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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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소설”

인간은 “세계의 무대 속에서 바라보이는 존재”이다, 라고 말한 것은 라캉이었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결코 바라볼 수 없으며 그래서 또한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동안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계 속에는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며 나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매우 유쾌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건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사랑이나 헌신이라는 외피의 안쪽에서 들끓는 또 다른 욕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김윤영의 세 번째 소설집 『그린 핑거』에 실린 두 편의 단편 소설(「그린 핑거」, 「전망좋은 집」)과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여인」1~5)을 일컬음이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윤영이 상재한 두 권의 작품집(『루이뷔똥』, 『타잔』)에 담긴 소설들은 대부분 ‘행복에 관한 강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우울증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불행의 종합선물세트라 해도 좋을 생활고, 소통 불능, 단자화된 삶, 고독과 비애 등 온갖 불행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불행한 인생의 단면은 『그린 핑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제 작가는 우리를 행복/불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이중적 삶의 구조로 인도하는 타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문제 삼아 개개인의 욕망의 향배를 넘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교환구조를 투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렇게 자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만나고 어긋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삶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한 주체들의 진로에 대한 성찰을 정교한 서사적 틀 속에 잘 담아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소설집의 표제작인「그린 핑거」의 써니와 「전망 좋은 집」의 혜령은 모두 스위트 홈의 꿈 즉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간직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여성들이다.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성형수술로 그 콤플렉스를 극복해온 언청이 써니 아니 순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출산한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혜령이나, 아무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그 내면의 세계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결핍을 규정하고 또 그 결핍을 채우고자 욕망하는 불행한 영혼들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허나 우리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그 시선마저 없었다면 그녀들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녀들이 인지하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이 그녀들로 하여금 욕망을 촉발시켰고 또 그렇게 삶을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시선을 통해 시선 너머의 어떤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구성할 수 있었다. 김윤영의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역설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대상을 바라보듯이 대상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아는 것, 즉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의 시선이 나의 존재 자체를 구성할 수도 있음을 아는 인식의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오션 연애학」, 「너무 고결한 당신」, 「Heartbreaking Love」, 「초콜릿」, 「모네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1~5는 타인의 시선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수립했던 주체들이 그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오히려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인물이 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타인의 시선 너머로 주체가 상상하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인한 영원한 결핍이 주체의 욕망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욕망을 통해 김윤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야기에서 서술자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른 서술자에게 미처 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긋나 버린 두 남녀의 사랑 뒤에 감추어진(당사자들도 잘 몰랐던) 서로의 진실이 드러나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의 변화와 진화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삶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이야기는 맞는데 (기존의) 연애소설과는 좀 다르고, 여성의 자의식에 관한 소설이라고도 하지만, 소설 속 여성들의 자의식을 붙들어 놓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므로 그 시선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학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작가 말대로 다 집어치우고 그냥 낄낄거리면서 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유쾌하게 다 읽고 보니 가슴에 남은 건 인생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작가의 날카로운 메시지랄까.

그러나 저러나 어쨌건 결론은 이 가을에 경쾌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성찰의 여지를 남겨주는 김윤영의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에겐 ‘블루오션’의 독서임에 확실하다는 것.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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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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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국민이 다함께 읽고 한 자리 모여 세미나를 해야 할 책!”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년 8월)

 때로는 장황하게 서평을 쓰는 것마저 민망하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그저 “일단 읽어 봐라”, “반드시 읽어라”, “읽고 나서 얘기해보자”, 뭐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책이 가끔 있는 법이다.

