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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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용이 스티븐맥 퀸 주연의 1973년도작 '빠삐용'을 연상하게 하는 이유는 단지 나비를 뜻하는 동일한 이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탈출을 위한 부단한 노력을 바라보는 느낌이 비슷해서인지 모른겠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번데기 외피를 벗어버리고 저 높은 창공으로 도약하는 나비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이 책에서나 그 상징적 의미를 같은 연장선상에서 공유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경로로 유입된 지구멸망설을 들으면서 지내고 있다. 일찌기 1980년대초에 발생한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같은 치명적 바이러스부터 시작된 지구 멸망 시나리오는 영화 '딥임팩트'나 '아마게돈'과 같은 영화의 소재였던 운석 충돌은 이미 백악기말 공룡들은 멸망시킨 바가 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투모로우'는 지금도 그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 환경의 파괴를 예견하고 있다.

파피용은 다양한 지구 멸망의 위험요소 중 어떤 것때문에 지구의 멸망(적확하게는 인류의 멸망)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지 않는다. 단지 그 결정적 시간에 앞서서 '마지막 희망'프로젝트는 실행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류가 어떻게 종족 번식의 종말을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이 작품의 주제가 담겨 있다.

작품은 발명가 이브, 억만장자 맥 나마라, 생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바이스, 항해 전문가 말로리가 지구를 탈출하게 되는데 사용 될 미래형 방주의 기획자며 실무자로 14만 4천명의 지구인과 더불어 지구를 대신 할 미지의 행성을 향해 1252년 동안 20조 킬로미터를 여행하게 되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드리앵, 엘리자베트가 미래 우리 인류의 아담과 이브인지는 끝까지 읽는 독자에 남겨진 수수께끼지만 말이다.

인류의 종족 보전 능력은 가장 하등한 세균에서 부터, 바퀴벌레 같은 곤충, 쥐와 같은 설치류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났다고 비교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특히 다른 동물들과 차별화된 진화된 뇌에서 비롯된 물질 문명과 풍요로운 문화 또한 기나긴 우주 범선의 여행 과정에서 이렇다할 충분한 역할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인간의 내재된 욕망을 실타래가 거칠게 엮어지는 과정에서 권력 투쟁과 폭력 등 인간의 이성적 제어 능력은 그 한계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들만 발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피용이라는 작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인류의 희망은 고민하는 자의 실천에 있다. 고민은 고민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안과 해결책을 모색하고 극복을 위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 바로 이 문제 의식이 우리 인류가 멸망이라는 절벽끝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가 느낄 종족의 단점을 무엇을 통해서 극복해 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방주에 탈 수 있었던 수 많은 사람들을 후세 인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으로 승선시켰다 하더라도 다양한 변수로 인해 어떤 요인이 선택 될 지 모르는 진화처럼 인간의 지성이 인류 보완 계획의 실마리를 어떻게 찾아 나갈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처럼 지구 탈출을 하지 않기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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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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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뇌가 하나도 차이가 없다. 단지 그는 우리가 습관처럼 사용하는 사고의 진행 방식을 거부할 뿐이다. 창의적 발상은 누구에게나 섬광처럼 나타나지만 그것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그 차원의 문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나무는 장편을 쓰기 위한 긴 호흡에서 오는 압박감을 짧은 호흡으로 일정 부분 풀어 버릴려는 작가의 자위적 창작물이다. 하지만 결코 그의 역량이 입에 발린 사탕처럼 얕은 수준으로 표출되는 작품을 결코 아니다. 창작의 시작은 아주 가벼운 생활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는 그러한 하나 하나의 경험을 단순하게 흘려 버리지 않는다. 


아기와 성인이 다 똑같은 생명의 가치를 인정 받듯이 단편과 장편은 큰 차이가 없다. 단편은 언제든 장편으로 진화 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장편 중에는 오히려 단편으로 구성해야 더 탄력적인 이야기로 풀 수 있는 작품이 있다. 작가는 다분히 후자에 해당하는 소재들을 모아서 단편 모음집 나무를 완성했다. 물론 이중에는 장편으로 발전시킬 만한 것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이 단편으로 짧고 굵은 감동을 안겨주는 편이 더 좋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일찌기 개미라는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낯설게 보기'라는 발상의 전환을 일깨워 준바 있다. 작품 나무에서도 우리는 그의 관조적 외계 시작을 느낄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문득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지만 그는 끝에서 드러나지는 반전을 통해서 각각의 소재가 가지고 있는 생뚱맞음을 결코 게으른 자의 공상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생각의 관성은 우리들을 습관의 동물로 쉽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정작 중요시 해야 할 가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게 만들게 한다. 작가는 그러한 부분을 매우 아쉬워 했을 것이다. 그가 가지는 궁극의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딱히 정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그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망각해 가는 창의적 상상력이라는 샘을 마르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샘의 물은 자꾸 퍼낼수록 더 맑고 많이 쏟아나지 않는가? 그 노력의 결실은 결국 독자가 짊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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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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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은 바다라는 광장으로 갔다. 그가 맺은 결론의 희비극의 구분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고통받던 인간의 영혼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 선택할 수 없는 불가항력보다는 그 어느 쪽에서도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낙오자의 모습으로 제 3국을 향하지만 그 곳도 결국 텅빈 광장일 뿐이였다.


