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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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한 대학의 남학생이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인(死因)은 심장막 내출혈,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91학번 신입생으로 밝혀진다.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아직도 ‘강경대’라고 하는 그의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가 강경대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말을 남기고 분신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이,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하는 사건이 이어진다. 5월 25일 퇴계로에서 성균관대 김귀정이 강경 진압 과정에서 질식사하고, 6월 8일 인천 삼미기공 노동자 이진희가 분신하며, 6월 15일 역시 인천의 택시 노동자 석광수가 분신하기까지, 불과 두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두 명의 대학생이 시위 도중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고, 그 사건의 앞뒤로 대학생과 고등학생, 가정주부,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한 명이 분신을 하며,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한 명의 노동운동가가 의문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 시인 김지하는 그것을 ‘죽음의 굿판’이라고 일컬으며 학생운동진영을 비난하였고, 언론은 공식적으로 그 시절을 ‘분신정국’이라고 명명한다. 명칭이야 어찌 됐건,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러한 일련의 ‘죽음/주검’들이 갖는 의미를 사회적 차원에서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과 당혹감에서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의 원인과 책임소재를 정당하게 규명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각자의 윤리와 정치적 입장을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이 사회의 상징질서가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정체성, 그들의 정치적인 주체-위치를 통해 열사, 혁명가, 좌경-용공세력, 불온세력, 운동권, 민주주의자 등으로 호명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1970년생이자 김귀정의 대학 1년 후배로서 89학번인 소설가 김연수는 그때의 충격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나는 문득 1991년 5월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서울에서 전화를 받은 친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거짓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었고, 우리는 패배하도록 프로그램돼 있었다. 그때의 일들이 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김연수,「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창작론 - 썬더버드, 만투스, 바스, 끌로드 샬」,『문학사상』, 2005년 12월호)