 작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단연 그런 책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이 제기한 ‘청년실업’ 혹은 ‘청년백수’는 단 순히 20대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10대들을 입시라는 족쇄를 채워 인질로 잡아놓고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 간 경쟁을 벌이고 있는 ‘베틀 로얄’의 무한경쟁사회”이자, 그러한 “세대 간 경쟁의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자본이 취약한 20대를 윗세대(특히 386세대)가 악랄하게 착취하고 있는 사회”이며, “민주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름하에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독과점의 강화로 특징지어지는 승자독식사회”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전체적 모순 구조가 20대들에게 이르러 특수화된 사례가 바로 ‘88만원 세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은 결국 세대를 막론한 한국 사회 전체 구성원들을 향해 긴급히 토론을 요구하는 책이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아젠다(agender)’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올해 그 역할을 할 책이 바로 손낙구(http://blog.daum.net/bomnal3)의 『부동산 계급사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의미에서는 『88만원 세대』보다 더 보편적이고 그만큼 오래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그 핵심부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는 책이다. 다행히 책의 내용이나 구성은 그리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정말로 고등학생 수준의 독해 능력만 되어도 무난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쉽다고 그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이 책이 갖는 여러 가지 측면의 중요한 담론적 가치와 별개로, 지금까지 나온 많은 양의 부동산 관련 책들과 대조하여 특징적으로 구별되는 점을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 책이 부동산 투기의 문제를 경제사회학적 차원에서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그 실상을 정치사회학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니까 부동산 재테크의 비법 따위나 알려주겠다고 선전하는 수다한 책들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은 그 모든 이야기를 철저하게 통계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냈다. 부동산과 관련한 좌파적 혹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담론이야 계속 있어 왔지만 정작 부동산 문제가 ‘언제부터’ ․ ‘어떻게’ ․ ‘왜’ ․ ‘누구에 의해’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문제의 실체는 보다 정교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도덕적 비판으로만 그치고 말았던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그와 같은 기존 담론의 한계를 실증적인 자료와 통계를 무기삼아 한결 진일보된 방법론으로 돌파하고 있다.

 저자가 제기하는 한국사회 부동산 문제는 너무 빨리 오른다→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다→부동산 보유 여부 및 부동산가격 인상 여부에 따라 소득 및 재산 격차가 순식간에 심화된다→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사유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할 듯싶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부동산은 당대 한국 사회에서 계급적대 혹은 빈부격차의 주범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근본적 모순이 부동산에 있는 것이다. 부동산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이다. 당연히 이 부동산 소득 격차가 곧 계급 격차로 이어지고 있으며, 한번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은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게 됨에 계속 부자가 되고,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영원히 가난한 신세를 못 벗어난다. 부동산 소득 수준이 곧 계급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격차가 교육, 문화적 향유 수준의 차이를 넘어 건강 및 평균수명의 차이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 앞에서 독자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내 땅 내 집 내 맘대로 한다’는 논리는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는 물론이고 자본주의사회 안에서도 ‘돌연변이’에 가까울 정도로 극단적으로 비뚤어진 부동산관이라고. 이토록 천박하고 무례한 자본주의적 투기꾼의 궤변이라고나 할 억지 논리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의 극단적인 사유재산 제일주의, 정부의 주택정책, 부동산 학자와 언론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 수 십 년 동안 투기와 불로소득의 사유화를 비호하는 신념체계로 우리 사회 깊숙히 무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도 부동산 계급 카르텔은 끊임없이 부동산 신화를 불러들여 불로소득을 얻기 위한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런데 어떡하랴? 부동산 재산만 382억원(그 중 빌딩 재산이 무려 330억에 달하는)을 가졌다고 신고하신 분 그러니까 부동산 공직자 종합 1위를 차지하신 그 분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며, 집권여당의 의원들은 물론이고 청와대 비서진과 행정부 고위 공직자들 대다수가 부동산 투기로 그간의 부를 축적한 이들인데, 과연 부동산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2008년 초 현 정권의 첫 환경부 장관에 내정됐다가 땅 투기 의혹으로 사퇴한 박 모 교수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을 뿐 투기와는 상관없다”며 항변했다가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는데,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른다. 농사도 안 지으면서 농지를 사랑해서 땅을 사는 게 바로 투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진리를 말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현 시기 한국 사회의 위기와 고통에 관해 논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문마저 들 지경이다. 문득 올 한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쇠고기수입 반대 촛불문화제를 두고 ‘국민 MT’라고 한 어느 역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그에 빗대어 나는 이 책이 ‘국민MT’에 가져가 다함께 밤새워 읽고 ‘세미나’라도 해야 할 그런 책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세미나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꼭 좀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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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 당비의생각 1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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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정치에서 다시 현실의 문화로”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산책자(2008년 6월)
 

   