광장은 인간들에게 여유를 가질 만한 심적 공간이 되어 주었다. 같은 색깔을 지닌 이슈의 물결로 가득 찰 때도 텅빈 그곳을 가로 지르는 바람소리가 결코 의미없다고 못박지 못하는 안식의 장소였음을 이명준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격변하는 한국 현대사의 모습은 마치 배 후미의 물결과도 같아 흰 구름과 같은 깊은 물고랑을 파내지만 곧 사라지며,  결국 다시는 볼 수 없는 물보라와 같다는 사실은 진실한 이데롤로기도, 사랑도 모두 잃은 자의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심각한 암시를 주고 있다.


이명준은 최후로 두 갈매기를 따라 갔다. 끝을 위함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 위해 그는 바다라는 우주의 자궁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역사 전체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없이 내리는 눈처럼 무의식 중에 이루어질 희디 흰 세상으로의 변환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


광장에 함께 갔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광장으로 각자 사라져 갔다. 나도 분명 그중에 한명이 될 때, 광장은 광장이전의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그곳은 초월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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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문예마당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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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전통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무엇이 가능한 것일까? 왜 여성은 피해자로만, 남성은 가해자로만 분류되어야만 하는 비극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일까? 작가 공지영의 이 작품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끌어 낸 책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 모순을 공감케하여 해답을 유도해 낼 뿐이다. 결국은 영원히 다가설 수 없는 금단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인지도 모르며, 진실한 해답은 없는 질문으로 잊혀져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이 아닌 인간이라는 공통의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문제이며, 바로 나의 문제인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혜완, 경혜처럼 각기 다른 개성의 여인들은 바로 나의 어머니의 모습이며, 내 여동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성적 차별에 따른 불평등의 차원을 극복하려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여성만의 출산의 고통만큼이나 필요악처럼 작용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성의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남성은 결코 적의 위치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큰 적은 바로 여성 자신이며, 그 내면의 세계에서 움추려사는 기생충같은 자기암시인지도 모른다. 여성 스스로는 그 적에 대해서 잊고 지내지만 언제나 어디에서나 살아 움직이며 결정적인 치명타를 안겨 주고는 슬그러미 그 모습을 어두운 곳으로 감춘다는 것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


특히 어머니라는 지위에 오른 여성이 그들의 딸에게 하는 거의 무의식적인 성 역할 교육을 대물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남성은 아주 위험한 공범의 역할을 꾸준히 행하는 불청객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여성 스스로의 해방은 그들 스스로 주체자라는 자각과 더불어서 그들의 협력자인 남성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발생할 수 있다.


신은 남성과 여성을 만드셨다. 그들은 원래 하나였으며, 언제나처럼 서로가 하나되기를 염원하고 있다. 사회의 구조가운데 움튼 거미줄을 제거하듯이 우리는 공동으로 사회의 성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그길만이 최소한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희생될 수 밖에 없는 여성을 만들지 않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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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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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난다. 좋은 글도 그렇다. 한 번 또 한 번 자꾸 읽을 때 마다 활자들이 사탕처럼 내 영혼에 녹아내리는 경우가 있다. 이 작품도 그렇지 않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흔히들 종교의 타성에 빠져들고 나면 신앙 측면에서 매우 보수적이고 비협조적인 측면이 타 종교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부각된다고들 한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한 진리에 대한 탐구 방법에 있어서 다양하다는 차이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마치 산 정산은 한 곳 뿐이지만 그 곳에 이르는 길이 각양각색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절벽을 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자비는 어느 정도 추월적인 경우를 규정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행위로 인한 해탈이냐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냐의 차이라고나 할까?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희생, 곧 내 이웃에 대한 헌신과 같이 뿌리까지도 내어 주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묵언의 진리가 내포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날 때 무엇을 쥐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살아가면서도 마찮가지다. 단지 내 것인양 빌려다 쓰고는 죽을 때 되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소유는 그래서 더욱 자유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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