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문명의 사막 혹은 테러의 향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지음, 서정은 옮김, 생각의 나무 (2007년 9월)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그는 대처 정권의 등장과 신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적ㆍ제도적 공세를 계기로 시작된 19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변화 속에서 좌파적(맑스주의적) 문학비평의 새로운 과제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을 직접 모범적으로 수행해온 이론가ㆍ비평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이후로 출간된 그의 일련의 저작들, 즉 『발터 벤야민: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1981), 『문학이론입문』(1983), 『비평의 기능』(1984), 그리고 『결을 거슬러서』(1986), 『미학의 이데올로기』(1990) 등은 변화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비평을 모색하기 위한 그의 일관된 작업의 산물이었다.

 

  특히 이글턴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부터 문학과 문학적 가치를 도덕적 가치의 지배로부터 분리시키되, 그것에 억압된 정치적인 차원을 되돌려줄 수 있는 정치적 문학비평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런 작업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학비평을 소극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폭로하고 파헤치는 데 주력하는 부정적(否定的) 차원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보다는 “지배 역사의 결을 거슬러 전통 가운데서 현재의 좌파적 이데올로기 투쟁에 쓸모가 있는 유산을 적극적으로 복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해석학(redemptive hermeneutics)”을 가동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다. 보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저작들인 『The Idea of Culture』(2000), 『우리 시대의 비극론』(2003), 『After Theory』(2003), 『The Meaning of Life』(2007) 등을 통해 우리는 그의 이러한 작업이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ㆍ11테러 6주년을 맞아 지난 9월에 번역 출간된 그의 2005년 저작인 『성스러운 테러』(원제: Holy Terror, The Meaning of Terrorism) 역시 과거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어떠한 개념 혹은 사상의 혁명적ㆍ정치적 ‘흔적’과 ‘편린’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현재의 맥락 속으로 불러와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요소 및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그 개념이나 사상이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하는 그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 텍스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테러 및 테러리즘의 형이상학적 차원의 계보학적 고찰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글턴 자신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최근에 그가 천착해온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연구로의 전회(轉回) 가운데서 나온 동시대적 비평작업의 성과물이다. 물론 국내에 소개된 이글턴의 전작(前作)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맑스주의자라 자처하는 이글턴이 유물론자답지 않게 왜 갑자기 형이상학 혹은 신학 연구의 방향으로 이론적 전회를 한 것인지 의아해할 것이다. 이글턴의 답변은 이렇다. “사탄이나 디오니소스, 죽음이나 악, 희생양과 악마, 숭고, 공포와 자유, 순교와 자살 등의 다분히 신학적이고 신화적인 개념들이 기존 맑스주의 정치학 담론의 유물론적인 개념들 못지않게 ‘테러’라고 하는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현상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글턴은 정치사상으로서 테러리즘이 프랑스혁명과 함께 나타난 근대의 발명품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전근대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the sacred)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이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하는 에우리피데스 희곡 『바쿠스(The Bacchae)』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이글턴의 해석에 따르자면 “측량할 수 없는 무의식적 활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무자비한 악의와 공격성의 소유자”이며, “(라캉-지젝의 용어로) 외설적 쾌락이라고 하는 섬뜩한 주이상스(jouissance)의 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이러한 최초의 테러리스트라는 디오니소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인물인 테베의 왕 펜테우스의 존재이다. 펜테우스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를 찾아와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흥청망청 숭배하도록 한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서 상식 밖의 폭력으로 이에 대응한다. 그는 디오니소스의 머리를 베고 쇠지레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죽음충동의 화신인 디오니소스가 타협을 제안했을 때도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감옥에 가둬버림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는 문화적 타자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다.

 

  바로 이러한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 서사에서 이글턴은 쾌락원칙 너머, 치명적 엑스터시의 영역에 존재하는 디오니소스(신성한 광기, 테러, 아나키, 리비도의 반란)가 펜테우스(합리성, 문명, 독재, 억압, 국가 테러리즘)의 외부적 타자가 아니라 바로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위험한 가능성으로서, 그로부터 배척당하고 거부당한 자아의 또 다른 중심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신화에 대한 해석은 현대의 일상화된 정치적 테러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이해하는 준거로 기능한다.

 

 이글턴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신성한 것 곧 성스러운 테러가 그 자체로서 양면적 속성을 가진 권력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을 창조하는 힘이자 죽음을 야기하는 힘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 제전으로부터 우리를 산산조각 내는 숭고함의 무서운 매혹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신학, 철학과 미학, 정신분석학과 정치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이글턴의 현란한 사유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역시 문명에 내재하는 신성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근대 후기에 이 신성한 힘은 무엇보다도 무의식과 죽음충동, 또 실재 등의 이름을 통해 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실재(the Real)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이야기는 결국 자기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괴물적 결여를 두려워하는 문명이 알 수 없고 기형적인 존재에게서 이 두려운 실재의 이미지를 발견한 뒤에 그를 자신의 문밖으로 내치려고 하는 시도들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충돌이 21세기의 벽두에 탈레반 출신과 텍사스 출신의 두 근본주의들 간의 충돌로 재연되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말마따나, 9ㆍ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은 우리의 환상의 공간을 산산조각 내버린 ‘실재’의 침략적 귀환이자 오늘날 디지털화된 제1세계와 ‘실재의 사막’인 제3세계를 경계 짓는 배경에 대한 공격으로서, 우리는 스펙터클로 실연된 CNN 뉴스채널의 비행기 폭격 영상과 마주함으로 드디어 ‘문명의 밤’ 혹은 ‘실재의 사막’에 발을 딛게 되었다 할 수도 있으리라.

 

  현대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쉬운 책이 결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시대 테러리즘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폭넓은 인문학적 해석을 기대하는 명민한 독자라면, 이 책에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일독을 권한다.

 

 

 

 

 

함께 읽을 만한 책:

○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 - 이방인과 희생양, 괴물과 유령, 신 등을 중심으로 타자성 개념에 대한 풍부한 철학적ㆍ비교문학적 고찰을 담고 있음.

 

○ 브루스 링컨, 『거룩한 테러』(돌베개, 2005) - 테러리즘 및 대(對) 테러전쟁에 내재하는 종교적 최대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 및 무의식적 폭력성에 관한 종교학적 연구를 담고 있음.

 

○ 슬라보예 지젝,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 원제는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9ㆍ11 테러에 관한 지젝의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진수를 접할 수 있음(단, 국역본의 경우 오역이 심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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