당대비평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흔히 당비라고 불렀던 이 잡지는 한국의 비판담론의 공간에서 꽤나 특이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단 우파적 성향의 잡지는 결코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숨겨진 야만과 모순을 읽어내는 시각이 너무나 불온했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좌파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 이들의 비평 대상에 바로 좌파 또는 진보진영이 단골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이 잡지는 여타의 다른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비평지가 다루지 못했던 신선한 기획들을 많이 선보였다.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기억의 정치학, 우리 안의 이분법, 세대 갈등, 한국 사회의 고통과 차별의 구조, 민주화체제의 이면, 한국 사회의 소수자들, 테러의 정치학 등등.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6월 말 당대비평 기획위원회의 이름으로 책이 새로 하나 나왔다. 책의 제목만 봐도 다분히 촛불집회를 의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라는 제목에 “민주화 20년, 민주주의는 누구의 이름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서동진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민주화 체제가 마감되고 난 지금 그 체제가 생각하고 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을 다양한 각도에서 되돌아보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해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쟁점들을 1부에서 검토한다. 예컨대 경제주의에 함몰된 기업형 사회의 등장(홍기빈, 「CEO 대통령, 주식회사 코리아」), 그 누구에게도 견제 받지 않은 채 사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 귀족들의 득세(홍세화, 「사회 귀족 체제와 촛불 광장」),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혹은 대표되는 새로운 여론형성 문화의 기저에 자리 잡은 ‘네티즌’들(이상길, 「인민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기러기 가족과 이주자 가족 혹은 동성 생활공동체, 반려동물 가족 등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야 할 가족 형태의 등장(임옥희, 「욕망의 민주화는 가족을 어떻게 변화시켰나」) 등을 차례로 살피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민주화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체제의 변화를 근본적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새로이 등장한 권력들에 대한 탐색과 함께 정치적 힘들이 작동하는 장소들에 대한 세밀한 관찰들도 돋보인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는, 그리하여 오히려 정치의 공간이 소멸되는 상황들(서동진, 「소송하는 사회, 불평하는 주체」), 국가가 보장해야 할 국민의 안전이 보험으로, 즉 개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되는 현실들(이택광, 「자본주의라는 공포물에서 살아남기」), 제도권의 순치로 실천적 교양의 자리를 잃어버린 지식인의 초상들(김원, 「대학 속의 지식인,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빈곤의 위협에 처한 이들에게 책임을 환원시키는 능동적 복지의 허상들(최예륜, 「생산적 복지에서 능동적 복지로」)을 차례로 접하면서 우리는 이 시대 빈곤한 정치적 삶의 형식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러한 민주화 이면에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통해 빚어지는 사회적 주체라고 하는 것들이 능동적인 시민이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역설하는 ‘21세기의 성공적인 인재’이든 결국엔 ‘신자유주의적 발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피지배자의 형상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섬뜩한 진실을 깨닫게 되는 것.

 

닫는 글로 실린 김진호의 글이 특히 압권인데, 지금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들의 저 축제가 어쩌면 사회적 배제 담론으로 표상되는 빈곤계층에 대한 사회적 학살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던지고 있기 때문. 시민사회의 주변부를 배회하고 있는, 오로지 외국의 학계에서 빌려온 언어를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인, 그래서 존재하고 있으나 전혀 만날 수 없고, 우리 주변에 엄연히 살아 있으나 단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과연 사회란 무엇이고 또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덧붙여 한 가지 생각해볼만한 것이 있다. 이 책을 만든 이들은 아마도 “광장의 문화”가 “현실의 정치”와 대립되는 그 무엇으로 상정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촛불집회는 문화적 축제의 수준을 넘어 그 자리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탄생시키고 이를 통해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까지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따라서 광장의 문화가 있고, 현실의 정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아가 광장이 정치가 되었고, 오히려 현실이 문화가 되어버린 세계 앞에서 우리는 질문의 방식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광장의 정치 즉 현실에 존재하지 못하던 정치를 창출한 그 축제의 공간이 현실의 문화의 한 단면은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제는 거의 다 꺼져버린 촛불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정치적 삶의 형식과 그것을 실행할 정치적 주체들의 형상을 발굴해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첫 번째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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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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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 ‘소설적 진실’의 용기

