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세돌이 졌다. “즐겁게 뒀다.”고 말했다.
체스 나부랭이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나는 이 사건이 인류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본다. ‘크로마뇽인은 네안데르탈인를 멸절시켰다.’ 정도의 비중으로. 하지만 지금 당장 내 관심이 가는 건 이세돌이다. 애써 쿨한 척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는 괜찮지 않다. 호텔방에서 수건 물고, 벽이라도 치고 있을 거다. 최소한 그런 심정일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상사常事인데, 지금 세 번의 패배가 대수겠는가. 그에게 진짜 문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것은 영혼을 마르게 하는 일이다. 나는 그 기분을 잘 안다. 오늘의 대국을 보며, 내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 한판의 바둑을 떠올린다.
#. 2
오래 전 일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제법 영특한 구석이 있었다. 기저귀를 차고 가감승제를 암산하던 기재가 유치원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한 부모는 대신 바둑학원을 보냈다. 바야흐로 소년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에 신처럼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둑을 잘 둘 수 있었던 건 성격이 순했기 때문이었다. 폭력으로 암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던 시대였고, 맞기 싫어서 100수 200수가 넘어가는 기보를 수없이 외웠다. 정석이 몸에 배자, 또래 중에는 나를 당할 자가 물론 없었다. 동네 어르신들과 맞바둑도 가벼웠다. 곧 나는 바둑학원의 아이돌이 됐다.
그리고 어느 날, 녀석이 나타났다. 녀석은 수상하게도 맨 끝자리를 좋아했다. 잊지도 않는다. 둥글둥글 서글서글한 얼굴. 왠지 어른들은 녀석과 나를 붙여주지 않았지만, 나는 냄새로 녀석이 강자임을 알았다. 먼저 도전해 오기를 기다렸고, 녀석은 자리를 사수 할 뿐이었다.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났다. 면이 상하긴 했으나, 먼저 다가간 건 나였다. 갚아 주면 되니까. 그와 마주앉은 나는 당연히 백을 잡았고, 조막손을 들어 맹렬한 기세로 좌하귀 화점에 돌을 놨겠지. ‘딱!’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미 영악해 수 싸움에 밝던 녀석은 내 포석의 설익은 부분과, 돌의 틈새를 노렸으리라. 그러나 게임의 결과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성벽이 허물어지듯 압도적인 패배였으므로. 나는 몰락한 엄석대처럼 처절하고, 무력하게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돌의 지위는 녀석에게 넘어갔다. 여덟 살 꼬마에게는 견딜 수 없이 가혹한 일이었다.
더불어 나의 각광기도 그것으로 종언을 고했다. 새순 같던 총기는 가뭄 맞듯 시들었다. 나는 그 무렵에도 소년조선일보의 전 학년 학습문제를 다 풀 수 있었지만, 정작 고학년이 되어도 정답률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늘 하위권을 기어 다니던 성적, 무기력하게 움츠러든 어깨, 빙그레 나부랭이나 응원하며 별 희망 없는 내일이나 궁리하는게 녀석과의 대국 이후 저주처럼 따라 붙은 소년기, 내 삶의 꼬리표였다. 물론 그 후로도 질척거리는 인생이 쭉 이어오고 있다.
#. 3
이제 어른들이 우리를 굳이 떼어놓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굳이 쓰린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딥 러닝’한 것이다. 그게 내 삶의 자리다.
몇 달 전. 나는 노동에 찌든 허리께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냉골방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구석의 조그마한 흑백 테레비를 켜며 쿨럭거리는데 아, 꿈인가. 잊을 수 없는 녀석의 얼굴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녀석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제 유명인이 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이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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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앓던 폐병도 잊은 채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는 미국의 어마어마한 명문대를 졸업하고, 무슨 기업의 대표 직함까지 가진 화려한 이력의 젊은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질투와 분노, 회한과 욕정에 사로잡힌 채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래, 모두 다 너의 탓이다. 니가 사는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니가 타는 그 차, 그 차가 내 차였어야해 니가 차린 음식, 니가 낳은 그 아이까지도 모두가 내 것이었어야 해 모두가 내 것이었어야 해 모두가 내 아이였어야..
관두자.
