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통화불여일견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오래 전화를 해봤자 한번 만나서 보는 것만 못하단 소리다.
상대의 외모가 내 타입이 아닐 땐 "그냥 전화만 할 걸"이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상대의 얼굴을 모른 채 채팅이나 전화로만 진행되는 건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아닐 것이다.
긴데스 버팔로스라는 철학자가
"사랑은 먼저 상대의 외모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남녀가 사랑을 하기 위해선 일단 한번 만나야 한다.
그렇다고 그녀를 만난 게 사랑을 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무릎 사진에 호감이 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는 동안 내 마음은 완전히 닫혀버려
어떤 여인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믿고 있었다.
지난번 선자리에 나온 사자머리를 한 여인도
캣우먼을 닮은 우리학교 여선생도
내 가슴에 어떠한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으니까.
댓글을 주고받던 중 그녀가 "다이하드 4.0 같이 볼래요?"라고 했을 때
내 첫 반응은 당황스럽다는 것이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왜 영화를 같이 보자는 걸까.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죠"라는 댓글을 남긴 건
역시나 무릎 사진의 여파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메가박스 인터넷 발매기 앞에서 그녀를 봤을 때,
난 경솔하게 초대에 응한 걸 후회했다.
영화나 보고 술 한잔 하면서 밥 먹고, 이렇게 생각없이 헤어지는 게 내 목표였지만
그녀 얼굴을 보고나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 대단한 미녀십니다. 이런 분이 왜 저같은 사람을...?"
그녀가 베지색 정장에 어울리게 베시시 웃었다.
"왜요? 전 부리님 좋아하면 안되나요?"
다이하드 4.0은 별반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관심은, 어떡하면 살짝 손이라도 닿아 볼까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영화가 끝난 뒤 내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게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여자들에게 어필하기 좋은 와인인 '벨라 M'을 마셨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말을 했고, 난 주로 듣는 쪽이었다.
아쉽게 그녀와 헤어진 뒤부터 난 어떻게 또 만날 수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안돼요. 저 7월 26일날 일본 출장 가요. 음, 공항 배웅나오면 모를까 그전에는 못봐요."
이성을 약간 잃어버린 난 정말 배웅 갈 거라고, 비행기 시간이 언제냐고 물었다.
"진짜 오시면 제가 점수 많이 드리죠"
26일 아침, 난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더 일찍 인천공항에 갔고
혹시나 그녀가 왔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차에서 내리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달려가서 짐을 받아주려는 찰나, 그녀의 등 뒤에 뭔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꼬리였다.
놀라서 화들짝 비명을 지르는데 그녀가 뒤를 돌아 날 봤다.
눈 주위가 온통 까맸다.

내 눈앞에는 새초롬한 너구리 한마리가 우뚝 서서 날 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