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 > 인천의 성냥공장
군 시절 행진곡풍으로 부르던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가 있었다. 지금도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노래의 가사에서 스며나오는 비극성은 "마더 구스"에서 풍자하는 세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점... 정말로 인천에 성냥공장이 있었는가? 답... 있었다!
인천에 성냥공장이 최초로 설립된 것은 1886년 지금 인천시 동구 금곡동 일대였다고 한다. 이 가내 수공업적인 성냥공장이 당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가장 최첨단 제조업이었다. 이런 사실을 반영하듯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펴낸 조선보고서에도 언급될 정도였다. 이걸 볼 때 당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공업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당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성 근로자였다. 이들은 하루에 13시간 이상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만 했다. 이들의 근로조건은 아주 열악했는데 당시 여직공 한 사람이 1만개의 성냥개비에 황딱지를 붙여야 한달에 60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월급은 현재의 돈 가치로 환산한다면 대략 6만원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과 인천에서는 일제 강점기 기간 동안 여성 노동자들의 쟁의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기도 했다. 당시 인천항 주변에는 정미소 다음으로 성냥공장이 많았는데 쟁의 역시 정미소 다음으로 많았다는 통계가 있다.
1886년에 처음 설립된 성냥공장은 인천의 대표적인 제조업으로 반세기 이상을 활약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라이터-지포라이터-가 유행하면서 성냥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포 라이터의 희귀성과 가격경쟁에서의 유리함으로 성냥공장은 근근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녀대 후반을 기점으로 성냥공장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회용 라이터 때문이었다. 일회용 라이터는 성냥과의 가격경쟁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조그만 곽성냥 하나가 20원에 거래되었는데 일회용 라이터는 180원의 가격을 유지하였다. 당시의 곽성냥은 현재 술집의 홍보차원에서 뿌려지는 곽성냥보다 알차고 더 많은 성냥이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일회용 라이터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능과 효율의 법칙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인천의 성냥공장은 6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었다. 그것이 70년대 일회용 라이터로 인해 완전히 소멸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성냥공장이 처음 인천에 설립되었을 때 성냥 한 곽의 가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달 60전의 월급을 받던 여성 근로자들이 그 성냥을 치마폭에 숨겨서 가지고 나와야 될 정도였다면 그 근로조건의 열악함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흘러간 노래 속에서도 도시의 신화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