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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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소설”

인간은 “세계의 무대 속에서 바라보이는 존재”이다, 라고 말한 것은 라캉이었다.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결코 바라볼 수 없으며 그래서 또한 나의 주체를 형성하는 동안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 속에 존재하는 ‘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계 속에는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나의 바깥에 존재하며 나의 존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매우 유쾌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건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사랑이나 헌신이라는 외피의 안쪽에서 들끓는 또 다른 욕망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김윤영의 세 번째 소설집 『그린 핑거』에 실린 두 편의 단편 소설(「그린 핑거」, 「전망좋은 집」)과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여인」1~5)을 일컬음이다.

지금까지 소설가 김윤영이 상재한 두 권의 작품집(『루이뷔똥』, 『타잔』)에 담긴 소설들은 대부분 ‘행복에 관한 강박’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우울증 환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여기에는 불행의 종합선물세트라 해도 좋을 생활고, 소통 불능, 단자화된 삶, 고독과 비애 등 온갖 불행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불행한 인생의 단면은 『그린 핑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이제 작가는 우리를 행복/불행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이중적 삶의 구조로 인도하는 타인의 시선을 정면으로 문제 삼아 개개인의 욕망의 향배를 넘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교환구조를 투시하고 있다. 나아가 그렇게 자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만나고 어긋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삶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한 주체들의 진로에 대한 성찰을 정교한 서사적 틀 속에 잘 담아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소설집의 표제작인「그린 핑거」의 써니와 「전망 좋은 집」의 혜령은 모두 스위트 홈의 꿈 즉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간직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하는 여성들이다. 선천성 기형을 가지고 태어나 성형수술로 그 콤플렉스를 극복해온 언청이 써니 아니 순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출산한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혜령이나, 아무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어도 여전히 그 내면의 세계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결핍을 규정하고 또 그 결핍을 채우고자 욕망하는 불행한 영혼들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허나 우리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그 시선마저 없었다면 그녀들의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그녀들이 인지하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이 그녀들로 하여금 욕망을 촉발시켰고 또 그렇게 삶을 구성하고 조율할 수 있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시선을 통해 시선 너머의 어떤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선으로 인해 자신을 욕망의 주체로 구성할 수 있었다. 김윤영의 소설이 드러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역설적인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대상을 바라보듯이 대상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아는 것, 즉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의 존재를 인식하며 그의 시선이 나의 존재 자체를 구성할 수도 있음을 아는 인식의 차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오션 연애학」, 「너무 고결한 당신」, 「Heartbreaking Love」, 「초콜릿」, 「모네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연작소설「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1~5는 타인의 시선 가운데 자신의 자아를 수립했던 주체들이 그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오히려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인물이 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타인의 시선 너머로 주체가 상상하는 채워질 수 없는 어떤 대상으로 인한 영원한 결핍이 주체의 욕망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욕망을 통해 김윤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야기에서 서술자에게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른 서술자에게 미처 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음 이야기에서는 어긋나 버린 두 남녀의 사랑 뒤에 감추어진(당사자들도 잘 몰랐던) 서로의 진실이 드러나는 식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의 변화와 진화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삶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이야기는 맞는데 (기존의) 연애소설과는 좀 다르고, 여성의 자의식에 관한 소설이라고도 하지만, 소설 속 여성들의 자의식을 붙들어 놓는 것이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므로 그 시선의 이데올로기를 사회학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작가 말대로 다 집어치우고 그냥 낄낄거리면서 읽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유쾌하게 다 읽고 보니 가슴에 남은 건 인생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작가의 날카로운 메시지랄까.

그러나 저러나 어쨌건 결론은 이 가을에 경쾌하게 읽을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성찰의 여지를 남겨주는 김윤영의 소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에겐 ‘블루오션’의 독서임에 확실하다는 것.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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