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읽었던 책과 그 책을 읽었던 장소들을 짧게 기록해둔다. 


혹독한 겨울이 오니, 지난 가을이 길고 유독 아름다웠던 것이 얼마나 축복이었던가를 깨닫는다. 

인간은 늘 뒤늦게 깨닫는다. 그게 문제다. 



 

소설과 소설가 @ 서소문 커피빈 재밌게도 이 책을 함께 읽은 사람들의 절반은 문학 전공자였고, 절반은 다른 전공자였는데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대학교 1학년 때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게 했다는 반응이 나왔고, 다른 전공자들은 소설을 보면서 굳이 생각하거나 정리하지 않았던 일들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다, 는 반응이 나왔다. 문학 전공자가 아닌 나는 당연히 후자다. 소설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이 활자화 되어 정리되어 있으니 뭔가 확인 받는 기분? 같은 것도 있고, 반면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 나름 의미 있는 독서였다. 성찰적인 소설가와 소박한 소설가의 구분도 재밌었고 (끝내 나는 이 둘 중 어느 편에 더 마음이 가는지 고르지 못했는데, 그건 대체로 성찰적인 소설가의 작품이 좋지만, 소박한 소설가의 작품의 경우 주파수가 맞으면 이유고 뭐고 설명할 수도 없게 좋아져버리기 때문) 내가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자주 저지르곤 하는 실수 같은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무튼, 소설에 대한 이론을 한번도 공부해본 적은 없으나 소설을 즐기는 이라면 한번쯤은 읽어봐도 좋을 책. 


 

 

황천의 개 @ 밝은 방 (숙대앞) 작품 서두에 등장한 옴 진리교와 아사하라쇼코의 이야기부터 이 책은 강력하게 독자의 시선을 붙든다. 르포 형식으로 그의 행적을 좇으며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진실을 목도하고, 그것을 여러 사회적 현상들과 연관지어 서술해내는 그의 시선은 매우 탁월하다. 후지와라 신야는 최근에 낸 책들의 제목과 표지로 먼저 접했던 작가인데, 너무 팬시한 제목과 표지 때문에, 나는 '끌림' 류의 여행서를 쓰는 그렇고 그런 작가인 줄 알았다. 놓치고 지나갔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다녀오면 다들 현실에서 발을 떼는 도인이 되는 것 같은 (적어도 내게는 그런 느낌인) 여행지 인도에서, 더욱 강렬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오히려 현실을 탁월하게 분석한 글을 쓸 수 있는 건 작가의 타고난 회의적인 성격 때문이겠지. 확신을 얻기 위해 걸었던 쇼코의 인도 여행과, 계속 의심을 품고 거리를 두며 걸었던 신야의 인도 여행이 다른 결론에 귀결할 수 있었던 건 여기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무튼, 필력 좋은 작가의, 날카로운 이성을 지녔지만, 동시에 풍부한 감성에 기반한 글을 읽으니 좋구나. 좋은 책이다. 

 



몰락하는 자 @ 투썸플레이스 서울역점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한 번도 행 나눔 없이 서술하는데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뛰어난 필력의 저자다. 세기의 천재 연주자인 글렌 굴드 앞에서 좌절해 음악을 포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견주어 보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고, 반대로 베르트하이머 입장에서 화자를 서술했다면 어떤 글이 나왔을지도 궁금했다. 굴드는 어차피 머나먼 존재라 부러움의 대상일 뿐 감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었지만 두 비천재들에게는 감정이 심하게 이입되는데, 사실 나는 이 둘에 감정을 이입할 정도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이입조차 일면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와 화자가 처음 굴드를 만난 순간을 떠올리며, 그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게 된 그 순간과 흡사한 내 삶의 좌절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극복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안간힘을 쓰던 순간, 따라가보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던 순간, 결국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지켜나가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끝까지 스스로를 지키며 몰락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 화자는 또 얼마나 약한 존재였는가를 생각해본다. 

 


 

지상의 노래 @ 한강공원 이촌지구 그는 작가와의 만남에서, 쿨함을 조장하고, 뻔뻔하거나 위악적인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삼는 세계에서 오히려 내숭이나 위선을 부리던, 수치심을 아는 이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타인, 우주, 대상에 대한 움츠러드는 느낌이 오히려 인간의 기본 덕목이 아닐까 한다고. 이 책에는 그렇게 죄의식으로 가득한 이승우의 사람들이 나온다. 나와 닮은 사람들이다. 잘 하지 않는 이야기를 늘 우직하게 해주는 것에 감사하며, 이번 책도 고맙게 잘 읽었다. 게다가 은근 좀 스펙터클(?)하기까지하다. 진짜다! 


 

 

시옷의 세계 @ 사루비아 다방 좋다, 너무 좋아. 정말 정말 아껴 읽고 싶었는데 다 읽어버렸다. 분하다. 그날저녁 우연히 세 명의 친구가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마법 같은 이야기. 이렇게 눈이 펑펑 오니 첫눈 오는 날 프리지아를 사는 축복을 누렸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세상에 시인이 존재한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을 위해 문학 천막을 만들었다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는 심보선, 신해욱, 김소연의 이야기를 읽으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의 세계에서는 허우적거림과 서성거림도 아름다운 거구나.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시를 가능케 하는 거구나. 오래 곁에 두고 자꾸만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십년 후 이 책에 긋게 될 내 밑줄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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