동 관찰 일지에는 다양한 삶들의 마지막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지금부터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 뿐이다.
삶을 바꾸면 임종의 순간도 바뀔 터.
내가 지켜볼 임종의 순간. 내가 맞이할 임종의 순간.
그 두 가지는 되도록이면 오랜 후에 찾아왔으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어머님께 좋은 말씀 해드리세요. 버티요, 힘내시란 말보다는 편안하게 가시란 말씀 해드리세요.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계속 말씀드리세요.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억지로 드리세 하지 마시고요.(...)
딸은 빈껍데기처럼 허적허적 병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병실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지금 올 수 있어'''?"
울먹이는 목소리, 서성이는 발소리, 순녀 할머니의 가쁜 숨소리가 밤을 채웠다.-49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누군가의 임종의 순간에 내 곁에 불러들일 누군가가 꼭 있었으면 좋겠고,
나의 임종 순간에는 더더욱, 나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임종을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가 먼저 갈게. 다음에 오면 내가 마중 나갈게.' 이런 마음으로 간다면 참 좋겠어요. 인생을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217
아직까지 내게 찾아올 밝은 아침이 무한히 남아 있을 것만 같은데, 나는 비오는 날 처량맞게도 [블루베일의 시간]을 읽고서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우울하고 권태롭게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삶의 흐름 속에 죽음이 있다, 고 생각한다.
멋지게, 아름답게 임종할 수 있게 지금 마음에 굳은 살 하나를 박아 놓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