어느 평론가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발생하는 심리적 기원이 바로 이 1991년 5월의 시공간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그의 신작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통해 91년 5월의 그 집단적인 죽음/주검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소설가 김연수만의 가장 그다운 문학-윤리학적인 행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91년 나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떤 확신을 가진 사람들, 스승 세대,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등 모든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며 “그러나 이번 소설을 통해 당시의 그런 생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계간『문학동네』에 2005년 겨울호부터 2007년 봄호까지 연재했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을 제목을 바꿔 출간한 이 소설은 예의 분신이 잇따랐던 1991년 5월의 소위 ‘분신정국’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그 이야기‘들’을 출발한다. 소설의 중심적인 화자는 모 대학의 총학 선전부 차장을 거쳐 얼떨결에 대학생 조직의 방북 예비대표로 베를린까지 가게 되는 ‘나’이다. 예컨대 “1991년5월에 한 일이라고는 최루탄이 터지는 길에서 정신없이 정민을 찾아 나섰다가 투쟁국장이 휘두른 쇠 파이프에 어깻죽지를 얻어맞은” 것 밖에 없는데도 방북 예비대표로 뽑혀 베를린까지 가게 된 ‘나’를 통해 거대한 역사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소한 이야기가 얼마나 차이날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공공의 상처로 간직하고 있는 보편적 역사, 기록된 대문자의 흔적에는 사실상 ‘실재적이며 참된’ 것이 휘발되어 있음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그의 ‘역사학’이 작품 전면에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김연수는 개인과 역사의 관계라는 문제틀 안에서 역사에 대한 어떤 ‘입장’의 문제 이전에 역사라는 담론 자체, 혹은 역사라는 담론을 구성하는 ‘욕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작가는 1991년 5월의 역사 한 가운데에 있었던 운동권 대학생 ‘나’와 ‘정민’의 사랑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나’의 할아버지, 무주의 산골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늘 세계여행을 꿈꾸었던 정민의 ‘외할머니’, 1964년 서울 시내 수류탄 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다가 자살하게 되는 정민의 ‘삼촌’의 이야기들을 거쳐, 베를린에서 만나게 되는 ‘강시우’ 혹은 ‘이길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까지, 그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이야기들을 작품 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들려준다(아니, 차라리 작품 속 인물들이 유령작가 김연수의 펜을 빌려 자신들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이 소설은 거대담론을 따라 기록된 서사인 공식적 역사가 아닌 불가능한 이해의 축적 가운데서 잉태되고 추억되는 개인의 사소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공식적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희생당한 개인들을 애도하는 문학적 윤리의 한 가능성을 현시하는 데 성공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이 우리의 현실 안에 통합되는 행위, 그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 묻을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기를 끝끝내 거절한다. 그들을 공식적인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주인공으로 상징화하기를, 즉 평범한 운동권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가로 자랑스럽게 기념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신에 거대 담론이라는 상징질서로 재현될 수 없는 탈소외된, 너무나 인간적이며 우연으로 가득 찬 그들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 이야기들이 접근하는 역사, 차라리 그 이야기가 반향하는 역사라 부를 수 있을 역설적인 뜻에서 불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소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역사는 가능하다. 다시 한 번 가능하다. 단, 이야기를 통해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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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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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사막 혹은 테러의 향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생각의 나무 (2007년 9월)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그는 대처 정권의 등장과 신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공세를 계기로 시작된 19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변화 속에서 좌파적(맑스주의적) 문학비평의 새로운 과제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을 직접 모범적으로 수행해온 이론가ㆍ비평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이후로 출간된 그의 일련의 저작들, 즉 『발터 벤야민: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1981), 『문학이론입문』(1983), 『비평의 기능』(1984), 그리고 『결을 거슬러서』(1986), 『미학의 이데올로기』(1990) 등은 변화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비평을 모색하기 위한 그의 일관된 작업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글턴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부터 문학과 문학적 가치를 도덕적 가치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되, 그것에 억압된 정치적인 차원을 되돌려줄 수 있는 정치적 문학비평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작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학비평을 소극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폭로하고 파헤치는 데 주력하는 부정적(否定的) 차원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보다는 “지배 역사의 결을 거슬러 전통 가운데서 현재의 좌파적 이데올로기 투쟁에 쓸모가 있는 유산을 적극적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해석학(redemptive hermeneutics)”을 가동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보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저작들인 『The Idea of Culture』(2000), 『우리 시대의 비극론』(2003), 『After Theory』(2003), 『The Meaning of Life』(2007) 등을 통해 우리는 그의 이러한 작업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ㆍ11테러 6주년을 맞아 지난 9월에 번역 출간된 그의 2005년 저작인 『성스러운 테러』(원제: Holy Terror, The Meaning of Terrorism) 역시 과거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어떠한 개념 혹은 사상의 혁명적ㆍ정치적 ‘흔적’과 ‘편린’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현재의 맥락 속으로 불러와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요소 및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그 개념이나 사상이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그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 텍스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테러 및 테러리즘의 형이상학적 차원의 계보학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글턴 자신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최근에 그가 천착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로의 전회(轉回) 가운데서 나온 동시대적 비평작업의 성과물이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이글턴의 전작(前作)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맑스주의자라 자처하는 이글턴이 유물론자답지 않게 왜 갑자기 형이상학 혹은 신학 연구의 방향으로 이론적 전회를 한 것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이글턴의 답변은 이렇다.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죽음이나 악, 희생양과 악마, 숭고, 공포와 자유, 순교와 자살 등의 다분히 신학적이고 신화적인 개념들이 기존 맑스주의 정치학 담론의 유물론적인 개념들 못지않게 ‘테러’라고 하는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현상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글턴은 정치사상으로서 테러리즘이 프랑스혁명과 함께 나타난 근대의 발명품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전근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the sacred)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이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하는 에우리피데스 희곡 『바쿠스(The Bacchae)』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이글턴의 해석에 따르자면 “측량할 수 없는 무의식적 활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무자비한 악의와 공격성의 소유자”이며, “(라캉-지젝의 용어로) 외설적 쾌락이라고 하는 섬뜩한 주이상스(jouissance)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이러한 최초의 테러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인물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의 존재이다. 펜테우스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를 찾아와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흥청망청 숭배하도록 한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서 상식 밖의 폭력으로 이에 대응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의 머리를 베고 쇠지레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죽음충동의 화신인 디오니소스가 타협을 제안했을 때도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감옥에 가둬버림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는 문화적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다.

