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손홍규, ‘소설적 진실’의 용기

―손홍규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2008년 4월)











문학이론가로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첫 저서인『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상을 향한 욕망이 타자(혹은 대상) 자체가 아닌 타자와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중개자를 통해 갖게 된 ‘모방적’ 성질의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소설적 진실’로, 반면에 욕망이 중개자에 대한 모방적이 아닌 자발적이라고 믿는 태도를 ‘낭만적 거짓’으로 명명했다. 이후의 지라르는 문학에서 인류학으로 그 관심을 이동해갔고 사실 소설보다는 성서, 신화, 고대 비극, 인류학적 기록지 등을 통해 의식들의 심리적 투쟁인 모방욕망이 문명 형성의 원리가 되는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집단적 폭력이 동반되는 것을 발견한다.



적어도 문화인류학자 혹은 신학자로 변모한 후기 지라르의 사유까지 염두에 둔다면, 초기에 그가 문학이론가로서 말한 ‘소설적 진실’의 궁극적 함의는 “주체의 모든 욕망이 대상 그 자체가 아닌 중간의 매개자를 모방하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현시하”는 것을 넘어선 보다 복합적인 층위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적 진실과 낭만적 거짓의 대립구도가 후에는 성서적 진실과 신화적 거짓의 대립구도로 대체되는 데서 확인되듯이, 사회적·집단적 폭력을 야기한 잠재적 원천으로서의 모방욕망과 그러한 모방욕망에서 기인한 폭력의 현실태로서 희생양 제의 즉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그가 말한 인간사의 문화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찍이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인 김현은 지라르의 이론에 관해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묶어 그 핵심을 ‘폭력의 구조’라고 말한 바 있다(『폭력의 구조』, 김현 문학전집 제10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항상 ‘소설적 진실’로서 폭력의 구조에 대해 궁금했지만 감히 지라르에게 묻지 못했던 것들을 대신 답해주는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에 출간된 손홍규의 두 번째 단편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10편의 소설들을 일컬음이다.



소설가 손홍규는 누구인가? 자주 인용되는 프로필대로라면 그는 이런 소설가이다. “2001년에 등단해 소설집 『사람의 신화』와 장편 『귀신의 시대』를 출간하여, 공동체적인 삶이 파괴된 채 약육강식의 원칙만이 존재하는 폭력적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으나 내면 깊이 변혁 의지를 품은 인간 군상을 희화화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을 발표해온 75년생의 젊은 소설가” 그런데 그와 동년배 어느 비평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 세대가 아닌 것만 같습니다.”(신형철, 「비인(非人)의 인간학, 신생(新生)의 윤리학」) 또 다른 어느 젊은 비평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손홍규 소설을 잘 읽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젊음과 문학의 젊음(새로움)을 거의 등치시키는 관습적 사고, 그리고 과거 리얼리즘 미학의 계보로 환원시키고 싶어지는 정치적 무의식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김미정, 「비루함과 존엄 사이, 도약하는 반인간·비인간」).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 소설집에는 2005년부터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발표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주옥같다. 길어봐야 40 페이지, 짧게는 30 페이지 내외의 소설들로만 엮었음에도 한 편씩 읽고 나면 어지간한 장편소설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묵직한 현실감과 삶에 대한 성찰의 중압감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야 열 편 모두를 상세히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제약 상 그럴 수는 없고, 필자가 보기에 이 소설집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고 판단되는「이무기 사냥꾼」을 중심으로 손홍규의 소설이 드러내는 ‘소설적 진실’의 의미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이무기 사냥꾼」에는 사면발이와 동거하며 일용잡부직을 전전하는 용태와, 밀입국자이면서 불법체류자인 알리가 등장한다. 알리는 파키스탄에 있을 때 죽은 척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던 경험이 있다. 알리가 ‘죽은 시늉’을 통해 캐나다 입국심사장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아파트 건설현장의 두둑한 일당을 챙기는 것을 목격한 용태는, 급기야 그 재주를 이용해서 함께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를 배제하는 악랄한 사회적 법망의 틈새를 이용하여 불법으로 돈을 버는 일을 해가던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배신하는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한편, 용태의 독백을 통해 알려지는 용태의 부모의 삶과 그 내력은 그야말로 우리 시대 민중의 사회적 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용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누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그들을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여 마을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킨다.



