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그저 달릴 뿐. [걸 온 더 트레인]
2013년 7월 5일
레이첼의 나레이션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이첼은 아침이면 기차에 몸을 싣고 런던으로 갔다가 저녁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한다.
기차의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레일 위로 카메라를 움직여 찍은 영화장면처럼 휙휙 지나가는 집들을 구경한다. D칸에 앚아 있을 때는 거의
항상 기찻길 옆 집, 15호를 보게 된다. 기찻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은 모두 비슷한 빅토리아 왕조풍의 2층짜리 연립주택들이다. 주말을 제외하곤
매일 지나치는 그 집들 중 15호에 사는 제스와 제이슨은 웬일인지 그녀의 주의를 잡아끄는 부부이다. 사실, 그녀가 부부의 이름을 직접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기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테라스에 나와 있는 그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기를 좋아한다. 그녀가 보기에 남자는 검은
머리에 체격이 좋고 강인하며 자기 여자를 잘 지켜주고 상냥한 남자이며, 여자는 작은 새 같은 여자로, 짧게 자른 금발에 피부가 하얀 미인이다.
제스와 제이슨은 레이첼이 임의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레이첼은 15호 집에 사는 여자, 자신이 제스라 이름붙인 여자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진한 키스나누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장면을 본 레이첼은 진한 배신감을 느낀다. 아마도 자신의 전남편인 톰이 불륜을 저질러 자신과 이혼하고 불륜의 대상이었던 애나와 결혼해
아이를 낳은 것까지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리라.
멋대로 화목하고 아름다우리라 상상했던 15호 집에 균열이 보이자 레이첼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술에 의지하곤 하던 레이첼은 정도가 좀 심한 것으로 보인다. 알코올 중독이다.
진 토닉을 홀짝이기만 하는 것으로 온몸에 개미떼가 달라붙다고 생각하고 털어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친구네 집에서 하숙하는 처지이지만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 피해를 줄 정도가 되자 집에서 나가달라는 부탁을 받기에 이르는데...
도서관 인터넷에서 완벽한 금발의 그녀, 제스가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는 레이첼.
전날 그녀 자신은 뺨 안쪽을 깨물던 것처럼 입 안이 아프고, 혀에 금속성의 싸한 피 맛이 남아 있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띵하고...머리 오른쪽에 아프고 따가운 혹이 하나 생겼다. 머리카락은 피에 엉겨붙어 있었다.
어딘가에선 넘어진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기억이 사라진 그 부분에 검은 공포가 자리하고 있었다.
겁이 나는데 뭐가 무서운 건지 확실히 알 수가 없고, 그래서 더 무섭다.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기나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64
이제 레이첼은 15호 집에 살고 있는 금발의 완벽한 그녀의 이름이 제스가 아니라 메건이며, 그녀의 남편 또한 제이슨이 아니라 스콧이라는 걸
안다.
자신이 23호 집에서 톰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없던 이웃이지만, 지금은 톰과 애나가 여전히 차지하고 있는 23호 집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메건이 실종되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레이첼은 기차에서 보았던 낯선 남성이 메건의 실종과 연관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경찰에 알리고, 그리고 메건의 남편 스콧에게도 알려야 한다...
하지만 경찰은 레이첼이 이혼녀이며 이혼한 후에도 톰의 집에 자주 찾아가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알코올 중독자의
말이라며 신빙성이 없다고 일축한다.
메건이 숲 속에 매장되어 있던 것이 세찬 폭우로 드러나게 되고, 경찰은 레이첼이 제보한 남자, 즉 메건의 심리 상담사를 용의자로 잡았지만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메건의 남편 스콧은 그 덕분에 더더욱 용의자로 몰리게 된다.
이대로 레이첼은 사건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것인가.
기차에서 보았던 한 장면만으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행동했지만 결국은, 알코올 중독자의
헛소리로 치부되고 마는 것인가.
[걸 온 더 트레인]이란 제목에서 '걸'은 좀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 아니었나 했다. 알코올 중독자에 이혼녀이며 게다가 실업자이기도 한
레이첼이 '걸'이라 표현된 것에 의아했지만, 과거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술이 주는 망각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녀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데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메건의 실종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레이첼의 기억 속에서 뭔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레이첼은 그것을 확실히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5호 집과 23호 집의 멀지 않은 거리만큼이나, 이 책의 주요 나레이터인 레이첼, 메건, 그리고 전남편 톰의 현재 부인
애나는 알고 보면 비슷한 처지임이 드러난다.
레이첼이 매일 아침 저녁 몸을 실은 기차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딘가로 그녀를 태우고 간다.
레이첼이 좀 더 강한 정신력을 지녔더라면...
아버지로부터의 상처와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남자에게 기대는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텐데.
어쩌나...
이 책에 나오는 세 여인은 모두 어둡고 우울한 모습이다.
희극보다는 비극에 재능이 있다는 작가의 말대로, 작가가 창조한 소설 속 이야기는 폭력적이고 거칠다.
피가 튀고 싸움이 난무하는 폭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여성들이 좀 더 힘있고 강력한 존재인 남성에 의해 다루어지는 스토리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이는 가정일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만큼의 평화가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나지 않는다...블랙홀처럼 뻥 뚫려 있다. 뭔가 죄책감이 든다.
레이첼의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차처럼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알게 된다.
늪에 빠지는 듯한 기분으로 읽게 되고 어떤 결말이 날지 점점 궁금해 미칠 때쯤, 레이첼은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러 가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번에는 제발~ 자신의 의지를 한 움큼 꽉 움켜쥐고 기차에 오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