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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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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한층 가까이...<작가의 얼굴>

 

 

이 책은 참으로 어지간히도 읽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어서 부쩍 반가운 마음이 앞서지만, 읽을라치면 꽤 두툼한 두께가 만만치 않게 압박감을 주고 있어서 선뜻 열기가 힘이 든다.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그 또한 ‘비평가’라는 제목에 눌려 ‘에휴~’하는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된다. 무지무지 어려운 내용이 아닐까? 선입견을 애써 억누르고 목차를 훑어보니 온통 어려운 작가들의 이름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다. ‘망했다!

셰익스피어가 웬말이며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아르투어 슈니츨러, 리온 포이히트방거, 페테르 바이스, 토마스 베른하르트 등 이름들은 또 웬말이냐...겨우 알아볼 수 있는 이름들은 이름만으로도 후덜덜한 괴테니 체호프,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등 고전 중의 고전으로 명작의 반열에 들어선 작가들 뿐이니 이거, 된통 어려운 책이 얻어 걸렸구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책을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작가의 얼굴>이니 적어도 사진이나 그림은 들어 있겠지...하는 마음에 겨우겨우 무거운 책의 표지를 들어올리고 속 책장을 휘리릭 넘겨보니 오호라, 그림이 언뜻언뜻 보이는 것이, 읽을 만 하겠는걸?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저자의 이름조차 생소하기 그지 없는데,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책날개에 쓰여진 작가의 소개조차 앞날개와 뒷날개를 오로지 차지하고 있다. 독일에서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폴란드계 유대인 비평가. 단일민족이고 오로지 남한과 북한만의 경계를 지니고 있을 뿐, 민족의 갈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우리의 배경에 견주어 볼 때, ~계 ~인이라는 소개는 낯설어도 한참 낯설다. 복잡한 계보에 어울리게 1920년에 태어난 저자는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폴란드에서의 부자유를 견디다 못해 서독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한다. 1988년부터 독일 공영방송에서 <문학 4중주>라는 서평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이름을 얻게 된 그는 권위를 타파하는 거침없고 명쾌한 평론으로 독일 문학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 책은 저자가 1967년부터 수집해 온 작가들의 초상화에 대해, 그 그림들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 그림을 그린 화가들과 그림속 주인공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문학 에세이다. 그림에 얽힌 사연, 작가들과의 일화 등 저자의 개인적인 체험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어, 짤막짤막한 글 속에서도 저자의 문학에 대한 사랑과 해박한 지식,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두께와 저자의 유명세에 지레 겁먹었던 것에 비해 책의 내용은 읽어나갈수록 수월하다 여겨졌고, 심지어 재미있기 조차 했다.

직접 만나보거나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어도 그림 그리는 이의 ‘체’를 통해 걸러진 작가들의 “생얼”은 정겹게 다가왔다.

사진 그대로의 모습이 나와 있었으면 그냥 쓰윽 보고 지나쳤을 법한 작가의 얼굴들은 화가의 눈을 통해 판화나 펜화 등으로 남겨져 있어서 그림 그린 이의 평가가 반영된 모습들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작가들은 일단 제쳐두고 카프카의 모습을 볼까.

 

 

저자의 신랄한 첫 마디가 카프카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옛날에 호메로스를 두고 여러 도시가 그랬듯, 그를 두고 여러 민족이 각축을 벌인다.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과 유대인들이 벌써 수십 년째,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계 상인의 아들 프란츠 카프카를 둘러싸고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17

 

올해 초에 홀로코스트 최고령 생존자 알리스 할머니의 회고록이자 에세이인 <백 년의 지혜>를 읽었는데, 그녀는 카프카와의 친분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카프카는 자기가 어디 속하는지 몰랐어요. 정체성을 고민했고 어느 길을 택할지 확신이 없었지요. 선택하면 다른 쪽 부모를 실망시킬 테니까. 난 그게 그의 고민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알리스는 요즘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카프카 식으로 논하는 것을 보면 카프카가 즐거워할 거라고 말한다. 그의 글이 유대주의나 유대인의 뿌리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학자들은 그의 작품이 완전히 유대인다운 글이라고 주장한다. 알리스는 양쪽 주장 모두 일정 부분 옳다고 인정한다.-38

 

카프카에 관해서는 <변신>을 읽은 게 다이지만, 그나마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는 동안 기억에서 희미하게 잊혀져 버린 작품이라 뭐라 논할 자격이 없는 나이지만, ‘불안’이라는 단어가 카프카의 작품을 여는 중심 키워드요, 개념이라 평하는 저자의 명쾌한 주장을 접하니, 카프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불안”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저자가 모은 작가의 얼굴 중에서 한 인물에 관해 두 장 이상의 그림이 있는 작가로는 <토마스 만>과 <베르톨르 브레히트>를 들 수 있겠다.

‘맨 처음은 브레히트였지.’

초상화 수집의 시발점이 된 그림은 조각가 구스타프 자이츠가 석판화로 그린 브레히트 초상화였다. 브레히트는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자이츠의 그림 속 브레히트는 족히 일흔은 되어 보이는 늙은이 같았다고 말했다.

 

 

 

 

--이는 한 냉소적인 남자의 얼굴, 지쳤으되 체념하지 않는, 번민하는 시인의 얼굴이다--257

 

 

한 작가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책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가능하겠는가. 그것도 화가의 눈을 통과한 각기 다른 모습들을...

 

 

저자는 “토마스 만”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지, 그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하인리히 만,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형제, 토마스 만 등, 목차에서만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어디 보자.

토마스 만은 무슨 작품을 읽었더라...

<마의 산>은 너무너무 유명짜한 책이라 그냥 패스했고, 단편으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니와 크뢰거>등은 읽은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저자가 그 내용을 되새겨 주었고, 그에 힘입어 되살아나는 듯도 했으나, 깊이 있게 평론이 들어가자 다시 나의 이해력은 주춤주춤 하여 다시, ‘도무지 모르겠다.’ 모드로 돌아서 버렸다. 주제가 뚜렷했다고 하는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인물. 갈색 피부와 검은 눈동자의 토니오와, “밝은 금발”과 “사파이어같은 파란 눈”의 소유자 한스.

아, 이 책에서 나는 짐작을 했었어야만 했던 것일까.

“세상이 나를 알게 되리라. 부디 나를 용서하길.”-188

플라톤의 한 구절을 인용한 토마스 만.

 

총 열 권 이상의 일기에서 밝혀진 바, 그가 최대의 열정을 바친 대상은 자기애였고, 이 자기애는 여러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모든 망성림을 무릅쓰고 자신의 진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진실이라 여겼던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성애가 그의 존재의 기본 요건을 이루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작품들을 주의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188

 

 

너무 어린 시절 대충 읽었던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서 “동성애적 경향”을 읽어내기란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 이제야 그의 비밀을 알게 되어 사뭇 충격이 크다. 뭐 그 사실 때문에 작품을 폄하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런 저런 요런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를 불러 일으키며, 문학과 작품의 관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평론은 작가나 평론가가 아닌 독서 대중을 향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비평 작업을 해 온 저자에게 고맙다고나 해야 할까.이 책을 읽고 나니, 정말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토니오 크뢰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등을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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