―손홍규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년 4월)











문학이론가로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첫 저서인『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상을 향한 욕망이 타자(혹은 대상) 자체가 아닌 타자와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중개자를 통해 갖게 된 ‘모방적’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소설적 진실’로, 반면에 욕망이 중개자에 대한 모방적이 아닌 자발적이라고 믿는 태도를 ‘낭만적 거짓’으로 명명했다. 이후의 지라르는 문학에서 인류학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갔고 사실 소설보다는 성서, 신화, 고대 비극, 인류학적 기록지 등을 통해 의식들의 심리적 투쟁인 모방욕망이 문명 형성의 원리가 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집단적 폭력이 동반되는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문화인류학자 혹은 신학자로 변모한 후기 지라르의 사유까지 염두에 둔다면, 초기에 그가 문학이론가로서 말한 ‘소설적 진실’의 궁극적 함의는 “주체의 모든 욕망이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중간의 매개자를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현시하”는 것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인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적 진실과 낭만적 거짓의 대립구도가 후에는 성서적 진실과 신화적 거짓의 대립구도로 대체되는 데서 확인되듯이, 사회적·집단적 폭력을 야기한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모방욕망과 그러한 모방욕망에서 기인한 폭력의 현실태로서 희생양 제의 즉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그가 말한 인간사의 문화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현은 지라르의 이론에 관해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묶어 그 핵심을 ‘폭력의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폭력의 구조』, 김현 문학전집 제10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소설적 진실’로서 폭력의 구조에 대해 궁금했지만 감히 지라르에게 묻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답해주는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에 출간된 손홍규의 두 번째 단편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10편의 소설들을 일컬음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누구인가? 자주 인용되는 프로필대로라면 그는 이런 소설가이다. “2001년에 등단해 소설집 『사람의 신화』와 장편 『귀신의 시대』를 출간하여, 공동체적인 삶이 파괴된 채 약육강식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폭력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으나 내면 깊이 변혁 의지를 품은 인간 군상을 희화화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해온 75년생의 젊은 소설가” 그런데 그와 동년배 어느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 세대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신형철, 「비인(非人)의 인간학, 신생(新生)의 윤리학」) 또 다른 어느 젊은 비평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홍규 소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젊음과 문학의 젊음(새로움)을 거의 등치시키는 관습적 사고, 그리고 과거 리얼리즘 미학의 계보로 환원시키고 싶어지는 정치적 무의식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김미정, 「비루함과 존엄 사이, 도약하는 반인간·비인간」).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 소설집에는 2005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발표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주옥같다. 길어봐야 40 페이지, 짧게는 30 페이지 내외의 소설들로만 엮었음에도 한 편씩 읽고 나면 어지간한 장편소설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묵직한 현실감과 삶에 대한 성찰의 중압감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야 열 편 모두를 상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제약 상 그럴 수는 없고, 필자가 보기에 이 소설집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판단되는「이무기 사냥꾼」을 중심으로 손홍규의 소설이 드러내는 ‘소설적 진실’의 의미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이무기 사냥꾼」에는 사면발이와 동거하며 일용잡부직을 전전하는 용태와, 밀입국자이면서 불법체류자인 알리가 등장한다. 알리는 파키스탄에 있을 때 죽은 척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경험이 있다. 알리가 ‘죽은 시늉’을 통해 캐나다 입국심사장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아파트 건설현장의 두둑한 일당을 챙기는 것을 목격한 용태는, 급기야 그 재주를 이용해서 함께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를 배제하는 악랄한 사회적 법망의 틈새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해가던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배신하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한편, 용태의 독백을 통해 알려지는 용태의 부모의 삶과 그 내력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 민중의 사회적 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용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누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을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여 마을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킨다.



