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1사진 - 지상의 정원
17시간 노동 끝에 본 풍경. 거긴 어떤 싹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봄은 아직 관념적이다. 구체성은 관찰자에 의해서 구성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의, 내부를 강조하고 주목하지만 외부가 없다면 이 삶을 지탱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시공간이 한 몸이듯이 그러하고, 우리 의식과 현실 속에서 같이 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의식
애덤 윌킨스 『얼굴은 인간을 어떻게 진화시켰는가』를 밤에 조금씩 읽고 있다. 어제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적응과 돌연변이를 너무 인과적으로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물의 발달은 목적적이라기보다 돌연변이로 인한 진화적 급변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일전에 대화하다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전후 과정을 모두 아는 일종의 다층적 사유와 사고를 한다 해도 3차원의 이 세계에서 행동 혹은 물질로 구현할 때 어떤 틈이, 우연이 생기지 않을까. 물론 그 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결과‘라는 것은 오직 죽음/소멸뿐일 것이다. 과정은 과정일 뿐이니까. 이러한 죽음의 경계도 우리의 인식 기준이다. '개체'의 소멸만을 죽음이라고 보는 건 매우 협소할 수 있다. 종으로서나 환경을 주체로 본다면 일부의 결과, 순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로버트 란자 / 밥 버먼 『바이오센트리즘』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 "생명과 의식이 우주의 실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관점)을 주창한 로버트 란자 박사는 현재 물리학에서 배제하고 있는 '의식'을 우주를 이루는 한 가지 중요한 구성 요소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자 역학에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관찰이 이뤄지기 전까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휠러John Wheeler)
란자 박사는 그에 빗대 "관찰자가 없다면 무지개도 없다."고 말했다.
트리스탄굴리 『산책자를 위한 자연 수업』에서도 같은 논지가 나온다.
"무지개를 보려면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우선 비가 조금 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서 해를 등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무지개를 보는 사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조건이 맞으면 무지개를 보는 사람의 수만큼 많이 생길 수 있지만 제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 이유는 무지개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정확한 자리에 명확한 모양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위치에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고 없고가 결정 난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거시적으로 이 지구를 한 점이라고 볼 때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극히 일부만을 본다.
란자 박사는 과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모두 떠넘기고 있는 '우연'을 우리 '의식'으로 보려는 관점이다. 철학의 오랜 주제가 과학으로 갔다가 다시 철학으로 돌아오는 느낌인데ㅎ 그가 주장하는 '시공간의 허상성'은 나도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 것이다.
란자 박사의 견해는 논란이 많지만 담 달 스티븐 호킹 독서 예정 중이라 이 책이 뜻밖의 반론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