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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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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민, 대중 민주주의에서 개인 민주주의로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메튜 A. 크레슨,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후마니타스, 2013. 1.

 

인터넷 방송의 시민기자로 시위 현장을 생방송했던 진중권은 자신을 네티즌의 ‘아바타’라고 표현했다. 네티즌을 대신한 누군가가 위험천만한 시위 현장을 누빈다. 그러다가 경찰의 진압에 다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그를 위한 모금 운동이 이루어진다. 마치 게임을 하다가 자신의 아바타가 쓰러지면, 캐쉬를 지급하는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민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시위는 ‘민주주의’라는 득템을 위한 게임처럼 실시간 이루어진다.

 

이러한 정보 사회의 문화적 현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강풀 원작 <26년>은 시민이 참여한 모금 운동이 없었다면 영화로 제작될 수 없었고, 선댄스 대상을 수상한 오멸 감독의 <지슬> 또한 의식있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선 결과를 떠나서) 김어준, 주진우, 김용만, 정봉주의 ‘나는 꼼수다’는 전 세계 팟 캐스트 다운 순위 1위를 할 만큼 진보의 지지를 받았다. 이렇게 시민의 참여가 꾸준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시민에서 소비자로, 대중 민주주의에서 개인 민주주의로, 실질적 법치주의에서 형식적 법치주의로 다운사이징한 민주주의

 

저자 매튜 A. 크레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개인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 소비자, 고객으로서 시민의 권리는 지켜지고 있다는 대다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다만 저자들은 참여가 가능하고, 참여할 줄 아는 ‘대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공적 존재로서 시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한다. 저자들은 독립혁명 이후 미국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민주주의가 왜 다운사이징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이번 대선을 비롯한 한국의 정치 행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19세기 국가와 정부는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에 의존하며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엘리트는 비엘리트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정부의 운명은 시민이 제공하는 세금 위에서, 시민의 지지에 달려 있었다. 정당은 선거 동원으로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차티스트 운동으로 얻은 ‘보통 선거’의 역사가 아직 백년이 체 되지 않은 21기, 선거권의 피가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투표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고, 선거 참여를 ‘의무’로 하자는 주장까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저자들은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이 더 이상 시민의 참여를 바라지 않고 있는데,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능동적이 참여 없이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시민 또한 정치 엘리트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문화자본과 사회관계 자본을 소유한 시민들은 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냈다. 돈만 있다면 소송을 통해서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정치적 연합은 시간과 비용 낭비일 뿐이다. 합리적 선택 이론이 지지를 받으면서, 시민은 이제 사익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문제는 “정치인의 수사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시민”이다. 정치 엘리트도 아니고, 권력을 소유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시민들은 점점 수동적이 되어 참여의 공간을 잃게 되었다. 중하층 시민들의 참여와 동원이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작동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동원되지 않으면 참여조차 불가능한” 이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변호사와 로비스트가 우수 고객의 권리를 챙겨주지만, 가난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던 사회적 장치는 사라지고 있다.

 

대중민주주의와 정치적 동원은 수동적인 방식의 참여로 이해된다. 저자들은 강제적인 힘이 참여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치열한 논쟁이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스스로 자각하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결합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구현하는 ‘다중’과 비교하면 ‘대중’은 참여 보다는 동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정치 엘리트 없이 자발적인 참여가 불가능하다. 왜곡된 정보의 편향성, 또는 생계유지의 어려움으로 정치 참여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동원’하는 것과 자발적인 정치 참여를 동등하게 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엘리트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듯하다.

 

연애계의 가십을 이야기하듯 정치적 사건을 파편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그 사건이 과거와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연결 지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정치는 우리의 삶과 분리된 하나의 사건처럼 도처에서 이야기될 뿐이다. 그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 정치 엘리트와 정당 정치인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 편향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 받고, 공동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공동체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 뿐 아니라, 타자의 권리를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감수성을 계발해야 한다. 물론 쉽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시간이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것만이 우리가 가야할 길임을 역사에 오롯이 새겨두었다. 시민, 민중, 대중, 다중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될 때, 그들의 미래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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