그러나 기실 그것만이 배제와 폭력의 근거는 아니었다. 근친상간의 혐의는 표면적인 것이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증오심의 심층에는 용태의 부모들이 빨치산과 그 빨치산의 자식을 보호한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레드컴플렉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다시 이들이 가진 땅을 선망하는 공동체의 탐욕과 결합되어 매우 합리적인 그러나 잔혹한 폭력으로 자행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와 집단적 레드컴플렉스(그리고 이면의 물질적 탐욕)는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용태의 부모는 공동체의 위기와 붕괴를 막고 이들의 결속감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태의 아버지는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폭력을 견뎌내고, 어머니는 흙집에 시체처럼 누워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이것이 이들이 택한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용태 부모의 이야기와 알리의 이야기는 용태를 중심으로 매개된다. 그렇다면 “힘없고 나약한 것들은 일쑤 이처럼 죽은 체하게 마련”(73쪽)이라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저 “개새끼맨키로 납작 엎져서”(84쪽) 삶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되기’나 윤리정치학적 ‘탈주선’을 그리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배제보다 더한 담론적 폭력을 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손홍규의 인물들이 택한 반인간 혹은 비인간으로서의 동물 되기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강제된 조건 속에서 주체들이 선택한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손홍규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유형의 비정상적이고 비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공동체 밖의 공간 즉 “개인 외부에 있고, 강제적 힘을 부여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양식의 총체”로서 발명된 우리의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사회’가 작동시키는 은밀한 합리적 폭력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탐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손홍규의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즉 공동체들의 사이의 공간에서 살아 있으되 죽은 존재와 다름없는 이른바 ‘산주검’(un-dead)으로 남겨져 있는 이들을 증언하고, 그들을 그렇게 배제하고 침묵케 하는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추적하여 폭로하는 ‘소설적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쓸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물음이 들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들,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전복과 위반을 도모하는 ‘반(反)영웅’도 되지 못한,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다.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비유컨대 이것은 ‘카니발’은 커녕 차라리 ‘비참극(悲慘劇)’에 가까운 뉴-웨이브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김영찬, 「비루한 동물극장」, 『비평극장의 유령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네 삶의 엄혹한 진실인 것을. 폭력의 구조를 은폐하고 현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가득찬 요즘 소설들의 ‘낭만적 거짓’의 길을 거부하고, 비루한 존재들의 빈곤과 절망, 가학―피학, 침묵과 망각, 배제와 차별의 망상으로 버무려진 비참극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실재를 대면하는 ‘소설적 진실’을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테리 이글턴이 말했듯이, 비극이라고 하는 장르는 운명의 관철을 통해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존재의 엄엄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문학적 재현양식이다.



비극적 장르의 시각에서 무언가 비틀린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은 성찰을 통해 그 비틀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지만, 그 비틀림의 힘은 성찰의 과정을 비틀리게도 할 만큼 심층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설적 진실과 마주하는 소설가의 그런 비틀린 태도에는 역설적으로 성찰적인 측면과 정직의 측면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비틀린 상태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소설적 진실을 향한 비극적 사유의 용기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과 마주할 용기 있는 자만이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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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제 사라마구, 『눈 먼 자들의 도시』(Ensaio sobre a Cegueira)를 읽고

 





 


1. 모두 눈이 멀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진다. 달리던 차들이 일제히 멈춘다. 잠시 후 파란 불이 켜지고 다시 차들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던 차 한 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뒤쪽에 늘어선 차들은 미친 듯 경적을 울려대고, 급기야 일부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멈춰 선 차의 창문을 거세게 두드려댄다. 안에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한 마디, 아니 정확히 세 마디를 내뱉는다. “눈이 안 보여!”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눈이 멀어버린 최초의 그 남자로부터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실명에 빠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소위 “백색실명의 공포”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렇게 눈먼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격리시키기 만 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집단, 눈먼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폭력적인 군인들, 눈먼 사람들 각자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동물성의 행태들, 무기를 소유함으로써 수용소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범죄 집단, 도시에 넘쳐나는 약탈과 쓰레기들, 아내가 보고 있음에도 본능에 따라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마는 의사 등 자본주의 현대문명의 이면에 존재하던 야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눈 먼 자들의 도시”는 말 그대로 지옥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만이 눈이 멀지 않는다.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었는데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만일, 신이 있다면 그녀의 눈만 멀지 않은 것이 과연 신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그녀는 아직 볼 수 있어 운이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게 되어 가장 불행한 사람인가? 답은 본다는 것과 보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해명하는 데서 찾아질 것이다.