 

  바로 이러한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 서사에서 이글턴은 쾌락원칙 너머, 치명적 엑스터시의 영역에 존재하는 디오니소스(신성한 광기, 테러, 아나키, 리비도의 반란)가 펜테우스(합리성, 문명, 독재, 억압, 국가 테러리즘)의 외부적 타자가 아니라 바로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위험한 가능성으로서, 그로부터 배척당하고 거부당한 자아의 또 다른 중심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신화에 대한 해석은 현대의 일상화된 정치적 테러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이해하는 준거로 기능한다.

 

 이글턴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신성한 것 곧 성스러운 테러가 그 자체로서 양면적 속성을 가진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을 창조하는 힘이자 죽음을 야기하는 힘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제전으로부터 우리를 산산조각 내는 숭고함의 무서운 매혹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신학, 철학과 미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이글턴의 현란한 사유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 문명에 내재하는 신성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근대 후기에 이 신성한 힘은 무엇보다도 무의식과 죽음충동, 또 실재 등의 이름을 통해 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실재(the Real)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이야기는 결국 자기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괴물적 결여를 두려워하는 문명이 알 수 없고 기형적인 존재에게서 이 두려운 실재의 이미지를 발견한 뒤에 그를 자신의 문밖으로 내치려고 하는 시도들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이 21세기의 벽두에 탈레반 출신과 텍사스 출신의 두 근본주의들 간의 충돌로 재연되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말마따나, 9ㆍ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은 우리의 환상의 공간을 산산조각 내버린 ‘실재’의 침략적 귀환이자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를 경계 짓는 배경에 대한 공격으로서, 우리는 스펙터클로 실연된 CNN 뉴스채널의 비행기 폭격 영상과 마주함으로 드디어 ‘문명의 밤’ 혹은 ‘실재의 사막’에 발을 딛게 되었다 할 수도 있으리라.

 

  현대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쉬운 책이 결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 테러리즘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인문학적 해석을 기대하는 명민한 독자라면, 이 책에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일독을 권한다.

 

 

 

 

 

함께 읽을 만한 책: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 이방인과 희생양, 괴물과 유령, 신 등을 중심으로 타자성 개념에 대한 풍부한 철학적ㆍ비교문학적 고찰을 담고 있음.

 

○ 브루스 링컨, 『거룩한 테러』(돌베개, 2005) - 테러리즘 및 대(對) 테러전쟁에 내재하는 종교적 최대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 및 무의식적 폭력성에 관한 종교학적 연구를 담고 있음.

 

○ 슬라보예 지젝,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 원제는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9ㆍ11 테러에 관한 지젝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진수를 접할 수 있음(단, 국역본의 경우 오역이 심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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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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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기계: 우리의 책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Felix Guattari)는 『천개의 고원』(자본주의와 분열증 제2권, 1980) 서론에서 ‘책’(text)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책은 그 ‘외부’를 갖는다. 여기서 외부란 단순히 책이 쓰여진 배경으로서 역사적ㆍ문화적 맥락(context)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그 책과 만나는 다른 책들, 그것과 대립되는 다른 사유체계들에서 이미 쓰여진 텍스트를 만날 때 발생하는 ‘사건’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책의 외부는 또 다른 책일 수도 있고, 억압과 폭력으로 지칭되는 절망적인 현실일 수도 있고, 그러한 절망적인 현실을 변혁하고자 하는 운동이나 혁명의 시대적 열망일 수도 있고, 혹은 지금 어딘가에서 그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독자의 삶의 자리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책이 외부를 갖는다”는 말은 책이 어떤 외부와 만나고 접속하는가에 따라 다른 텍스트로 작동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즉 경우에 따라 책은 일종의 ‘기계’적 장치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이란 각각의 ‘의미-세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작동하고, 그 외부에 의해 다른 ‘책-기계’로 변환된다고 말한다.

