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은 “신은 주사위를 던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다 던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표현보다 더 마음이 간다. 주제넘지만 나도 첨언하자면, 그 보이지 않는 곳 중 하나는 ‘문학’이고, 그곳엔 폐허의 노래로 가득하다고 말하고 싶다. 각 시대를 거치며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문학들은 폐허 속에서도 남아있는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흙으로 기둥을 세웠듯, 노래를 글로 옮겼듯 우리는 그것을 간직했다.
존 서덜랜드는 《풍성한 삶을 위한 문학의 역사》에서 신화에 대해 인지 작용과 관련해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패턴을 발견함으로써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신화는 우리가 패턴들을 기억하도록 돕는다. 즉 신화는 “이야기(문학의 중추)와 상징(시의 본질)”이란 구조를 통해 설명을 제공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지배자들의 영웅서사와 각종 재난이 가득한 신화를 통해 삶의 진실을 전달하려 했고 들으려 했다. 신화는 서사시에서 소설로 변모해오며 그렇게 내내 이어져 왔다. 시적 가사로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은 세계에 미치는 “이야기”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 우리 이해가 점점 넓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때 나는 음악극을 보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영국 출신 컬트 밴드 ‘타이거 릴리스’와 《햄릿》 이야기의 배경인 덴마크에서 온 극단 ‘덴마크 리퍼블리크 씨어터’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햄릿》이었다. 공연을 볼 때마다 각종 장르와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이야기가 날로 풍성해진다고 생각한다. 밥 딜런만큼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가사를 쓰는 타이거 릴리스의 보컬 마틴 자크는 언제나 늙은 광대 같은 독특한 분장에 초고음의 카스트라토 창법으로 환상적인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준다.
The Tiger Lillies Perform Hamlet
The Tiger Lillies- Hamlet [2012] full album
덴마크 왕자 햄릿에 대한 비극 서사는 워낙 유명해 넘어가고, 나는 《햄릿》에 대한 이해로 이 글을 계속 떠올렸다.
“갈등은 인간의 조건 중 하나이다. 에덴동산이라는 종교적 신화,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낭만적 이미지, 완전한 조화라는 유토피아적 꿈, 애착과 유대와 응집성이라는 끈끈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은 결코 마찰을 피할 수 없다. 모든 사회는 명성과 지위 차이, 권력과 부의 불평등, 처벌, 성적 규제, 성적 질투,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 폭력과 강간과 살인을 포함한 집단 내부의 갈등이 어느 정도 있다. 우리의 인지적, 도덕적 강박 관념은 이러한 갈등들을 추적한다. 전 세계의 픽션에는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은) 적수와 친족의 비극이나 사랑(혹은 둘 다)으로 정의되는 소수의 플롯이 있다. 실제 세계에서 우리 삶의 이야기는 대체로 갈등의 이야기이며, 친구와 친척과 경쟁자가 야기한 상처와 죄와 경쟁의식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
… (중략) …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로봇이라거나, 복잡한 특성들이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거나, 싸움이나 강간이나 불륜 같은 행위가 도덕적으로 사면을 받을 수 있다거나, 아이를 최대한 많이 낳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거나, 사람들이 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이것들은 진화유전학의 설명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보편적인 오해이다).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반복되는 형태의 인간 갈등 상당수는 생명을 가능케 한 과정의 일부 특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ㅡ 스티븐 핑커 ‘진화유전학과 인간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갈등’ 中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글을 쓴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 문제로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였기에, 그의 희곡에는 왕의 교체 문제가 이야기의 큰 줄기이기도 했다. “비밀스러운 암살《햄릿》, 공개적 암살《줄리어스 시저》, 내전《헨리 6세》, 퇴위 강요《리처드 2세》, 왕위 찬탈《리처드 3세》, 정통 혈통 승계《헨리 5세》”(존 서덜랜드, 《풍성한 삶을 위한 문학의 역사》 참조) 등 이는 소설 속 갈등의 문제만이 아닌 실제 삶의 선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했다.
오늘 내가 본 음악극 《햄릿》은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대사, 음악, 움직임, 시각적인 묘사를 총동원한 노력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다각적 노력이 필요하다. 폐허를 거쳐 다시 폐허로 가는 과정이더라도 스티븐 핑커의 말처럼 '지금'은 "생명을 가능케 한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의 자아를 바쳐도 구원이 답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왔다. 폐허 속을 돌처럼 덤불처럼 굴러다니는 게 잘못이기도 하면서 잘못이 아니기도 하다고 우리를 다독이며. 햄릿의 주저와 고심을 대표하는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는 그래서 영원히 노래로 전달된다. 이미 노래로 탄생한 “Like a Rolling Stone”, "Knockin' on Heaven's Door", "Blowin' in the wind" 밥 딜런의 곡들도.
이 먹먹한 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해 부르는 폐허의 노래들은 얼마나 많은가.
"혀 지층 사이에는 납작한 화석의 시간만 남겠죠 날개와 다리 사이에서 진화를 멈추어버린 어떤 기관만이 남겠죠 // 이건 우리가 사랑하던 모든 악기의 저편이라 어떤 노래의 자취도 없어요 // 생각해보니 꽃이나 당신이나 모두 노래의 그림자였군요 치료되지 않는 노래의 그림자 속에 결국 우리 셋은 들어와 있었군요" (허수경, ‘그 그림 속에서’ 中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북극은 사라지며 말하네, / 죽음은 멀고 입술은 너무나 가까워서 / 인간을 달리 부를 병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허수경, ‘겨울 병원’ 中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