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벽에 붙어 잤다 민음의 시 238
최지인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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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희로애락을 고루 살핀다기 보다 고통에 집중해 채록하는 역사 같다. 사람들의 많은 말들과 책을 접해도 그렇고 오늘 내 하루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아주 잠깐의 생각 속에서도 나는 저릿한 그 감각을 반추한다. 최지인의 첫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도 그러한 보고서였다. 작품 해설을 맡은 이경수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면 유년의 체험과 광장의 체험을 통해현재의 비정규 청년 세대의 딜레마를 집약한 시집이라 말할 수 있다. 청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라는 소식이 해마다 전해지는 가운데 너무 흔해서 너무 많아서 이러한 보고가 새삼스럽지도 않다. 너무 잔인한 말인가. 나는 개별자 최지인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집중하는 대상을 더 눈여겨보고 싶었다. 이해는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으로 다가갈 때 더 정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 세대의 절망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이 최지인의 시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나는 시어이다.

외투들 벽에 걸려 있다”(이리),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아버지 살이 닿았다/나는 벽에 붙어 잤다(중략)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세상에는 벽이 많았고/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비정규), “아직은 아니다 몹시 추운 저녁/밝다 여기는 도시의 광장/길고 견고한 벽이 정면에 있다/벽에 올라선 사람들은 위태롭다 절벽/여러 표정과 식탁에서의 침묵이 암막에 가려 있다”(앙상블), “벽에 기댄 노파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 겹겹이 입은 잠바가 뼈를 가리고 있다 작은 눈이 잠깐”(기이한 버릇을 가진 잠과 앙상한 C ), “벽이 있었다면 그와 나는 두꺼운 이불을 바닥에 깔고 함께 누울 수 있었을 텐데 풀지 않은 짐들을 구석에 몰아 놓고 내일 먹을 음식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텐데//머그잔을 벽에 던졌다/유리 조각 바닥에 흩어지고(중략)욕조가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욕조를 선물받는다면 골치 아플 거야 벽을 뚫어야 할지도 모르지 벽을 뚫다니! 해머를 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 그는 드레스를 입고 시체처럼 누워 있네//창문을 열어 두고 시멘트벽에 기대어 있다 도시가 흙처럼 쌓여 있다”(저편의 말), “포클레인이 4층 빌라 벽을 두드린다/주저앉고 있다”(병상), “부서진 서랍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벽에 기대 입 벌렸다”(천천히 말하기), “군이 벽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쓸모의 꼴), “골목의 벽들이 무너져 있었다 마스크를 착용한 인부들이 깨진 벽돌을 옮겼다/우리는 질문하지 않고”(항간), “곰팡이 핀 벽지를 뜯어내고 페인트칠했다/얼룩들이 지워지고 벽은 새하얗다”(레드존), “우린 자동차 백미러를 부수고 다녔지. 하숙방 벽에 깨진 거울들을 전시했다. 우리를 지켜보던 거울들, 깨진 금들.”(믿어야 할 앞날), “너와 나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벽 쪽에 누워서 잤다//이곳의 유일한 기쁨을 나누기로 동의했다”(이후), “처형당했다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 모였었다/벽 맞대고 서 있던 여섯/도시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비참한 일을 겪게 마련이다/일상은 계속될 것/총성이 멈추면”(리얼리스트)

시인은 벽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걸 몰랐을 거 같다. 알았다 해도 막을 수 없었으리라. 벽은 아버지부터 부수고 있었지만 좀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고, 광장에서 사는 우리는 또 그 벽에 기대 쉬고 잠을 청하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그의 시에 이미 표현되고 있다. “인간은 가끔 인간 자신을 쏟아 내곤 한다 그것은 아주 난해하다 울부짖음은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언어 이전의 삶은 어쩐지 위험하다선조들은 흙으로 벽을 세우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올렸다 거기서 선조들의 가족과 가축이 살다가 죽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났다”(인간의 시). 벽은 우리를 보호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 벽은 우리에게 남은 제단 같다. “목매 죽은 삼촌의 손/창틀에 늘어져 있었다(중략)두루뭉술/당신 발이 차가웠다”(이리), “담벼락에 박혀 있는 못 굵은 노끈 걸려 있다 개 한 마리 목매달려 있다 대롱대롱 개의 신음/소년 창문으로 개를 지켜본다 죽은 듯 축 늘어졌다 이내 온 힘을 다한다 불쑥 창문 불쑥 창문들”(리얼리스트)

우리의 목과 가슴과 손과 발이 텅 비지 않도록 이 벽들을 무사히 지나가더라도 우리는 기어이 그렇게 될 운명이다. 배를 뒤집으면 관이 되듯이 우리를 뒤집어도 관이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우성과 함께 뒤집히며 이 광장을 지나가야 할까. 기록되지 않는 역사가 되면서. 그래서 희망은 낙관하는 허공의 끝이 아니라 삶의 유일한 끈인지 모른다.       

 

 

ps) 이 시집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는 첫 시이자 등단작인 「돌고래 선언」과 3부 마지막 시 「인간의 시」, 4부 마지막 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이경수 문학평론가는 이 시들의 진행에서 '시적 주체의 선언'이 거듭 새로워지고 갱신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라 최지인 시인의 다음 시집이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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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0-20 03:20   좋아요 0 | URL
예. 벽 얘기 하다보니 사진도 그렇게 찍어보고 싶더라고요ㅎ
허물어질 것들만 허물어지면 좋을텐데 세상 일이 참 그렇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