‘책-기계’는 그 각각의 외부와 접속하여 작동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건의 ‘효과’를 생산한다. 책이란 이미 만들어진 채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어떤 외부를 만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우리 앞에 만들어내는 ‘기계’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다른 세계 속으로 끌어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저 유명한 문장, “철학자들은 그 동안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책’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러니까 2007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20대들은 상위 5% 정도만이 한국전력과 삼성전자 그리고 5급 사무관과 같은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이미 인구의 800만을 넘어선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위협적으로’ 예언하는 이 책 『88만원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은 그런 위협과 함께 곧바로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고 선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책-기계’로서 자신의 사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오늘 대한민국의 20대들이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인 세계―월 88만원 정도를 평균임금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될―를 냉혹하게 보여주는 책인 동시에, 역사의 갈림길 위에서 조승희처럼 총을 들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전 세대인 386처럼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 것인가를 묻는,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이 세계를 단호히 부정하고 다른 세계의 ‘발명’을 위해 싸울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즉시로 사용해야 할 ‘무기’로서의 ‘책-기계’이다.

 

슬로건: 88만원 세대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책 표제이기도 한 ‘88만원 세대’라는 용어는 마케팅 대상으로서의 용어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20대들에게 저자들이 붙인 이름인데, 20대의 95%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 아래 비정규직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 74%를 곱한 수치에 근거한 것이다. (저자들은 이 ‘88만원 세대’를 ‘승자독식 세대’, ‘배틀 로열 세대’라고도 부른다). 우리의 바로 이전 세대인 386세대는 ‘선동열 학점’이라는 0점대 학점을 받아도 직장을 골라가며 취직을 했지만, 지금의 1O대와 20대는 기껏해야 주유소나 편의점을 떠도는 ‘알바 인생’이거나 비정규직 신세다.

이런 현상은 일본의 ‘버블 세대’, 유럽의 ‘1천유로 세대’, 미국의 ‘빈털터리 세대’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빠르고 훨씬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88만원 세대』는 이런 세대 간 불균형이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지금의 20대에게 그 피해가 집중된 때문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플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도 이미 닫혀진 사회적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젊은 세대를 볼모로 한 ‘인질 경제’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88만원 세대』는 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례를 들며, 세대 균형을 되찾는 길은 토플 점수가 아니라 ‘바리케이드와 짱돌’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담 설마 저자들은 정말 우리더러 거리로 나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죽창을 들고, 짱돌이나 화염병을 던지며 혁명의 시대라 불렸던 1980년대의 우리 선배들처럼 그렇게 가열찬 투쟁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그런 식의 단순하고 얕은 사유를 결론이나 해법으로 제시하는 책은 절대 아니니까.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인 바리케이드와 짱돌의 투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고 확인하기 바란다.

다만, 여기서는 저자가 해법 이전에 미리 제시하는 몇 가지 제약 조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소위 ‘혁명’이라는 방식을 쓸 수 없다. 예컨대, 프랑스혁명이나 동학란 아니면 농민란과 같은 혁명 혹은 난(亂)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와 같이 세대 간 문제가 개입되어 있는 경우에서는 혁명과 같은 그런 사회변화 프로그램은 도구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둘째, ‘세계화’라는 조건이 붙는다. 흔히 좌파들은 세계화를 반대하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세계화라는 현상은 이미 한 나라가 정지시키거나 대안을 마련할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포디즘’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것은 앞의 세계화와도 결부지어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스스로 임금을 깎아서 과거 수준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의 선배들(386세대)의 오늘을 있게 한 ‘과거’가 지금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 책의 주제이자 분석대상인 ‘88만원 세대’, 바로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이 책의 일차적인 독자가 되어야 한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고 하는 슬로건(명령어) 하나로 한국 사회 초유의 신빈곤 세대를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 정치적으로건 경제적으로건 마케팅의 대상으로 밖에 호명되지 못하던 20대라는 이 불특정한 대중의 덩어리들을 세대론적으로 묶어 내어 한국 사회 전체 진보와 변혁의 키를 쥐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집단으로까지 구성해냈다.

‘명령어의 순간성’은 ‘슬로건의 순간성’으로 치환하여 말하는 순간 슬로건(명령어) 자체에 매우 결정적인 요소임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모든 슬로건에는 시의적절한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지나면 부적절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의 순간성은 그 슬로건의 호명 대상인 ‘88만원 세대’, 바로 당신과 내가,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다함께 모색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도 입증될 수도 없는 것이란 얘기다. 그럼, 이제 당장 이 책을 사서 읽도록 하자.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때늦은 후회하는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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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from 영화진흥공화국 2007-09-19 14:21 
    회사에서 맡은 연구 주제 중에 하나가 미래전략이라서 계속 이런 주제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이 아니라 오늘 낮)에 읽은 책이 이 . 노바리 님의 블로그에서 한번 언급한 걸 읽었고 http://vedder.tistory.com/104 그 이후 어디선가 책의 내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소개기사를 읽으면서 이 책은 꼭 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의 핵심적인 구도는 개혁-보수, 민주-반민주..
 