 

 


2. ‘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질문 꺼리로 던져준다.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이 어느 지역, 어느 국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보편적으로 해당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장소 등의 명칭을 보통명사로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러한 구체적 개별성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고,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를 보편적인 층위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인간들이 모두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 자체일 뿐이다. 도대체 인간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이 멀기 이전 상태 즉 인간이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의 문제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눈을 통해) 본다’는 것의 의미가 먼저 분석되지 않고서는 ‘눈이 멀어 볼 수 없다’라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간의 사회과학적 상식 혹은 철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다’는 것의 의미가 자연스럽고 생리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보는 행위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눈이 수행하는 시지각 이상의 것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내용들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일정한 ‘보는 방식’(way of seeing)을 규정한다. 따라서, 시각 또는 보는 방식이란 항상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학습되는 것이란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신체 기능의 일부인 시력의 감퇴 혹은 상실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적어도 눈이 멀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동안 지녀왔던 모든 사회적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이며, 어쩌면 현대사회 안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각의 능력 자체가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인을 일정한 방식으로 주체로 구성하는 사회적 과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는 것인데, 만일 그 능력이 상실된다고 한다면 개인은 더 이상 사회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체란 인간 개인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현실적 관계들 속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이상 자신의 눈에 지각되는 가시적 세계 안에서 자신을 시각적 주체로 위치시킬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주체화의 실패를 의미하며, 그 결과는 주체의 소외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인간이 시각의 능력을 통해 접하는 가시적 세계 속에서 주체 위치란 주체가 가시적 대상들을 바라볼 때 획득되는 위치이다. 이 위치를 많은 철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시점’(the point of view)로 정의해 왔는데, 시각이 사회 문화적으로 매개되고 주조된다는 것은 특정한 시점이 개인에게 해당되고 이 시점에서 가시적 대상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개인이 ‘보는 주체’(the seeing subject)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는 행위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며 가시적 세계 속에서 ‘보는 주체’를 구성한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시각의 정치학적 견지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의 도시가 처한 위기와 혼란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회의 지배적이고 당연시된 ‘보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는가를 문제제기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가 특정한 방식으로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듯이, 보는 방식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해왔음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을 상실한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서 있었던 모든 주체의 기반을 상실했던 것이며, 이것은 육체적 차원의 죽음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서 주체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와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이 “두려움이 실명의 원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이 두려움은 지금까지 소유해 온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본다는 것은 항상 “~을 본다”는 것이므로, 그 대상을 필연적으로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제 대상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시각을 통해 대상의 직접적 소유를 확신해왔던 인간은 그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과 같은 충격을 겪을 수밖에 없다. 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안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다시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함은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자본 및 상품)에 대한 사적 소유는 필수불가결의 기본적인 생존 양식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와 자신들이 소유한 물질의 허구적 가치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하게끔 의식화해왔다. 맑스주의자들은 바로 그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눈이 먼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동안 인간이 사회 속에서 주체를 형성하고 타자 혹은 대상과의 관계를 형성해왔던 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3. ‘인간’이란 무엇인가?

 


시각을 상실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소유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조건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주체화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인간화의 길의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둠은 물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지만 어둠 속에 갇힌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난도질하는데, 과연 인간은 자신들 앞에 닥친 이 어둠의 백색 공포를 이겨내고 인간으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소설의 거의 끝부분에서 나오는 장면인 베란다에서 “세 여인, 세상에 처음 왔을 때처럼 벌거벗은 세 여인은 마치 미친 것 같이” 목욕하는 장면은 시각의 능력을 상실한 이후에 인간이 이제 새로운 의미와 조건에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에덴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껏 갖고 있었던 모든 때를 씻어 내며 다른 차원과 다른 조건에서 새롭게 인간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의 상실 이후에 그리고 소유하고 있던 것의 부재를 경험한 이후에도 과연 인간은 인간일 수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물론 지극히 회의적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이 멀고 나서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사람인 의사의 아내였고, 그녀는 이제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지 않는 진짜 눈 먼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본다는 것은 결국 시각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다시 말해 대상을 지배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보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 사물과 타인 그리고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비자발적으로 눈이 멀었을 때, 유일하게 스스로 눈이 멀어버렸던 의사의 아내만이 이 새로운 차원의 시각 능력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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