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리처드 브라우티건 스타일을 느끼자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어쩌다 에메랄드빛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광경에 정신을 빼앗겨 홀리듯이 책을 집어들었건만...

첫 번째 표제작 <잔디밭의 복수>에서부터, 이 책은 내가 이제껏 게으른 독서만 해온 것을 무지무지 반성하게 만들었다.

알 카폰에 버금가는 밀주 (특기는 '버본') 제조가인 할머니로부터 술술 풀려나온 이야기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할어버지가 소유했던 잔디밭의 무시무시한 이력을 소개한다. 의붓할아버지 잭은 플로리다에서 물건을 팔던 이탈리아 사람인데 앞마당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앞마당을 미워했다.

어느날 잭의 지갑에 숨어 있던 벌이 시가에 내려앉았다가 윗입술을 쏘자 잭은 반사적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진해 잔디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또 한 번은 술지게미를 먹고 취한 거위떼들의 털을 벗겨놓고 할머니가 나간 사이 벌거벗은 거위들을 본 잭은 벌이 쏘인 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시가를 찢어 던지다가 차 유리를 뚫어 상처를 입었다. 곧 제 2의 잔디밭 돌진이 이루어졌다.

능청맞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보라지.

 

내가 태어나서 처음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 집 앞마당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36년 혹은 1937년의 일로, 어떤 남자가, 아마도 잭 같은데, 배나무를 베어서는 9미터나 뻗어 있는 그 커다란 나무에 여러 갤런의 석유를 붓고 아직 녹색의 배가 달려 있는 채로 불을 당기는 장면이었다-18

 

푸른 바다에서 한가로운 여유를 즐기는 장면을 찾으려고 했건만 첫 번째 작품부터 잔디가 없는 울퉁불퉁하고 메마른 잔디밭에서 일어난 복수 장면이라니...

그것도 화자가 처한 현실의 이야기에서 한참 오래 전 할아버지 할머니 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야기 자체로만 즐기자면 한바탕 웃고 넘길 에피소드를 기발하게 엮어 놓은 것으로 읽고 넘어갈 수 있으나 뭔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좀 더 깊은 뜻이 있을 것만 같은데

내 가난한 독서로는 쉽사리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목가주의의 상징적 종말을 목격한 화자. 벌과 거위와 정신병원에 들어간 친할아버지는 자연과 전원의 상징이라고 한다.

뒷 부분의 작품 해설을 읽자 그제서야 전체 내용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온다.

첫 작품부터 이렇게 의미를 찾아나서야 하는 책이라면 이 책, 쉽사리 읽어낼 만한 만만한 책이 아닐 텐데, 하고 지레 겁부터 먹게 된다.

하지만 화자는 황폐한 현대문명, 기계와 자동차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자연을 슬쩍슬쩍 보여주긴 하지만 대놓고 으르렁대려 하지는 않는다.

큰 틀을 이해했다면 모두 62개나 되는 단편들을 관통하는 정서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잔디밭의 복수>를 읽은 뒤에는 같이 분노하거나 화내는 대신 '와하하' 웃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대면하더라도 거세게 비판의 목소리를 올리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깨닫게 될 뿐.

그렇게 본다면 이 단편들에서 캘리포니아의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인 면모를 영 찾아볼 수 없다고도 할 수 없겠다.

어떤 단편에서는 잠시 문명사회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기 보다는 아름다운 언어에 푹 빠져 그 세계 속에 들어가 앉아 있게 되기도 한다.

 

캘리포니아가 그려 내는 환상에 이끌려 몽유병자처럼 무턱대고 걸어들어가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게지.

 

이상하게도 캘리포니아는 다른 모든 곳에서 사람들을 불러서는 예전의 삶을 잊어버리게 한다. 이곳의 에너지 자체가, 혹은 금속을 먹는 꽃의 그림자가 우리를 다른 삶으로부터 불러와 길거리 주차 미터기가 타지마할처럼 늘어선 캘리포니아의 주민으로 만든다.-34

 

생각지도 못했던 참신한 표현 덕에 잠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는 곳도 종종 등장한다.

 

계곡의 구비로 천천히 내려가노라면 발걸음마다 특이한 꽃들이 피어 있고, 드디어는 태평양이 나오며 그리스도가 살았을 때 카메라가 있었더라면 찍었을 사진 같은, 그러나 지금은 자기가 사진의 일부가 되는 드라마틱한 해변이 펼쳐진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진짜 거기에 있는지 자신을 꼬집어보아야 한다. -211

 

우리는 망각 사이의 캡슐 속을 걷고 있었다. 꽃들이 우리 주위에 조용히 만개해 있었다 꽃들은 마치 14세기의 이름 없는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내 친구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마도 우리의 혀가 그 화가의 붓에 합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12

 

시간은 클라크 게이블 영화를 볼 때 먹는 팝콘처럼 없어져갔다. -197

 

이제 완벽한 하루를 만들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노쇠한 소방차를 찾아 길을 건너게 해주는 것이었다.

"고맙네."관절염에 걸린, 노인 냄새가 나는 붉은 페인트, 백발로 뒤덮인 사다리, 사이렌 스피커 위의 약한 백내장 같은 경광등-204

 

바로 그 때 비눗방울 하나가 30번 스톡턴 버스에 치였다. 퍽! 신이 오른 트럼펫과 위대한 콘체르토가 충돌하듯 방울은 부서져 사라졌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다른 거품들이 어떻게 위대한 스타일로 사라지는가를 보여주었다. -205

 

비눗방울들은 각기 위대한 스타일로 부서져 사라졌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스타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상큼한 해변과 보석같이 반짝이는 물결, 훈훈하게 귓가에 스치는 바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를 그려보며 휴식을 취하고픈 마음에 완벽하게 흡족하도록 들어맞는 단편들은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새로운 스타일을 느끼며 현대문명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도 괜찮았다.

수도관의 배관을 시에 비유하고 노인을 소방차에 빗대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시대를 통찰하는 혜안을 만나 멋들어진 단편들로 탄생했다.

 

아.

첫 번째 <잔디밭의 복수>를 읽고 이 책을 덮지 않길 잘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6-29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우티건의 신작이 나왔군요. 여름휴가로 피서지에 갈 때 읽으면 좋겠어요. 표지가 시원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

남희돌이 2015-06-30 15:21   좋아요 0 | URL
저도 표지가 무지 마음에 들었어요. 휴가 떠나고 싶어질 만큼~~아름답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