 
 
26년 1
강도영 지음 / 문학세계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5ㆍ18 이후’ 세대들의 ‘5ㆍ18 트라우마티즘’ 읽기

-강풀 만화 『26년』, 미디어다음 연재(2006. 4. 3 ~ 2006. 10. 13),

 

나는 1980년생이다. 5ㆍ18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태어난 나의 세대가 저마다의 경험을 거쳐 민주공화국의 시민(市民)으로 성장하기까지 걸린 지난 세월들은, 5ㆍ18이 권력에 의해 은폐되고 조작되는 음모에 맞서 기억되고 증언되다가 마침내 국가적으로 기념되고 애도되는 영광을 거쳐 요즘처럼 여권(與勸)의 이데올로기적 도구 내지는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그 모든 역사의 흔적들과 고스란히 마주해온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사실 나의 세대가 공유하는 5ㆍ18과 관련한 일련의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5ㆍ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사후에 그것을 교육받는 위치에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 경험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세대는 한번도 5ㆍ18 희생자들의 자녀들, 즉 1980년 이후 ‘나’와 동일한 시간대를 살아가며 ‘나’와 함께 이 나라에서 자라왔을 또래의 그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져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1980년 광주의 5월이 ‘나’의 삶과는 무관한 역사책 속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던 그 인식의 한계를 깰 수 있게 해준 어떠한 역사적 사건도, 하다못해 그들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문화적 텍스트도 우리에게는 부재했던 탓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에 5ㆍ18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5ㆍ18은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올해 나온 김지훈 감독의 영화「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 이후에 출생한 우리 세대를 직접적으로 겨냥해 5ㆍ18의 비극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재현해준 ‘친절한’ 작품이고, 이보다 먼저 나온 강풀의 만화『26년』은 5ㆍ18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가 부모 세대의 트라우마를 물려받아 겪게 되는 복합적인 트라우마티즘(traumatism)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연령과 상관없이 5ㆍ18의 비극을 현재진행형으로 간직하고 있는 또래의 친구들이 우리 주변에 유령처럼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사실 두 작품은 장르의 성격이나 텍스트 내에서 다루어진 현실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5ㆍ18의 해결이 물질적 보상과 기념사업, 그리고 책임자에 대한 미완의 형사처벌로 귀결되고 있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사회적 정황 속에서, ‘5ㆍ18’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들을 주된 독자(혹은 관객)로 겨냥하여 그것의 기억을 요청하는 텍스트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평론가들의 해석과 비평이 충분히 나온 상태이고, 또 내게 주어진 지면의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여기서는『26년』을 중심으로 동시대 문화적 텍스트 속에서 드러나는 ‘5ㆍ18 이후’ 세대들의 ‘5ㆍ18 트라우마티즘’에 대한 성찰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작년 4월부터 10월까지 인터넷포털 ‘미디어다음’에 연재되어 하루 조회수가 200만건을 넘고, 매회 2천여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26년』은 5ㆍ18 당시 계엄군이었던 김갑세라는 인물과,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시민군들의 아들, 딸들이 26년이 흐른 후에 모여 법이 응징하지 못한 ‘전범’ 전두환을 단죄한다는 내용을 기초로 하고 있다. 5ㆍ18 당시 가해자의 처지에 있었던 김갑세와 같은 계엄군 출신 인물들이 갖게 된 죄의식의 트라우마티즘은 이미 영화「박하사탕」등에서 깊이 다루어진 바 있다. 그보다 ‘5ㆍ18 이후’ 세대를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인물들로서, 김갑세가 기획한 암살 계획에 동참하는 주인공들의 면면이 중요한데, 5ㆍ18 당시 자신이 보는 앞에서 남편을 사살한 계엄군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어머니를 둔 광주지역 조직폭력배 진배, 도청 앞에서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복수심을 키워온 사격선수 미진, 5ㆍ18 때 부모를 모두 잃은 슬픔을 묻어둔 채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5ㆍ18때 고아가 된 여성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새 삶을 꾸리려 하는 흉상조각가 치영, 갓 돌이 지난 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여 지금은 자신의 아버지를 그때 그곳에서 죽게 만든 전직 대통령의 바깥나들이를 돕기 위해 교통신호를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관 정혁, 그리고 계엄군으로 광주에 내려가 5월 27일 전남도청을 최후까지 사수하고 있던 치영과 진배의 아버지를 죽인 김갑세의 아들 주안 등으로, 다들 부모 세대가 겪은 비극을 불가항력적인 유산으로 물려받아 평생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을 견뎌온 이들이다.