#. 4
천재는 하늘이 내린다. 그렇다면 천재를 몰락시킨 것은 하늘, 그 자체인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최후의 질문'를 떠올린다. "빛이 있으라." 언젠가 저 기계도 그렇게 말 할 수 있게 될까.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family/217/read?articleId=15947372&bbsId=G005&itemId=64)
더 왈가왈부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언급은 해 두자. 2006년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썼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시대보다 완전한 그들의 시대가. 나는 당시 모종의 이유로 구글에 대한 자료를 모았고, 새로운 시장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구글의 비전에 주목했다. 그리고 지금 구글의 시총은 애플과 세계 1위를 다툰다. 내 예측은 반만 맞았다. 인공지능 연구의 약진을 전혀 변수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뒤에 올 것으로 나는 SF의 상상력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대국에서 알파고는 판을 '흔들고', 실수를 '유도했다'. 딥 러닝 기술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약한 인공지능의 영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 인공지능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 건이 2001년, 관련 업체들을 걸신들린 듯 인수하기 시작한게 불과 2~3년 전이다. 그리고 오늘 이빨을 드러낸 괴물을 보니, 작년에 기술 완성까지 20년을 운운하던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우습게 느껴진다.
IBM이 필리핀, 인도에 주던 상담 아웃소싱 업무를 AI로 대체한지 오래다. 소비자 만족도도 그 편이 더 낫다. 곧, 기술적인 영역을 넘어서 회계, 자금, 인사 등 기본적 행정 업무는 모두 컴퓨터로 대체될 것이다. 5년이면 컴퓨터는 작곡을 할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리라, 씨피유 쿨러에 구리스나 발라가며 개같이 비참한 인생을 연명하든가, 제 2의 러다이트 운동에 참여하든가. 나는 물론 전쟁을 택하겠다. 네오의 등장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높은 확률로 자동문에 머리통이 끼어 죽겠지.)
#. 5
깊은 시름을 하던 차에, 정치전문가 김늘보가 묻는다.
‘당신은 노원 병 주민입니다. 안철수와 이준석 둘 중 하나를 고르시오.’ ..하.
삑- 머릿속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6
그래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기로 했다.
(https://secure.actblue.com/entity/fundraisers/39795)
올해 투자 수익금의 대부분을 샌더스 계좌로 이체했다. 그를 지지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질까봐? 천만에. 현재 미국의 사회 경제 시스템 하에서 지금 샌더스의 ‘민주사회주의’(사실상 사민주의로 본다.)는 허황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의 경제정책을 설계한 폴 크루그먼이 왜 힐러리로 방향을 틀었을까. ‘좌파의 부두 경제학’ 비판은 정치적 계산을 감안하고서라도 날카롭다. 나는 달콤해도 근거 없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섣부른 희망에 근거한 믿음이 재앙을 초래하는 꼴을 지겹게 봐 왔다. 회사에서든, 정치에서든, 시장에서든. 그러나 샌더스가, ‘사회’보다 ‘민주’쪽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만들어 갈 미래는 어쩌면 조금 기대해볼만 할 지도 모르겠다. 버니 샌더스는 폴 크루그먼에게 대답했다. “대화하자, 고쳐 갈 것이다.” 신선하다. 불붙은 아궁이에 돈을 쳐 넣은 꼴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내가 샌더스에게 기부하는 이유다.
다 늙어 하얗게 센 머리를 하고, 그가 추슬러 함께 걷고자 하는 자들은 ‘병들고’, ‘신분이 낮고’, ‘소외된’ 자들. 그들이 헤매는 광야에는 수퍼팩이라는 불기둥도, 언론이라는 구름기둥도 없다. Bernie Bros 너희는 안 될 거라고? 알아, 우리는 안 될 거야 아마. 샌더스 지지자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되는게 더 이상한 인생이다. 근데, 어차피 안 될 바라면, 더 적극적으로, 더 간지나게 안 되는 법을 모색해볼까 한다.
#. 7
나는 왜 패배한 것과, 패배할 것을 응원하는가. 빙그레를, 이세돌을, 또 버니 샌더스를. 그들은 잦아드는 시대의 잔광殘光. 마음을 애태우는 여운이기에. 나는 이 시대가 잊어갈 그것들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