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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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한 대학의 남학생이 시위 도중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인(死因)은 심장막 내출혈,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무 살,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91학번 신입생으로 밝혀진다.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아직도 ‘강경대’라고 하는 그의 이름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가 강경대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말을 남기고 분신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이,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하는 사건이 이어진다. 5월 25일 퇴계로에서 성균관대 김귀정이 강경 진압 과정에서 질식사하고, 6월 8일 인천 삼미기공 노동자 이진희가 분신하며, 6월 15일 역시 인천의 택시 노동자 석광수가 분신하기까지, 불과 두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두 명의 대학생이 시위 도중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고, 그 사건의 앞뒤로 대학생과 고등학생, 가정주부,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려 열한 명이 분신을 하며,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한 명의 노동운동가가 의문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당시 시인 김지하는 그것을 ‘죽음의 굿판’이라고 일컬으며 학생운동진영을 비난하였고, 언론은 공식적으로 그 시절을 ‘분신정국’이라고 명명한다. 명칭이야 어찌 됐건,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러한 일련의 ‘죽음/주검’들이 갖는 의미를 사회적 차원에서 지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과 당혹감에서 쉽사리 헤어 나올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의 원인과 책임소재를 정당하게 규명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각자의 윤리와 정치적 입장을 따라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이 사회의 상징질서가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정체성, 그들의 정치적인 주체-위치를 통해 열사, 혁명가, 좌경-용공세력, 불온세력, 운동권, 민주주의자 등으로 호명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1970년생이자 김귀정의 대학 1년 후배로서 89학번인 소설가 김연수는 그때의 충격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나는 문득 1991년 5월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고 서울에서 전화를 받은 친구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거짓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었고, 우리는 패배하도록 프로그램돼 있었다. 그때의 일들이 나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김연수,「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창작론 - 썬더버드, 만투스, 바스, 끌로드 샬」,『문학사상』, 2005년 12월호)



어느 평론가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발생하는 심리적 기원이 바로 이 1991년 5월의 시공간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그의 신작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통해 91년 5월의 그 집단적인 죽음/주검들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소설가 김연수만의 가장 그다운 문학-윤리학적인 행위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된 1991년 나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어떤 확신을 가진 사람들, 스승 세대,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등 모든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며 “그러나 이번 소설을 통해 당시의 그런 생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계간『문학동네』에 2005년 겨울호부터 2007년 봄호까지 연재했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을 제목을 바꿔 출간한 이 소설은 예의 분신이 잇따랐던 1991년 5월의 소위 ‘분신정국’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그 이야기‘들’을 출발한다. 소설의 중심적인 화자는 모 대학의 총학 선전부 차장을 거쳐 얼떨결에 대학생 조직의 방북 예비대표로 베를린까지 가게 되는 ‘나’이다. 예컨대 “1991년5월에 한 일이라고는 최루탄이 터지는 길에서 정신없이 정민을 찾아 나섰다가 투쟁국장이 휘두른 쇠 파이프에 어깻죽지를 얻어맞은” 것 밖에 없는데도 방북 예비대표로 뽑혀 베를린까지 가게 된 ‘나’를 통해 거대한 역사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소한 이야기가 얼마나 차이날 수 있는가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공공의 상처로 간직하고 있는 보편적 역사, 기록된 대문자의 흔적에는 사실상 ‘실재적이며 참된’ 것이 휘발되어 있음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그의 ‘역사학’이 작품 전면에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김연수는 개인과 역사의 관계라는 문제틀 안에서 역사에 대한 어떤 ‘입장’의 문제 이전에 역사라는 담론 자체, 혹은 역사라는 담론을 구성하는 ‘욕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작가는 1991년 5월의 역사 한 가운데에 있었던 운동권 대학생 ‘나’와 ‘정민’의 사랑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서로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나’의 할아버지, 무주의 산골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 늘 세계여행을 꿈꾸었던 정민의 ‘외할머니’, 1964년 서울 시내 수류탄 투척 사건의 범인으로 몰렸다가 자살하게 되는 정민의 ‘삼촌’의 이야기들을 거쳐, 베를린에서 만나게 되는 ‘강시우’ 혹은 ‘이길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했던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까지, 그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 이야기들을 작품 속 인물들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들려준다(아니, 차라리 작품 속 인물들이 유령작가 김연수의 펜을 빌려 자신들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이 소설은 거대담론을 따라 기록된 서사인 공식적 역사가 아닌 불가능한 이해의 축적 가운데서 잉태되고 추억되는 개인의 사소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공식적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희생당한 개인들을 애도하는 문학적 윤리의 한 가능성을 현시하는 데 성공했다. 작가는 그들의 삶이 우리의 현실 안에 통합되는 행위, 그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우리의 가슴에 묻을 것인지에 관해 설명하기를 끝끝내 거절한다. 그들을 공식적인 역사의 이데올로기적 주인공으로 상징화하기를, 즉 평범한 운동권 학생들이나 민주화 운동가로 자랑스럽게 기념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대신에 거대 담론이라는 상징질서로 재현될 수 없는 탈소외된, 너무나 인간적이며 우연으로 가득 찬 그들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 이야기들이 접근하는 역사, 차라리 그 이야기가 반향하는 역사라 부를 수 있을 역설적인 뜻에서 불가능성으로서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소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역사는 가능하다. 다시 한 번 가능하다. 단, 이야기를 통해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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