인간에 의해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해진 5ㆍ18 폭력의 비극은 한국 사회의 제도적 민주화를 계기로 하여 물질적 보상과 정치적 복권으로 한 필의 천을 짜낸 듯 보이지만, 실상 그 천의 가로줄과 세로줄 사이에 여전히 잘 짜여지지 못해 생긴 커다란 틈들이 보이는데, 이 틈들 사이로 억압된, 치료되지 못한 과거 기억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라는 고립된 한 지방 도시에서 발생한 비극이지만, 5ㆍ18이 기억의 방을 여전히 점유하면서 살고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 기억들이 5ㆍ18 학살의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과 우리 모두에게 현재까지 육체적ㆍ심리적으로 엄청난 비용의 지불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 만화가 갖는 가치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만화가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인물들이 모두 5월 27일의 전남도청 최후 학살에서 희생된 이들 즉 국가의 정규군을 상대로 벌인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한 시민군들의 자녀들이라는 점은 작가의 정치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5ㆍ18은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 보상, 기념사업, 명예회복 등으로 마무리가 되어가고, 역사적 사건의 차원에서 볼 때도 5ㆍ18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해결이 된 과거의 일이라는 식의 국가/시민사회 간의 합의된 의도적 망각이 이루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 가운데서, 이 만화는 5ㆍ18의 보상, 명예회복, 진상규명 노력,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권 등의 결과가 과연 우리에게 진정으로 ‘5ㆍ18 트라우마티즘’의 불안을 제거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아가 5ㆍ18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5ㆍ18 이후’ 세대들에게까지 각인시킨 심리적 외상들을 작품 속의 인물들의 이력에 상상적으로 투영시켜, 결과적으로는 5ㆍ18에 관한 성찰의 지평을 총체적인 ‘5ㆍ18 트라우마티즘’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비록 전두환 개인을 상대로 한 복수극이라는 플롯을 채택함으로써, ‘5ㆍ18 이후’ 세대가 겪은 트라우마티즘의 현실을 보다 깊이 묘사하지 못하고, 전두환 암살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만 극의 초점을 맞추는 흥미 위주의 결말로 나가고 말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무모한 암살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간 한국 사회에서 ‘5ㆍ18 트라우마티즘’을 겪고 있는 피해의 당사자들이 그 치유의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징후적으로 드러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즉,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의 상징적, 정치적 죽음조차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그의 육체적 생명을 실제로 거두고자 하는 모종의 움직임이 만화 속에서나마 실현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5ㆍ18 트라우마티즘’을 성찰하는 방식에 있어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사건에 대한 냉철한 판단보다는 감정을 자극하는 복수극의 플롯을 취했다는 비판을 이 작품에게 던지기 전에, 그보다 먼저 왜 우리는 ‘5ㆍ18 이후’ 세대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해 그들이 직접 전두환을 암살하려들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었는가 하는 물음부터 진지하게 되새겨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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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인가
앤서니 엘리엇 지음, 김정훈 옮김 / 삼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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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이래로 근대 철학에서 ‘자아’(self)는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지각하고 세계 내의 자율적인 존재로서 완전하게 행동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성과 지적 능력의 인도를 받는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돼 온 용어이다. 물론 철학사에서 이러한 자아 개념은 끊임없이 비판되고 수정되어 왔다. 그래서 현대 철학에서는 ‘자아’라는 개념 대신에 ‘주체’(subject) 혹은 ‘주체성(su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좀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아와 주체에 대한 개념적인 구분은 다음과 같다. 자아는 흔히 “내가 말이야”라고 말할 때의 그 ‘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관습적인 관점에서 ‘자아’는 언어를 생각의 전달 도구로 사용한다. 자아는 자기가 의미하는 바를 말하고, 자기가 말하는 바를 의도한다. 곧 자아는 주인으로서의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장소를 ‘주체’로 표시하는 것은 관점의 일대전환을 요구한다. 주체들은 자기를 형성하는 모든 현상을 완벽하게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결코 접근할 수 없는 그들 자신의 것, 즉 ‘무의식’이라 이름 붙여진 차원이 존재하기까지 한다. 즉, ‘나도 나를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의 목적어 ‘나’가 주체인 것이다. 그 무의식으로서의 ‘나’가 표시하는 것은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 욕망과 긴장, 에너지, 억압 등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주체성의 경험은 ‘자아’로서 인식되는 경험이 아니라, 주체 자신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을 소유하는 경험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이처럼 자아에서 주체로 가는 철학적인 사유의 비판적 발전의 맥락과는 별도로 여전히 ‘자아’라는 개념의 이론적, 분석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만나 볼 책이 바로 그러한 자아 개념의 철학적 해체의 유행을 거스르며(혹은 자극을 받으며), 자아의 사회적 구성에 관한 물음, 개인이 자아의 서사를 짜는 데 사용하는 상징적인 재료들에 관계된 논쟁, 자아 형성이 문화와 사회의 재생산이나 붕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관련된 이슈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온 사회과학적 자아 개념과 이론의 연구들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웨스트 오브 잉글랜드 대학의 사회정치 이론 교수이며, 비판이론 센터 소장으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 앤서니 엘리엇이 쓴 이 책(원제『자아의 개념들 Concepts of the Self』, 2001)은 사회과학에서 개념화ㆍ이론화해 온 ‘자아(the Self)’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사회ㆍ정치 이론, 사회학, 사회심리학, 문화연구, 젠더연구 등의 분야를 공부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자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한 유용한 입문서인 이 책은 학제간의 관점들을 통합하는 새로운 길을 터놓고 있다. 저자인 앤서니 엘리엇이 사회학자로서 자신의 전공분야인 상징적 상호작용론, 근현대 사회학이론을 넘어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과 퀴어 이론, 정신분석학(프로이트-라캉-지젝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체성의 정치학 등의 다양한 사상적 전통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아에 관한 폭넓고도 명료한 논의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엘리엇은 자아 이론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한 사회 이론가와 문화 분석가들에 초점을 맞추어, 자아 정체성과 자아성과 사적 정체성의 경험을 해명해 온 주요한 연구들을 상세하게 조망하는데, 그전에 먼저 자신이 지지하는 주요한 사회학적 전통의 견지에서 자아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전제하고 있다. “자아는 개인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벼려 내는 상징적인 기획이다. 자아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더 넓게는 사회를 인도하는 지향점을 주는 상징적인 기획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아는 상징적으로 공들여 만들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 동기와 다른 사람들의 행위 동기를 해석하기 위해서, 정체성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다시 이야기하느라고 상징적인 재료들(언어, 이미지, 기호)을 이용한다. 어떤 논평자들은 그러한 상징적 또는 해석적인 영역들이 자아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본질적인 매개체가 아니라는 주장을 해왔다. 이러한 주장에는, 자아를 개인의 자기 해석이나 개인을 둘러싼 사회 세계와는 상관없이, 대상으로 놓고 연구할 수 있다는 가정이 들어 있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상 내가 이 책에서 개진하려고 하는 한 가지 주장은, 개인적인 주체나 인격체의 자기 해석과 분리해서는 자아를 충분하게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론, pp.12-13)

