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리베츠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온천 휴양지다. 홋카이도 최남부 하코다테에서 기차로 세시간 쯤 걸린다.

 

그 날, 대서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동진하고 있었다. 열도 서부의 피해는 막대했다. 뉴스마다 현장에 나간 기상 캐스터들의 머리가 미역처럼 날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는 료칸에서 온천과, 늦잠과, 산책을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도시는 한산했다. 거주지는 제법 밀집되어 있었으나 인적이 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가 부동산 호황을 싹 따라마시고 남은 거품의 흔적이다. 우리는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잠시 걷다가 돌아왔다. 마침 폭풍이 닥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역사에서 루리는 어슬렁 거리는 곰을 발견했다. 둘은 어깨가 스치는 순간 상대를 알아 본 듯 했다. 곰은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오른 발톱을 치켜들었고, 루리는 크랩 스타일로 상단 가드를 올리고 턱을 노렸다. 승부는 찰라에 가려졌다. 루리가 쇄도하는 순간 곰의 레프트 블로우가 치명적인 예각을 그렸고 루리는 송곳같은 어퍼를 찔러 넣었..   

 

 

 

 

 

..친해졌다. (어쩐지 곰은 조금 주눅이 든 표정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온천 마을로 이동했다. 


바람이 불자 까마귀떼가 그악스럽게 하늘을 뒤덮었다. 오, 지옥 입구에 걸맞는 풍경이다.

 

 

 

 

 

온천 마을이야 말로 노보리베츠 상업의 핵심지역인데, 상점들은 휴업이나 다름없어서 방문하기도 민구스러울 지경이었다우리는 을씨년스러운 번화가를 걷다가 아무 라멘집이나 들어갔다. 스킨헤드가 반들반들한 점장이 매우 뜨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으나, 별 다른 선택권이 있지도 않았다. 메뉴도 그랬다

 

 


 

 

난해한 메뉴판을 뒤져 '지옥유황라멘'을 시키는 나의 표정은 굳어있었으리라.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료칸에 짐을 풀고 지옥계곡으로 갔다. 걸어서 10여분, 태풍의 거친 결이 계곡 한복판을 비비고 지나갔다. 유황 냄새가 싸하게 풍겼다.

 

료칸에서 빌려온 우산이 두 개나 작살이 났다. 나중에 지배인에게 이실직고를 하자 걱정하지 말라며 하나를 더 내준다. 흥, 제법 친절한 척 하는군, 니혼진.  

 

 

 

 

 

 

이 길의 끝에서 간헐천이 끓고 있었다. 달걀을 넣으면 바로 삶아지는 온도다. 그렇게 삶은 달걀이 편의점에 흔하게 굴러다녔다. 그걸 온센 타마고 (온천 달걀)라고 하는데 맛이 여간 비범한 게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온센 타마고 몇 알어포, 밀크푸딩 같은 주전부리를 사 들고 료칸으로 돌아왔다.

 

 

 


 약속한 시간이었고기모노를 입은 언니가 식사를 가지고 왔다.



 

 

료칸, 기요미즈데라의 음식은 미식가들 사이에 제법 알려진 모양이다. 캐비어를 얹은 두부, 굴 조림, 초밥, 연근, 토란에, 증기로 쪄낸 연어구이, 참치회, 도미회, 각종 절임채소와 그 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소담스러웠다.

 

양고기가 푸짐하게 든 나베가 끓는 것을 기다리며 사케로 입술을 적셨다. 오! 내장이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루리는 이미 머리 위로 잔을 흔들고 있었다.




음식은 허투루 된 것이 없었다세심하게 만져서 맛을 만드는 것이 느껴진다절여진 채소의 간이 덜 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우메보시의 향이 살았다.




나베 국물은 맑고 진했다. 비리고 누린 맛이 없었다.



 

 

연어, 버섯, 밤, 은행.

 

 


 

 

두부두부.

 

 

 

 

 

루리루리.

 

식사를 하고, 루리는 온천을 갔고, 나는 다시 지옥계곡으로 나왔다. 태풍이 노보리베츠를 완전히 영향권에 가둔 시점이었다.

 


 

 

 

펄펄 끓는 유황천의 매캐한 온기와, 비바람에 섞인 돌 모래와, 숲으로 숨어든 까마귀의 향연 사이로 어두워 가는 지옥계곡을 걸었다. 우산은 없어도 그만이었고, 나는 밤 도깨비 같았다.

 

 

 

 

 

돌아왔을때 루리는 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단정하게 앉아 적당한 온도로 적당한 시간 우려낸 차의 색을 감상하고, 향을 즐기고, 차를 머금은 혀 끝으로 맑고 떫은 맛을 즐기고, 목으로 따뜻하게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느끼고, "감로와 같습니다."라고 감상을 토설하는 것이 차를 마시는 바른 방법이다.  

 


 

 

음..

 

-감로와..

 

-크!!!

 

 

 

 

 

-마셔 마셔!! 

 

-.... 

 

 

 

 

 

-섞어!!! 

 

-.........;


노곤노곤해지도록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유있게 노보리베츠를 떠났다. 다 쓰지 못했지만,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여럿이다. 우리를 정류소까지 차로 마중해준 지배인, 길을 묻자 차에서 내려 지도판으로 우리를 데려가 길을 설명해 준 버스 운전사. 길을 물으면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 일쑤인 착한 일본인들. 덕분에 구경 잘 했다.

 

다행히 기차는 연착되지 않았고, 우리는 이른 시간에 신치토세 공항 모퉁이에 앉아서 아직 먹빛이 가시지 않은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았지? 


-좋았어. 

 

 

 

 

 

인천에 도착해서도 루리 머리칼에서는 부드러운 유황 냄새가 났다.

 

늘보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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