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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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문고 우리시대의 놀라운 기획을 세상에 알린 신초탄의 역할을 했던 기념비적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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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범우사상신서 3
에리히 프롬 지음. 방곤,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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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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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기능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지음, 김용옥 옮김 / 통나무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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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이성관은 한마디로 ‘이성의 기능이란 삶의 기술(the art of life)을 증진시킨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말은 소위 '적자생존'같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최적자가 덜 적합한 부적자를 제거한다는 식의 진화론자들의 오류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환경요인의 제한에 따른 생존력(개체 지속성)을 본다면 오히려 비생물인 바위가 오히려 분자구조의 견고함을 더 오랫동안 유지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 제 2 법칙에서 볼 수 있는 무질서도를 역행하는 생명의 신비는 그 본질적인 경향이 과연 어디에서 부터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주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해결점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빅뱅이 무한한 에너지의 물질적 도출이라는 전제로 가정한다면 우주는 분명 현재로서는 분명 확산적 경향 즉 공간적 확장과 물질의 다변성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끊임없는 무질서도를 증가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우주의 확산적 경향이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일단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우주의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생명체는 외부의 에너지를 내부로 끌어들어 다양한 생명현상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 엔트로피 법칙을 역행하는 다양한 분자생물학적 메카니즘을 유발하는 그 어떤 본질적 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 준다.


화이트헤드는 이성을 이러한 엔트로피 법칙의 역반응으로 일어나는 상향성으로 정의하고 있다.이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환경에 대한 능동적인 공격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화이트헤드는 다음의 3중의 충동이 자로잡고 있다고 하는 테제를 제의한다.


(1) 산다. 이는 생존하는 것
(2) 잘 산다. 이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
(3) 더 잘산다. 이는 만족의 증가를 획득하는 것


이러한 테제가 의미하는 바에 따르면 이성의 원초적 기능은 바로 그 공격을 환경에로 방향지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이성이 사실에서라기보다는 상상속에 구현되는 목적의 달성을 향한 충동을 비판하고 지시하는 경험의 한 요소라는 테제와 결국 같아진다.


어떠한 방법론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피곤의 법칙은 용서없이 엄습한다. 좋은 삶이라 하는 것은 불안정한 것이다. 따라서 생존의 방법은 그 자신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그냥 생존하는 수준으로 퇴행해 버리거나, 과거의 관습들을 자유롭게 떨쳐버리고 더 잘 사는 모험을 시작하는 두 가지 기로에서 갈등하게 만든다. 삶의 권태란 새로운 대비를 향한 충동의 좌절로부터 연유되는 피로를 말한다. 자연에서는 안정이 확보되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주장한다.


(1) 맹목의 방법 : 원점으로의 퇴보를 통해 상승의 경향성을 포기하면서 안정화를 획득하는 것
(2) 잠시의 방법 : 맹목적으로 새로운 개체들을 통해 대체시켜 피로로 부터 그 종을 보호하는 것
(3) 리듬의 방법 : 반복 파생된 피로를 제거하기 위해 경험에 대한 주기의 다양성을 획득하는 것

어떠한 방법이든 결국 이성의 반(反)인 피로의 작용은 상향에 되달하려는 원초적 성격에 있어서 이성의 패배를 안겨줄 가장 큰 위협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우주의 기본적 이중성인 하향과 상향을 육체와 정신이라는 복합적 단위로 파악될 때, 신체적 경험이라는 순전한 물체적 경험이 구체성의 형식의 경험인 정신적 경험으로 실현을 위한 형식 충동에 어떻게 공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중성의 통합은 개별적 자체 존재성이 경험속에서 도출된 목적성으로 인해 다수적 목적의 결합이 이우어질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한다.


지성적 경험의 고도의 형식들은 정신적 경험과 물체적 경험이 복잡하게 융합되고 또 재융합하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것들뿐이다. 이는 공허한 구체성을 향한 충동으로서의 정신이 실체화 시킬려는 충동인 욕망을 이성이라는 비판자를 통해 새로운 내재적 초월의 충동으로 승화하면서 나타난다.


사변이성에서 출발했지만 17세기 부터 시작된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의 오랜 반목의 세월은 상호간의 극단적 대립만큼이나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더 큰 골을 파놓았다. 사실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 참이냐, 거짓이냐? 라는 질문은 어떠한 상황에서 참과 거짓이 성립되는지 적용범위의 한계를 정해놓고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주장한다.


과학이 귀납적 일반화와 관찰 가능성이라는 엄밀성을 전제로 한다 하더라도 관찰된 사실의 범주라는 제한성과 과일반화의 오류라는 한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과학적 체험의 단순한 기술로써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자명한 사실이다.


