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북방의 백성이었다. 지금의 함경도 나진쯤 되는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고달팠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을 여진족 무리가 휩쓸어가곤 했다. 그날도 한 무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1년 후에 다시 오겠으니 단단히 준비를 해 놓으라며 엄포를 놓고 사라졌다. 그 날은 그들 족장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조정에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은 어떤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1년이 지났다.

 

멀리서 뽀얀 먼지구름이 일었다. 몇몇 마을 사람들은 항전하기 위해 농기구라도 쥐어들고 변변찮은 목책을 지켰지만 그들의 행색은 먼지구름의 규모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단창을 들고 어느 집 벽과 그 벽에 기대 쌓아놓은 장작더미 그늘에 숨었다. 먼지구름이 임박하자 어느새 목책을 지키던 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쇄도해 오는 군마는 백여 필. 나는 혼신의 힘을 실어 선두로 창을 날렸다. 창은 적 대장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나는 장작 그늘로 다시 몸을 숨겼는데 사실 형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기적처럼 무리는 나를 지나쳐 마을로 진입했다. 마치 죽은 자나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나는 살기 위해서 그들이 온 방향으로 뛰었다.

 

내가 당도한 곳은 절벽을 휘돌아 나가는 맑은 강이었다. 강폭은 넓지 않아서 15미터 정도. 마을 처녀 둘이 강물에 빠져 있었는데, 그들도 역시 난을 피해 온 듯 했다. 하나는 수수한 무명 옷 차림이었고, 하나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구하려고 물에 뛰어들었는데, 맑은 물 저 편으로 무명옷을 입은 여자가 은장도를 꺼내 비단옷 여자의 뺨을 찌르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 말릴 새도 없이 이번엔 입으로 칼을 넣어 뺨을 찢었다. 나는 물속에서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여 수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를 질러댔다.

 

너는! 너는! 왕가의 사람을 죽인 것이다!”

 

정황을 설명할만한 기억은 없으나, 나는 아마 그 여자들을 잘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찌른 여자는 눈이 풀려있었는데. 정신을 놓은 것 같았고, 찔린 여자는 가망이 없었다. 나는 그녀가 차라리 빨리 죽기를 바랐다. 그리고 무명옷의 여자를 추슬러 건사하지는 않기로 했다. 난리를 빠져나갈 체력도, 의지도 모두 고갈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물길을 따라 흘러가기로 했다. 아무 의욕도, 기운도 없었고. 다만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만 가늠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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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6-05-0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면제를 먹지 않는 날은 생생한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꾸는 것이고 다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인데, 꿈을 꾸는 날과 꾸지 않는 날의 기분이 아주 다르다. 꿈을 꾸는 날 훨씬 기분이 좋다. 이상한 일이다.

내 꿈에는 대체로 폭력적 행위가 등장한다. 때리고, 조르고, 꺽고, 쏘고, 오늘은 심지어 던져서 꿰뚫는 행위가 등장했다. 폭력성은 내 꿈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으로 본다. 가여운 것.

꿈은 무의식의 주장이다. 꿈을 해석하는 것은 내면과의 대화다. 나는 그럼으로서 내 안의 그것을 이해하고, 설득하고, 타협하는데. 예쁘고, 거칠고, 영리하고, 징그러운 게 꼭 누구를 빼다 박았다.

한수철 2016-05-0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재미가 있네요.(님하고 허구적 글을, 먼댓글을 통해, 일종의 연작인 양, 번갈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둡니다)

실은 댓글이 더 인상적이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프로필 사진은, 왜 저렇게 하세요.

사진도 잘 찍는 양반이. 흠흠..

잘 읽고 가연.^^

뷰리풀말미잘 2016-05-09 15:31   좋아요 0 | URL
히히 안녕하세여. 한수철님. 글로 오고간다면 또한 아니 감체할 일이겠습니까만. 저는 머리가 무식해서 그런가 허구에 재능이 없는 거 같아요. 축구도 못 차고, 런닝도 못 뛰고 머리도 무식하고 왜 이렇게 못 하는 게 많을까요. 반면, 한수철님은 남다르신 것 같아요. 아마 이미 일가를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제 프로필 사진은 원래 유키스 동호였어요. 작년에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죠. 이후 실의에 잠겨서 새로운 플사를 구하는 것을 잊었네요. 마치 상처하고 지조를 지키는 뭐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말씀을 들으니 바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찌됐건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세뇨리따 2016-05-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도 상처를 지키는, 그런 타입의 생물..이었군요.(사람이라고 썼다가 굳이 수정했어요. 매번 이렇게 헷갈린다니까요!)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상처를 방치하고 멍울진 우울을 붙여놓고 거기서부터 영감을 구하는 사람들.
사실 영감은 고사하고 그들은 귀찮을 뿐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예술에는 실망해 본적이 없었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늘 이소라나 김광석 이었는데, 이제는 말미잘이겠네요.

주제넘고 가소로운 말이겠지만, 이정도의 영감들 이라면 그 상처도 반쯤 빼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네요. 다만 얼마나 괴로울지를 생각하면 결국엔 마다하겠지만..
말미잘 글은 늘 저를 자극해요. 글에대한 열망이 바짝 건조해지면 이 서재에 오는데, 글을 읽으면 흥건해지다 못해 마음이 불어 터지는 느낌이랄까, 결국 늘 비교하고 좌절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오기가 생기가 하거든요.

그나저나, 이제는 정말로 볼수 없는건가요... 전에 있어, 문화컬쳐를 경험하게한 어마무시한 미문들은

뷰리풀말미잘 2016-05-13 10:50   좋아요 0 | URL
제 마음 속에 뭔가, 뭔가 알 수 없는 부조화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거슨 어둠의 다크니스, 운명의 데스티니..

이소라나, 김광석의 노래들이라면 전 대표곡만 듣습니다. 그것들은 넘나 슬픔의 소로우이니까요.

저는 글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도 아주 잘 알고 있죠. 요즘 대체로 행복하거든요. 내일은 뭘 할까,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런 불확실성이 없습니다. 시계추처럼 자리에서 일어나고, 한심한 일들을 대충 하다가 다시 집에 와서 책 몇글자 읽고 자는 게 사는 전부죠. 제 생각에 글은 한량들의 것이 아니에요. 황야에서 야성을 번뜩거리는 짐승들의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마 `미문`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있다고 하셔서..)

요즘 제 글 취항은 오히려 장식 없이 간결하거나, 몸 냄새 나는 글인 것 같아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애비는 종이었다. (서정주), 아, 씨발, 아. (한수철)

뷰리풀말미잘 2016-05-13 11:00   좋아요 0 | URL
음.. 미문에 대해 생각하다가 봄밤님이 문득 떠올랐는데. 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미문의 태산북두, 미문의 거두, 우리동네 미문대장, 미문깡패, 미문의 난봉꾼, 미문백정..

..그만둡시다. 미문이 성격과 호환되는 건 아닌듯 하니..


2016-05-24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3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03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