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지 않게 파고드는 맛 [물구나무]
9편의 에세이를 냈던 백지연 앵커가 10번째 작품으로 소설을 냈다.
의외다, 하면서 읽어보니 생각보다 담백하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질문으로 인터뷰이의 허를 찌르면서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줄 알았던 그녀였기에 소설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 좀 더 쎌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싱글의 인터뷰어 민수가 주인공이기에 자연스레 민수의 모습이 백지연의 자화상이 아닌가, 했다.
하지만 소설의 끄트머리에 백민수는 인터뷰어로 소설에 초대된 상상 속 캐릭터일 뿐이라는 말이 나온다.
백지연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기는 힘들었지만 힘을 쫙 뺀 담담한 어조에 백지연의 뚜렷한 이목구비처럼 손에 베일 듯한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한
소설일 거라는 생각은 차츰 무뎌져 갔다.
인터뷰어 민수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다. 오랜만에 옛 동창 수경으로부터 뜻밖의 문자를 받은 그녀는 그
때로부터 27년의 시간을 거슬러서 여고 시절의 추억에 접속한다.
난데 없이 치과 의사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던 하정이 죽었다니...
끝없이 이어지는 '만약에 뭘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뭘 했더라면 ' 하는 가정법이 힘들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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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현재의 인생이 달라졌겠지요."-61
현실의 인터뷰 대상인 파티시에 형제들의 말이 민수의 뇌리를 맴돈다.
여고 시절, 최고의 수재로 소문났던 수경은 재벌집에 입성하여 남보기엔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면서, 우아한 말로 이혼을 종용한다고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인생 경험이 부족한 그녀는 맨몸으로 내쳐질 지도 모르는 상황.
수경을 만나 그녀의 사정을 전해 들은 민수는 수경으로부터 한때 뭉쳐다녔던 , 그래서 시작점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근황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얼굴 한 쪽에 흉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밝고 씩씩하게 얘기하며 동네 대장 역할을 했던 승미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홧김에 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자신의 일을 즐기며 생활하는 중이라고 했다.
파파걸인 줄만 알았던 문희는 아버지가 오케이 했다는 의사와 결혼해서 둥글둥글한 얼굴 그대로 원만한 인생을
운영 중이었다. 인생이 즐겁다는 문희는 마음가짐 때문에서인지 더욱 눈부신 행복을 재현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의붓 아버지라는
것조차도 그녀는 감사하며 살고 있었기에...
장면은 다채롭게 바뀌어 공간이 파리로 이동한다. 파리에 정착해 살고 있는 미연은, 학창 시절 친구들 중 가장
학업성적은 낮았지만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이 확고했기에 유학을 결정했다고 한다. 호텔 수업을 받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까운 미래를 설계하고
이루어나가는 데서 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목숨을 끊은 하정 뿐인가.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던 파리의 미연으로부터 하정의 속사정을 전해 들은 민수는 그저 망연자실한다.
의가 명문으로 소문난 집의 딸이어서 그저 앞날이 창창하겠거니 했던 하정은 그 누구도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그 외로움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삶을 찾으려 했던 순간, 비극은 일어난 것이다.
민수가 27년의 시간을 거슬러 기억해 낸 친구들의 시작점은 비슷한 것 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자가 그리는 궤적은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누구의 인생이 낫고 누구의 인생이 못하다는 비교보다는 그저,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직은 많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많이 원망스러웠다.
삶의 순간순간에서 "만약~"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어야 했을 "여성"들의 삶이 포옥, 가슴을 파고
든다.
무언들 이루고 싶지 않았겠으며 무엇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좌절, 억압, 결핍 등의 단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깨부수어야 진정 자신을 찾을 수 있겠다.
백지연의 첫 소설이라, 굉장히 빳빳하고 날이 서 있는 날카로운 분위기일 거라 짐작했었는데, 내 짐작이 크게 빗나갔다.
조심스레 여성의 마음에 파고들어서 굉장히 묵직한 울림을 남기는 소설이다.
사납고 매섭게 후벼파는 통곡의 소리가 아니라 그저 우우~ 하고 낮은 소리로 길게 길게 꼬리를 끌며 눈물 찍어내게 하는 울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