이러한 자아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1장 ‘자아, 사회, 일상생활’에선 자아 문제가 어떻게 사회학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살핀다. 엘리엇에 따르면, 20세기의 사회학 이론들은 자아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들을 제공했다. “나는 자아가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개념이라는 그러한 생각에 의문을 던지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또한 나는 개인적 주체성이란, 자아가 그것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행위 주체가 아니라, 문화의 의무 사항과 사회적 삶의 요구들을 개인이 내면화하고 그 과정에서 대응하는 방식의 산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개인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이 모든 사회학의 중심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아의 사회학은 친밀성과 사적 생활의 변동을 열심히 탐색하지만, 자아 경험의 내적 세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사회학적 자아 이론의 맹점은 자아의 비합리적인 욕망과 사회문화적 질서의 억압적 성격을 간과한다는 데 있다. 정신분석학이 문제 삼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학에서 말하는 단정하고 단단한 이성적 자아이다. 사회학적인 접근과는 달리 정신분석학은 자아를 무의식적인 억압과 환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허구적 구성물로 파악한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자아의 자율성과 고결성과 독립성이야말로 인간의 나르시시즘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장 ‘자아의 억압’에서는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된 무의식은 자아가 자기 이해와 자기 인식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프로이트의 생각은 다양한 문화 분석가와 사회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허버트 마르쿠제부터 슬라보예 지젝에 이르기까지 자아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급진적인 사회 비평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적 연구가 이룬 개념적인 성과와 한계를 모두 보여준다.