그러나 기실 그것만이 배제와 폭력의 근거는 아니었다. 근친상간의 혐의는 표면적인 것이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증오심의 심층에는 용태의 부모들이 빨치산과 그 빨치산의 자식을 보호한 이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레드컴플렉스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대감은 다시 이들이 가진 땅을 선망하는 공동체의 탐욕과 결합되어 매우 합리적인 그러나 잔혹한 폭력으로 자행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와 집단적 레드컴플렉스(그리고 이면의 물질적 탐욕)는 ‘상피붙은 자식’이라는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용태의 부모는 공동체의 위기와 붕괴를 막고 이들의 결속감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태의 아버지는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폭력을 견뎌내고, 어머니는 흙집에 시체처럼 누워 말없이 눈물만 흘린다. 이것이 이들이 택한 그들만의 생존법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용태 부모의 이야기와 알리의 이야기는 용태를 중심으로 매개된다. 그렇다면 “힘없고 나약한 것들은 일쑤 이처럼 죽은 체하게 마련”(73쪽)이라지만, 살아남기 위해 그저 “개새끼맨키로 납작 엎져서”(84쪽) 삶을 견뎌낼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이들이 자발적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되기’나 윤리정치학적 ‘탈주선’을 그리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 전망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배제보다 더한 담론적 폭력을 가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손홍규의 인물들이 택한 반인간 혹은 비인간으로서의 동물 되기는 사회적 폭력에 의해 강제된 조건 속에서 주체들이 선택한 불가피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손홍규의 소설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유형의 비정상적이고 비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공동체 밖의 공간 즉 “개인 외부에 있고, 강제적 힘을 부여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감정양식의 총체”로서 발명된 우리의 ‘사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사회’가 작동시키는 은밀한 합리적 폭력의 기원과 메커니즘을 탐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소설이다.



손홍규의 소설집 『봉섭이 가라사대』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들은 모든 공동체들의 바깥이라고 할 수 있는, 즉 공동체들의 사이의 공간에서 살아 있으되 죽은 존재와 다름없는 이른바 ‘산주검’(un-dead)으로 남겨져 있는 이들을 증언하고, 그들을 그렇게 배제하고 침묵케 하는 사회적 폭력의 메커니즘을 추적하여 폭로하는 ‘소설적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쓸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물음이 들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들, 부조리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전복과 위반을 도모하는 ‘반(反)영웅’도 되지 못한,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다. 어느 비평가의 지적대로 비유컨대 이것은 ‘카니발’은 커녕 차라리 ‘비참극(悲慘劇)’에 가까운 뉴-웨이브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야 할 것이다(김영찬, 「비루한 동물극장」, 『비평극장의 유령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우리네 삶의 엄혹한 진실인 것을. 폭력의 구조를 은폐하고 현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가득찬 요즘 소설들의 ‘낭만적 거짓’의 길을 거부하고, 비루한 존재들의 빈곤과 절망, 가학―피학, 침묵과 망각, 배제와 차별의 망상으로 버무려진 비참극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실재를 대면하는 ‘소설적 진실’을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테리 이글턴이 말했듯이, 비극이라고 하는 장르는 운명의 관철을 통해서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밖에 존재하는, 존재의 엄엄한 힘을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문학적 재현양식이다.



비극적 장르의 시각에서 무언가 비틀린 상태를 성찰한다는 것은 성찰을 통해 그 비틀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지만, 그 비틀림의 힘은 성찰의 과정을 비틀리게도 할 만큼 심층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소설적 진실과 마주하는 소설가의 그런 비틀린 태도에는 역설적으로 성찰적인 측면과 정직의 측면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비틀린 상태를 정직하게 성찰하는 소설적 진실을 향한 비극적 사유의 용기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진실과 마주할 용기 있는 자만이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 준비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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