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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 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3
미우라 시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평점 :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마사&겐]

구니마사의 마음속을 이번에도 들여다본 것처럼 겐지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매사 '건실'하게만 살 수가 있냐? 그런 거 어차피 불가능해. 도착점도 정답도 없으니까 좋은 거잖아."
"그럴까?"
"그렇대도."
겐지로는 바람에 너울거리는 천 자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사는 거잖아,"
그래, 그런지도 모른다. 구니마사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연분홍빛 천 자락.-250
왠지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들의 대화 내용 같지 않은가?
침묵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
하루 이틀 손발이 척척 맞은 사이가 아님이 짐작된다.
구니마사와 겐지로는 몇 살일까?
죽마고우이자 동갑인 둘의 나이를 합치면 146세이다.
그 나이쯤 되었으면 삶의 풍파를 겪을 만큼 겪어서 지극히 온화해져야 마땅할 텐데,
둘은 어찌된 일인지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이고 대화하는 것마다 말씨름이 된다.
이야기의 첫장면부터가 사실 말이 안 되긴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떨까, 몇 장 조심스레 들춰보아도 쉽게 알 수 없는 분위기의 책이 있는가 하면, 이 책처럼 처음부터 대놓고
유머러스하거나 너무 유쾌해서 눈물 찔끔하게 하는 책도 있다.
아는 지인의 영결식장에 대머리 겐지로가 얼마 남지 않은 엔젤의 테두리같은 부분을 빨갛게 염색하고 나타나는 장면...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엄숙한 가운데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아이쿠 저런, 하며 쓴웃음이 잔물결처럼 퍼져 나가는데 '로맨스 그레이'의 대명사격인 친구 구니마사는
가능한 한 겐지로를 외면한다.^^
나라도 그러고 싶을 것 같다...
두 강 사이에 삼각주처럼 들어앉아 있는 Y 동네는 크고 작은 운하가 동네 구석구석을 흐르며 두 하천을 연결하고 있다. 겐지로는 강 주변의
도매상에 물건을 납품하는 직인이라 배를 가지고 수로를 오간다.
느긋한 동네와 잘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여하간, 한동네에서 자란 두 사람은 생활도 사고방식도 정반대이다.
대학을 나와 은행에 들어간 구니마사는 열심히 일했고, 부모가 주선한 맞선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 딸이 둘 있다.
겐지로는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쓰마미 세공 직인의 제자로 들어가, 지금은 어엿한 장인이 되었고 제자 하나를 키우며 기분 내킬 때만
소나기처럼 일을 한다.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떴고, 아이는 없다.
(쓰마미 세공이란 '하부타에'를 작은 정방형으로 잘라 핀셋으로 꽃, 새, 물고기 등을 접어내는 도쿄 도 지정 전통공예의 하나로 기모노에
어울리는 머리 장식인 '간자시'에 쓰이는 기법이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시치고산 때 헝겊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을 머리에 꽂곤 하는데 바로 그
장식이 쓰마미 간자시이다. )
구니마사와 겐지로는 말하자면 칠십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죽마고우라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라고나 할까. 싸우고 싶을 때는
싸우고, 얼굴이 보고 싶으면 찾아간다. 아내가 딸네 집으로 가서 사위와 함께 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홀아비 신세가 된 구니마사는 뭐든지
즐거워만 뵈는 겐지로의 나날이 부럽고 질투난다. 새벽녘 젖은 방바닥을 닦으려다 허리를 다친 구니마사가 이젠 죽는건가, 했을 때 겐지로가 달려와
주었다. 기세 좋게 현관문을 깨고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겐지로.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어서."라며 멋쩍게 머리를 긁는 장면이 찡하게 다가온다.
구니마사와 겐지로는 그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인가 보다.
집을 치우고, 장을 봐서 밥을 차려주는 겐지로를 보고 구니마사는 혼자 마음속으로 겐지로보다는 오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자식도 없는 겐지로를 혼자 남기고 떠나는 짓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 정말 웃프다고밖에 할 수 없다.
겐지로의 하나 뿐인 제자 뎃페는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마미와 곧 결혼할 예정인데 일본 전통 결혼의 풍습 상, 중매인을 내세워야 해서
구니마사 부부에게 부탁하기로 한다.
어쩌나, 구니마사 부부는 지금 별거 중인데...
가뜩이나 마미의 아버지는 뎃페가 연하에다 세공 직인의 제자일 뿐이라며 맘에 들어하지 않는데, 둘의 결혼은 무사히 치러질 수 있을까?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했다고는 해도 어찌 좋은 시절의 기억만을 품고서 진짜 친구가 되겠는가? 둘은 도쿄 대공습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겪고
서로가 살아남은 기쁨, 혹은 쓰린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서로의 안위를 확인한 순간, 달려와 손을 맞잡고 얼굴 가득 빛나는 웃음을 지었던
친구가 아닌가. 살아 있었구나!를 부르짖으며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키던 친구가 아닌가.
때론 서로의 아픔을 헤집어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무언 중에 그 행동을 반성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 다른 이는 또 찰떡같이 알아듣고
너그러이 용서하면서 화해를 이룬다.
아기가 말을 배우는 것은 곧 세상을 배우는 것이며, 세상을 배우는 것은 말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둘이 합쳐 146세쯤 되는 나이가 되고 보면 말이란 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고, 전화를 굳이 하지 않아도 텔레파시가 통하는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마사와 겐처럼 평소에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다를 떨거나, 마음을 빼앗긴 여인과의 도피를 계획한 친구를 도와주거나, 마음이 떠난
아내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거나 하는 등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사이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여간 넌 다리랑 허리가 너무 약해, 나라면 이깟 것쯤 양손에 들고도 가뿐히 건너뛰겠다."
"알았다, 알았어. 너도 돌발성 요통이란 것에 한번 당해봐라. 그러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거다,"-271
만담 콤비같은 두 사람은 끝까지 티격태격이다.
연인 사이에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 할배 콤비.
오래도록 그 우정, 나누면서 행복한 모습을 과시했으면 좋겠다.
나는, 요런 귀여운 하모니를 나와 남편 사이에 적용해 보려고 한다.
먼 훗날, 마사와 겐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아이들이 나와 내 남편을 보면서
꼭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