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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새끼 나한테 반했네, 하고 감이 오는 순간들이 있다. '동공지진'이라 일컫는 바까지 포착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이 자기 취향에 꼭 맞는 상대를 맞닥뜨렸을 때 내뿜는 표정과 눈빛은 감지할 수 있다. 본능적인 발신이므로 수신 또한 본능적이리라. 나는 첫인상과 다르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왔고, 호불호를 타는 성격으로 어째 알수록 정이 좀 떨어지는 유의 인간이라서 내면보다는 외면이 차라리 낫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래서 이 직감은 대체로 누군가와 처음 대면했을 때 온다. 종종 있는 일이라 대개 잊어버리게 마련이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라 함은 상대 또한 내 취향이었으며 그 후 만남이 즐겁고 인상적이기까지 했던 경우다.
이런 경우는 드물고, 지금 떠올린 놈은 그 드문 경우에 들어 맞았기에 그 놈과 내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건 당연했다. 그리고 나는 이내 그 놈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애인 있는 놈이 그토록 내가 맘에 들은 티를 낼 줄은 상상도 못 했지. 그 놈의 애인에게 미안했다든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든지 하는 상냥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그 놈이 애인이랑 헤어지고 나랑 잘 되어봤자 거듭 다른 여자한테 껄떡댈 것이 눈에 훤하다는 게 이유였다. 양다리도 아닌 환승이 질책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남 얘기 할 때 한정이고 환승의 대상이 내가 되고 싶지는 않거든. 환승했던 놈은 또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이 사람의 성질과 삶의 행적이 나와 잘 맞지도 않거니와 다소 불안하기는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야,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우리 관계는 특별하니까. 정말 기막힌 환상이 아닐 리 없다. 그런데 미몽에 젖어 제 발로 지옥에 걸어 들어가는 이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이 소설에도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안'이다.
주인공 세실, 세실의 아빠 레몽, 그리고 레몽의 애인 엘자는 해안가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평온은 잠시였고, 죽은 세실의 엄마 친구이자 레몽과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우아하고 세련된 여자, 안이 등장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남자인 레몽은 엘자를 버리고 안의 애정에 화답하며 급기야 결혼까지 약속하는데, 세실과 레몽, 안 사이에는 좁히기 힘든 간극이 놓여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들은 너무나 다른 세계에 머물렀고,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세실과 레몽은 욕망과 자유의 세계, 안은 안정과 질서의 세계에. 세실은 이를 자각하며 안과 함께하는 삶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각본을 구상한다. 내 남자친구 시릴과 엘자가 연인 행세를 하게 하자. 그럼 아빠는 젊은 남자와 놀아나는 엘자에게 다시 욕망을 품겠지. 안은 실망해서 아빠를 떠날 거야. 그리하여 연극이 시작되었고, 연극의 결말은 각본대로였다.
세실과 레몽은 이런 사람이다. "그에게는 질서 있는 생활보다는 결별이 견디기 쉬울 터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진정으로 타격을 주고 쇠약하게 만드는 건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뿐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나는 어떤 때는 우리가 아름답고 순수한 방랑자라고 믿었고, 어떤 때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딱하고 가망 없는 쾌락주의자라고 생각했다."(163쪽)
자기 욕망에 지극히 충실한 태도를 보이고 "내적으로 고요해지기 위해 외적인 소란이 필요한"(139쪽) 사람.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이런 사람과의 만남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면 만나도 된다. 이런 상대가 또 자극적인 재미는 있지.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면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일 따름이다. 세실의 각본대로 흘러가지 않았더라면 안은 레몽과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안에게는 두 개의 패착이 있었다. 내가 그를 바꿀 수 있으리라 믿은 것, 나는 그에 의해 상처 입어 자살할 인간임을 몰랐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