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
-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민음사, 2015. 3.
지난 3월 신간 중에서 눈과 마음이 꽂혔던 책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였다. 사적 삶의 변화가 글쓰기를 가능하게 하듯, 바르트 철학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철학을 삶의 무기로 만들어주는 철학자 강신주의 ‘쉬운 언어’가 없었다면, 바르트는 여전히 난해한 철학자로 나와 피상적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을 나누는 언어가 메타포로 변주된다는 은유 가득한 책이다. 바르트의 문자(기호)를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강신주의 강의 덕분이었다. 한 시절, 바르트 철학은 내 실연의 원인을 분석하는 좋은 무기였다. 그의 사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욕망, 바르트 공부의 초석으로 삼고 싶은 바램이 이 책을 추천한 강력한 힘이다.
원래 말은 글보다 쉬운 법이니까, 이번엔 좀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바르트의 녹취록과 강의안은 글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역시나 기호학자답게 은유의 계보를 잇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만큼 지식의 계보를 따지는 집단은 없을 듯^^)
김영하의 『말하다』를 읽으면서 글을 쓴다는 행위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사유하던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글은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쓰게 된다. 쓰는 행위는 나를 확인하고 발현하는 과정이다. 얼마 전 팟 캐스트 ‘손미나의 싹수다방’에서 건축가 오영욱이 초대되었다.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여행가로 더 잘 알려진 오영욱. 그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결핍에서 찾았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음악적 재능이 없기 때문에 글쓰기가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을 어필하고 싶은데 실현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안을 찾는다. 욕망은 욕망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니까. 글쓰기는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다. 다른 무수한 방법들을 놔두고 글쓰기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어떤 경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바르트가 말년에 ‘소설’를 쓰고자 했던 것은 평생을 함께 한 어머니의 죽음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파괴되지 않고 기억되기를. 사랑의 발화가 수신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문학적 글쓰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전달되지 않는 사랑을 채워나가는 의지, 죽음에 대한 애도의 방식으로 그는 소설을 선택했을 것이다. 필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소설을 통해서 완성된다.
글쓰기에서 바르트는 17음절로 구성된 짧은 글인 일본의 하이쿠에 주목한다. 하이쿠는 가공되는 기억보다 현재의 한 순간에 집중하는 철학자가 관심을 두기에 충분한 텍스트다. 언어에 담긴 권력과 doxa를 이해하는 탈구조주의 철학자는 “사태 보다는 표면에 주목”(584쪽) 했을 것이다.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는 측면에서 바르트의 ‘저자의 귀환’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주체의 억압하는 권력을 밝혀냈던 이들이 다시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소생’을 소리 높여 외쳤던(585쪽) 바르트는 말년에 극단적으로 선회하여 ‘독자의 귀환’을 외친다. 작품을 쓰는 동안만큼은 저자의 삶이 하나의 작품 안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글쓰기의 주체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대상을 쓰는 수동적 위치에 놓인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586쪽)” 글쓰기는 삶의 기록이고, 존재의 확인이다.
과거보다는 현재, 현재보다는 순간을 기록하는 것으로 메모와 하이쿠만한 것이 없다. 하이쿠는 삶과 죽음 사이의 순간순간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하이쿠 중에서 현전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몇 편 있다. 일상의 17개 음절이 만들어내는 느낌은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평범하고 담백한 표현으로 순간을 담아낸다.
누워서 나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여름의 방 (야하) |
23. 정월 초하루 책상과 종이들은 지난해 그대로네 (마츠오, 뮈니에) |
33. 첫눈을 보았다 오늘 아침 세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바쇼, 야마타) |
바르트는 일본의 하이쿠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다면, 나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글쓰기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자기다움에서 내가 꿈꾸는 마지막 소망은 부사 없이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 보는 일이다. 나의 생각이 글로 살아나지 못할 때, 강도를 키우기 위해서 자꾸 덧붙여지는 부사가 글의 격을 떨어뜨린다. ‘개’라는 출처 모를 접두사가 유행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정말 좋다’는 표현이 살지 못하니 ‘개쩐다’고 하고, 멋있다는 말이 살지 않으니 ‘개멋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싶다. 그런 접두사와 부사 없이도 담백하게 내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는 글로만 이루어진 책 한권을 남기고 싶다.
바르트를 수식하는 말만큼이나 그의 글쓰기는 전방위적이다. 문학 이론가, 구조주의자, 탈구조주의자, 기호학자, 문하 철학자(581쪽), 그리고 소설 쓰기를 꿈꾸었던 문학가이기도 했다.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소설의 준비’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미셀 푸코(Foucault)의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 이후, 녹취록을 글처럼 끊어 읽고 이해하려 했던 오랜만의 경험을 상기하게 하는 책이다. 유고집인 이 책은 ‘소설의 준비’ 2부와 두 개의 세미나 텍스트로 구성(581쪽)되어 있다.
글쓰기는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는 행위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글을 편견과 선입견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지금은 글 쓰는 행위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라도 쓸 수밖에 없는 자기표현 수단이 글쓰기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는 살아있는 한 포기하지 않을 글쓰기에 대해서 충분히 사유하게 한다. 단 한 번의 일독으로는 미진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의 권력성을 상기할 때 다시 꺼내 들어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