3장 ‘자아의 테크놀로지’의 주인공은 미셸 푸코. 그가 자아, 권력, 언어 혹은 담론의 분석에 기여한 바를 검토한다. 개인이 권력의 체계를 통해 자아와 개인적 주체성의 수준에서 자신을 가두어 놓는다는 사실과 그러한 권력의 체계를 밝혀내려는 푸코의 시도를 논의한다. 푸코는 자아가 어떤 권력기제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생산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에 의하면 의료 가부장들, 종교 사제들, 상담 치료사 등과 같이 테크놀로지를 가진 전문집단과 제도적 장치들은 자아의 전방위 감시체계이다. 이렇게 본다면 푸코에게 치료사(therapist)는 치료의 미명 아래 개인에 대한 지식과 고백을 얻어내는 정신의 강간범(the rapist)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 엘리엇은 푸코의 선정적인 주장과는 달리 자아가 사회 권력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4장 ‘자아, 섹슈얼리티, 젠더’에선 낸시 초도로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또한 젠더 정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전략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을 살펴보고 있다. 페미니스트들 중에서도 급진적 이론가들이라고 볼 수 있는 버틀러와 시지윅은 남성 중심적인 자아 이론에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도입함으로써 퀴어 정치성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엘리엇은 과격한 좌파 페미니스트들의 추상적 급진성이 오히려 반동적인 현실과 맞물리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탈근대성에 관한 논쟁을 다루는 5장 ‘탈근대적 자아’에서 저자는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자아성에 대한 오늘날의 경험에 정서적 활기를 불어넣으면서도 동시에 경험을 어지럽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범주로서의 자아 개념을 인정하는 것이 실천의 장을 여는 데 유효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아를 근대적이나 후기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이라고 하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체성들의 놀라운 혼합이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정신 상태와 자아 형태들은 종종 광적인 파괴와 폭력적 합리성에 사로잡힌 채로 계속된다. 전 세계에 걸친 인종적·민족적 갈등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아 정체성과 자아의 새로운 형식들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탈전통적이고 탈근대적인 방식들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완전히 탈근대적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근대적 사회 세계가 언뜻언뜻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회과학의 도전은, 달라진 사회적 환경이 지구를 휩쓰는 상황 속에서 탈근대적 자아, 혹은 자아들의 다원성과 다양성에 새로이 직면하는 것이다. (5장 탈근대적 자아, pp.235-236)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미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이 책은 자아라는 자칫 딱딱하고도 복잡하게 느껴질 법한 사회학적 개념을 대중들에게 흥미롭고도 유용한 성찰의 주제로 소개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주제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독자에 자아 및 자아 정체성과 관련된 최근의 사회학 및 문화 연구 분야의 이론 지형을 가늠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조지 허버트 미드, 허버트 블루머, 어빙 고프먼, 앤서니 기든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빌헬름 라이히,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미셸 푸코, 낸시 초도로우, 줄리아 크리스테바, 주디스 버틀러, 장 보드리야르, 브라이언 터너, 지그문트 바우만 등 엘리엇이 다양한 이론을 재단하는 잣대는, 독자가 엘리엇의 주제에 동의하는 만큼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이 책에서 저자의 논지에 동의했던 독자라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화가 일상의 차원에서 정치적인 관심사로 복귀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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