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심리학 -하
메리 조 메도우 / 민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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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심리학에 대해서 이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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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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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제안으로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게임을 한 적이 있다. 우선 분단별로 선생님께서 미리 메모하신 글을 옆사람에게, 옆사람은 뒷사람에게 귓속말로 내용을 전달해서 마지막으로 발표하는 하는 사람의 말이 메모 내용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가리는 게임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귓속말 전달 게임은 박장대소하는 결과만 빚어 냈다.  

1분단 1번. 어제 최근 유행하는 감기를 걱정해서 철수 엄마는 아들에게 감기 예방 접종을 시켰다.
1분단 2번. 어제 유행한 감기를 걱정하는 철수 엄마가 아들을 감기 예방 접종을 시켰다.
1분단 3번. 요즘 유행하는 감기에 걸린 철수 엄마는 예방 접종을 받았다.
1분단 4번. 유행 감기에 걸린 철수 엄마가 예방 접종을 받아도 아팠다.
1분단 5번. 감기에 걸린 철수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
1분단 6번. 감기로 아픈 철수 엄마가 병원에서 수술했다.
1분단 7번. 감기 걸린 철수 엄마가 병원에서 죽었다.
 
감기 예방 접종 받는 철수에서 시작해서 철수 엄마가 죽는 것으로 끝났다. 아이스크림이 걸린 게임이여서 장난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분단별 최종 발표는 위 내용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핵심 용어는 유지하면서 계속된 내용 전달과정에서 기억의 한계로  각색되기 시작하면서 본질과는 아주 먼 결론에 이르렀다.

성서라 하더라도 이러한 변성 단계를 생략했을 것으로 믿고 있는 신자도 있을 것이다. 일명 '성경 축자영감설'에 깊이 빠져 있는 신도들은 이미 아무런 회의없이 강요 받은 신앙적 세뇌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마치 Y 염색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여자에게 아들 못났는다고 구박하던 시어머니 꼴이지 않은가?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성서의 구절 하나 하나를 자세히 들어다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현이 쓰여질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등장 인물의 심리적 변화 등 성서의 행간을 읽어 낼 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번 믿으면 그 맹신을 좀처럼 깨지 못하는 것처럼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계속되는 법이다. 신앙에 있어서는 그래서 중용의 자세가 중요하다.

책은 붉은 색으로 인용된 성서 귀절에 뒤이어 저자 자신만의 간결하면서도 핵심은 놓지지 않고 본질을 꿰둟고 있는 글로 구성되어 있다. 신의 모습으로 경외하게 하여 추상적인 실재로 여겨지는 예수를 오직 인간의 번뇌와 갈등 속에서도 하늘의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는 사람 냄새나는 존재로 우리의 의식에서 다시 부활시킨다.

비전공자의 글이라서 글의 품격과 질이 떨어 질 것이라고 미리 단정지을 사람이 있다면 미리 경고하지만 이 책을 절대 읽지 마시기를... 그런 편견에 익숙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아집의 체에 걸려서 읽게 되기 때문에 괜히 주변에 부정적인 평만 떠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서를 머리로 읽지않고 마음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필독을 권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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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2
김호경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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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적지 않은 교파에서는 성서에 대하여 일명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고 있다. 성서의 모든 내용과 표현은 신께서 인간의 손을 빌려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가감할 것없이 완전한 것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경전의 절대적인 엄숙성이 지배하는 교회에서 성서에 대한 괜한 딴지나 토시 하나 달수 있는 신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금기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성서의 형성 과정은 우리가 믿어 왔던 '축자영감설'과는 분명 일정 부분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신약성서는 주후 50년에서 150년 사이에 편찬되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까지 원본은 물론 최초 사본 또한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다. 알렉산드리아의 70인역 성서나 중세의 불가타 성서, 에라스무스 편찬 성서 또는 루터의 독역 성서 등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서는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목적으로 발간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이미 입증되어 있다.  본서의 출발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성서는 다양하며 각각의 성서에는 그 시대적 배경과 사상이 녹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특히 성서에 대한 해석이 중세 시기까지 특권층에 의해 독점되었다가 금속활자 시대를 맞이 하여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 설 수 있게 되었는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사건은 절대적 시간 개념인 크로노스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상대적 시간 개념인 카이로스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유의미적 해석은 주후 2000년이 넘는 오늘 이시간까지도 우리가 성서에서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활용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생명력을 얻게 해준다. 구약성서의 규범적 가치관은 신약성서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정의내려 진다. 우리가 만약 구 질서에 여전히 편승해 있다면 인간의 옷을 입고 온 성서를 더욱 초라한 알몸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례할 것이다. 성서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서는 그래서 작지만 두툼한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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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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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그 옛날 유럽 중세시대였다면 오강남 교수는 돌에 맞어 시신 위로 돌무덤이 생겼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가 아직 개발도상국이라는 닉네임이 항상 따라 다니던 70~80년대 개신교 부흥기 때 였더라도 복날의 개처럼 잡혀 질질 끌려다닐 정도의 파격적인 책 제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유연한 신앙심이 부족한 시대에 원로 비교종교학자는 우리게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했을까? 여기에는 어쩌면 '예수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은 잘못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라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답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 부는 맹목적인 신앙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국인들의 사회심리학적 기질 중에 하나로 지적되는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 입장론을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에서 감성은 성화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에 걸쳐 진일보한 이성의 기능은 우리를 더이상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과학적 세계관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믿음 방식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는 분명히 이성의 잣대로 제단되어져야 한다.

