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캉하지만 단단한 여섯 개의 단편 모음[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작가정신 #구라치 준 #두부 모서리 #단편 #추리소설
작가정신에서 나온 이 단편집은 우선 제목에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 일이 정말 있을 수 있나?
실소를 머금으며 제목을 보고 난 뒤에는 호기심과 함께 해답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아 오른다.
범인은 누구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나?
열심히 읽기는 하지만 제대로 범인을 찾은 적은 거의 없는 나이기에 추리소설은 언제나 신선한 법. ^^
어쨌든 누구나 호승심을 가지고 덤벼들 법한 이 단편집은 나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 주었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무엇을 먼저 읽을까? 목차를 훑었는데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다섯 번째에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표제작이 어디에 있든 호기심을 꾹꾹 눌러가며 순서대로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을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가장 먼저 펼쳐 보게 되었다.
단편 하나만으로도 꽉 차 오르는 만족감!
구라치 준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어떤 선입견도 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유머러스와 준엄함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사건이 일어났다.
발자국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새하얀 설원 위에 자리한 연구실. 밀실이라 할 수 있는 그 곳에서 한밤중에 이등병 하나가 죽었다.
그는 전날 밤 연구실의 박사로부터 게으르다는 말을 들었고 박사가 한 말 중에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어버려라.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 같으니."라는 대사도 있었다.
시체는 앞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두부가 흩어져 있었다. 시체의 후두부에는 사각 물체의 모서리로 구타한 상처가 있었다.
최소한의 단서가 던져진 다음, 등장인물들이 하나 둘씩 나타난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배경이 다소 생뚱맞고 어색하지만 그렇기에 수상한 연구-공간을 뒤집는다-가 묘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미치광이 같은
박사의 열띤 논리에 훅 빠져들어서 과연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곧 냉정한 판단력의 이등병이 나타나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
웬일인지 이 작품의 여운을 길게 가져가고 싶어서 다음 단편을 읽을 때까지 시간을 좀 두었다.
한 번에 훅 읽어버리기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두 번째 단편을 신중하게 고르려고 했는데, 묘한 안배로 음식명을 제목에 넣은 두 번째 작품이 바로 눈에 띄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이번에는 파티셰가 되기 위해 전문 학교를 다니고 있던 젊은 여성의 시신이다. 다만 기괴한 것은 시신의 입에 파가 길다랗게 꽂혀 있었다는
점이다. 머리 위에는 세 개의 케이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신원을 파악하자 곧 용의자가 특정되었다. 그녀를 한참을 따라다녔다는 스토커. 그렇다면
왜 그랬는지가 관건이 되는데 그 왜?를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자못 흥미롭다.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해 버린 스토커의 마음 속을
읽는 것이 어디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쉬운 일일까.
짧은 분량이었지만 임팩트 있는 단편이다.
다음으로는 남아 있는 네 편의 단편을 순서대로 주욱 읽어버렸다.
<ABC살인>, <사내 편애>, <밤을 보는 고양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ABC살인>에는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살인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온다. 하지만 정말 이유 없는 살인이 있을까? 도박빚에
유산을 탕진한 그는 동생을 죽여 돈을 얻고자 한다. 때마침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조금의 우연만 덧붙인다면
<ABC살인>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후에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원래 목표인 동생을 아무런 흔적 없이, 의심받지 않고
없앨 수 있을 것 같은데...
죽이고 싶다, 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통해 우리의 등에 붙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를 형상화해낸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방범, 편승범 덕분에 정작 원하는 살인을 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남자를 향한 조롱을 보낸다. 거 봐, 그러다 너만 힘들잖아...힘
잔뜩 주고 읽는 와중에 가벼운 펀치 한 방 날리면서 스르륵 힘을 풀게 만든다.
<사내 편애>는 좀 결을 달리 하는 으스스한 이야기다.
미래에 올 지도 모르는 사회?
마더컴이 회사를 지배하며 사원들의 모든 것을 관리한다는 설정이다. 승진, 연봉 인상, 전근, 자리 재배치, 영전, 배속, 인사이동, 입사
시험 등을 체계적으로 행하는 종합식 기업인사 관리운용 총괄시스템.
여기에 아주 약간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었더니 예외가 생겨버렸다. 마더컴이 한 사원을 노골적으로 편애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마더컴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 스트레스도 함께 받는다. 결국 회사를 사직하고 이직을 결심한 그는 다른 회사 면접을 가게 되었는데, 그 회사의
마더컴은 그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완전히 빵 터지는 결말을 던져 주며 블랙 코미디의 여운을 진하게 남긴다.
그 외 <밤을 보는 고양이>,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에는 고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펼쳐볼지도 모르겠다.
구라치 준의 데뷔작이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라고 하니 전작을 읽은 사람은 네코마루 선배가 익숙할 것 같다.
두부라는 소재 덕분에 말랑말랑하면서 유머러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추리소설의 단단함도 보았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작가라는 평이 이해가 된다.
작가정신 출판사가 픽한 추리소설 작가로 "가와이 간지"를 관심 있게 보았는데, 앞으로는 구라치 준에게도 눈길을 돌려 볼까 한다.
유즈키 유코의 <고독한 늑대의 피>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러고 보니 작가정신의 픽은 어딘가 심상치 않은 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