화이트헤드의 주장에 따르면 사변이성이라는 용어속에서 '이성'은 합리적인 것의 질서정연함에 호소하는 것이고, '사변'은 어떤 특정한 방법을 끊임없이 초월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희랍인의 비밀이란, 이러한 초월에 있어서 조차도 방법의 구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논리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넓은 함의에 있어서 논리를 발명했고, 인류의 수세기의 경험의 축적에 의해 마침내 완성된 희랍의 논리학은 인간의 한 믿음의 내용이 귀속되어야만 하는 일련의 기준을 제시한다.


(1) 직관적 경험의 일치
(2) 명제의 내용의 명료성
(3) 내적 논리적 일관성
(4) 외적 논리적 일관성
(5)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논리적 도식의 상태
     1) 경험과 광범위하게 일치하며
     2) 경험과 어떤 부조화를 일으키지 않으며
     3) 그 범주적 관념들 사이에 정합성이 있으며
     4) 방법론적인 결론을 갖는다.


희랍인들이 인류의 문명을 재건한 다양한 과학의 분야들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도식의 창진적 생산으로 말미암았다. 한 도식의 생산이야말로 사변이성의 가장 중요한 업무에 속하며 그 도식을 구성하는 범주적 관념들의 상관된 일군의 조직은 연역적 논리의 구성적 힘에 힘입어 파생적인 확대를 허용한다.


도식은 이해자체로 만족하려는 사변이성의 특별한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관념의 자본을 형성한다. 무용화라는 낭비의 관찰로부터 유용한 발전적 결말이 도출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도식이 매우 중요하지만, 사변이성의 예술은 단지 도식의 활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식의 초극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화이트헤드는 못을 박고 있다.


단순한 물리적 경향성을 뛰어넘는 이상적 목표를 향한 목적적 인과를 실현하는 욕구의 발견할 수 있다. 이성의 기능은 생명체가 내부계를 끊임없는 역하향화를 막는 수준에서 벗어나 목적지향적인 창진적 요소를 사변이성으로 더듬어 찾고 실천이성으로 구체화시킬려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상향적 경향이야 말로 인간이 우주적인 대전제인 엔트로피 법칙을 역행하면서까지 다문화적 요소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인류는 다른 타종과 다른 진화적 경로를 따라왔다. 그것은 이성의 진화였다. 유구한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적 창발성을 지속하게 했던 이성의 힘이 과연 미래에는 어떠한 항로를 선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리는 과학문명의 혁신적 발전이라는 빛나는 바벨탑 위에서 신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교만함에서 한발 물어서서 이성의 메타 인지적 기능을 스스로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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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 개정4판 동녘선서 1
조성오 지음, 이우일 그림 / 동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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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학문이였던가? 단지 철학자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금단의 이 학문을 일개 범인이 취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난해함과는 다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과연 철학이 내 일상생활에 어느만큼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하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고가 결국 철학은 범인에게 있어서는 무용지물이다라는 불행한 씨앗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서는 철학과 일상생활의 일치성에 가까운 연관성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관련되어 있다.' , '모든 것은 변한다.' , '고정관념의 이탈' , '사고의 실천력 증대' 등을 주제로 하여 세부적 사항에 대한 다양한 예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세계는 인식가능하다는 명제아래 유물론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연관지어서 풀이하면서 아울러 부정(不正)의 부정을 통한 역지사지의 차원을 보다 높게 상승시키는 고등 사고력을 논하고 있다.변화의 모든 원인을 모순에 대한 상호간의 투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경향은 본질과 현상의 옳바른 인식을 유도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해석틀의 한계를 인정치 않는 무리한 설명을 전반적인 과학적 증명 형식으로 종교 부정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메스를 들이대로 있는데, 기존의 관념 테두리 안에 종교를 한정지으려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종교 본질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틀리니 답도 틀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로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종교는 논리적 사고나 과학적 증명으로는 규정조차 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임을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다. 본서의 주장과 달리 영적세계는 오감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신의 영역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므로 밝히려해도 밝히지 안는것이 아니라 못하는 불가지론의 세계라는 사견(私見)을 굽히게 할만큼 유물론의 주장이 설득력 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재하는 세상의 과학적 철학관을 독자에게 심어주기에는 본서의 내용은 결코 녹녹치 않다. 결국 저자의 의도와는 다를지 몰라도 책의 내용은 서로 다른 독자에 의해서 전혀다르게 소화될 것은 분명하며, 그들나름대로 내면화된 자기 철학을 형성해 나갈 수 있다면 본서의 가치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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