 

2 부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대한 경계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성경 저자들이 성령의 감화되어 오탈자 없이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축자영감설'은 특히 외국어 번역가들에게는 아주 어처구니 없는 맹신 중에 맹신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바벨탑 파괴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언어 단일성의 파괴는 오늘까지도 무수히 많은 언어로 퍼지고 있다. 국가와 민족간의 지적 교류에 하나인 번역 과정을 들어다 보자. 그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빠질 수 밖에 없는 번역상의 오류를 늘 존재한다. 성경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성경에 대한 옳바른 이해는 결코 오탈자가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을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느냐 하는 진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부는 우리가 은연중에 믿고 있는 잘못된 신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실제적 다신론, 실제적 무신론, 부족신관, 율법주의적 신관, 조건부 신관 등 각 개인의 주관성이 녹아 있는 신념에 따라서 얼마나 변질된 신관을 갖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 라고 기도 중에 많이 부르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성을 결정 지을 수 없는 신에게 과연 걸맞는 호칭인지 분명히 따져보고 넘어갈 문제다.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서 한 때 '불가지론'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었다. 개념이 가지는 초월성을 생각한다면 신은 분명 언어로 표현되어질 존재도 아니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 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깊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신은 증명 되어져야만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것은 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았다.

 

4 부는 이 책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과 편견을 하나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원래는 다른 진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종교는 오랜 시간을 걸쳐 오는 동안 그 시대의 가치에 따라서 다양한 변화를 겪어 온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가 해당 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종교가 갖는 원형의 가치가 손상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독학으로 공부해서 믿고 싶은 종교를 선택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도제교육처럼 선경험자가 얘기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기독교의 목사나 사제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이야기는 신자들에게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 회의적 자세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언제나 의심하고 그 의심의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설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5 부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어느 시대 어떤 종교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심리적, 사회적 기능이 작용하고 있다. 종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충족시키면서도 사회적 윤리에 역행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가장 큰 미덕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믿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베풀어 준다는 점이다. 오해의 여지가 있기도 하는데, 구원이 너무 내세지향적이면 현실적 가치를 너무 쉽게 평가절하할 수 있고, 반대로 구원이 아주 현세지향적이면 기복적 신앙관에 빠져버릴 위험이 커져버린다. 더블어 종교적 제국주의자의 자세도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일념으로 전도에만 신경을 쓴다는 의도는 좋지만 지하철에서 '예수불신지옥'이라고 쓴 빨간띠를 두른 열혈신자때문에 최소한 눈살을 찌푸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뒤집어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아야 할 수작임에는 분명하다. 내용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도발성도 적당하니 말이다. 의식있는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별다르게 발칙한 내용이 없는 교양 수준으로 알고 넘어가야할 기독교론이라는 점을 꼭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님은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 좌표를 점검케 도와주는 책도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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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하십니까 - 개정판
후안 카를로스 오리티즈 지음, 김병국 옮김 / 바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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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내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생활 가운데 모든 일들을 주님과 하나가 되어 해결해 가는 것이라고...적어도 이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소 안도가 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념뿐이라는 느낌을 지을 수 없어 안타깝다.


삶은 개념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삶은 실재이며 그 실재 속에 신앙이 있고, 믿음으로 매 순간마다 임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말씀을 체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르띠즈 목사는 따스한 체온을 주고 받을 수 있을 만큼 우리와 함게 하시는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옛날 샌달을 신고 넘마옷을 입으신 정적인 예수님이 아닌 나의 친구이며, 동반자인 주님을 영접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나됨을 위한 여러가지 시도에 대해서 많은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교 개혁이후에 개신교는 꾸준한 분열을 이루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가지를 칠 전망이다. 그러나 구원은 교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나의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분이였듯이 그 분의 값진 보혈의 댓가로 세워진 교회도 하나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분열은 분명 사탄의 획책이며,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인정하고 자행하게 사실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 확인된 바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지닌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풍성한 사랑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한다. 자꾸 그러고 싶은 것이다. 진실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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