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대화

2015년 11월 14일 일어난 프랑스 테러 사건과 한국 민중 총궐기 대회 물대포 진압 사건을 보며, 나는 ˝상대화˝와 ˝테러리즘˝의 상관성을 오래 생각했다. 한국 정부가 그 시위를 IS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우리들은 국가(법)의 폭력성을 보았다.
˝상대화˝는 쉽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로 거론된다.
우리에게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의거, 3.1 운동은 혁명이지만, 어떤 관점은 그것을 ˝테러˝로 규정한다.
모! 정당 출신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5.16은 쿠테타인가, 혁명인가˝ 질문은 빠지지 않는다. 대법원과 해외 언론이 공식적으로 ˝쿠테타˝ 라고 밝혔는데도 시원하게 답변하는 인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입법과 행정을 맡기는 웃픈 일이 계속 되어 왔다. 1961년 5. 16 사건에서부터 54년이 지났는데도 역사는, 사람은 왜 이런 것 일까. 사는 내내 목도하는 부정의(不正義). 세상은 그런 거지, 나 살기도 바쁘지~ 뭐 좋은 거, 재밌는 거 없나? 돌림 노래가 지상 가득하다.

 



 

# 상반성


흄의 인성론에서 이런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사건에서 상반되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확고한 개연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치하지 않는 무수한 심상들의 충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사건은 과거를 수렴하며 다시 발생한다.

테리 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이런 ˝상반성˝의 충돌과 전이를 고찰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는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의 대립을 다룬다. 디오니소스는 실용성과 실리에 상관않는 문화(성교와 연극, 술과 춤)와 죽음 충동을 상징하는 신이다.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이방인/욕망)를 이성과 법으로 누르려 하지만 여성으로 복장도착을 하는 광기로까지 치닫는다. 위반과 법 사이에서 펜테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서로 자리바꿈 하며 ˝왕과 범죄자, 법의 제정자와 법의 위반자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p22)임을 보여 준다. 에우리피데스는 극을 통해 위반 속에 자체 규범성이 있음을 표현하며, ˝우리의 본성을 넘어서려는 것, 그것 자체가 우리의 본성˝(p39)이라 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자에는 자로>에서 독재자 안젤로가 통치자에서 범법자가 되는 상황을 그려냈다. 에우리피데스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 등을 통해 `역사 형성과정 전체에 이러한 자기 모순이 존재함`(p27)을 피력했다.

테리 이글턴은 정의를 `공정한 주고받기의 논리`(p41)라고 말한다. <바쿠스>에서도 보았듯 테러리즘(디오니소스)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펜테우스)이 결정적으로 유사함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비동질성을 배격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당한 처사로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처럼 무한한 자비를 베풀기 보다 우리는 무자비한 복수를 행하기 바쁘다. 합당한 처벌보다 대개 자기만족적 감정의 처벌이었다.


테리 이글턴은 예수의 가족주의 비판과 실행(광야를 떠돎-붓다의 수행과 유사), 무에서 창조된 우주를 말하며, 우리의 인과적 삶의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위 흄의 인성론에서도 살펴 보았듯 우리는 개연성을 만들어 쉽사리 합리화에 빠진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무엇보다 우연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의 무능력인데, 우주의 존재 자체가 이런 종류의 교조주의에 설득력 있는 반박 근거가 될 수 있다.˝(p65)

11.14 프랑스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 청년들의 군입대가 늘어났다는 소식은 IS 규모가 커지는 것과 유비를 보여준다. IS 태동에 중요한 산파였던 미국을 비롯해 러시아, 프랑스 등이 군사 연합으로 뭉칠수록 IS 문제는 더 커질 것이다. 시리아 폭격을 근거로 IS가 프랑스 11.14 테러를 가한 것은 미국 9. 11 테러의 벤치마킹이기도 하다. 개연성과 인과성을 거듭 만들어 인간이 얻는, 아니 잃는 게 이러하다는 것은 진정 비극이다. 여러 명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전쟁을 인류 역사 내내 목격해야 한다는 건 더 비극이다.
나는 지금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능력 부족...) 현상을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하는 상황은 계속 되겠지. *과 **은 폴 서루 에세이 <아프리카 방랑>의 내용이다.

*
한 남자가 말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달래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남자가 말했다. “이스라엘이야 미국의 일부니까요.”

한 여자가 말했다. “맞아요. 이스라엘은 미국의 쉰한 번째 주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서루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대답했고, 레이먼드가 통역했다. “내 생각에 이스라엘은 미국이 중동을 바라보는 창문입니다.”

마푸즈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말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상당히 작은 창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창문이 너무 작아 모든 나라를 명확히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이집트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큰 나라입니다. 또 가난하지만 해롭지 않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에게 자기들의 창문을 통해서만 아랍 전체를 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의 창문이 아닙니다.”

레이먼드가 마푸즈와 다른 참석자들을 위해 통역하는 동안, 나는 쓸데없는 정치 토론에 끌려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고 요점이 뭐냐는 질문도 받았다.

“부족전쟁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하튼 마푸즈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마푸즈가 말했다. “내 생각엔 아무도 관심이 없을 텐데.”

**
오시리스의 얼굴은 뭉개져 이목구비가 구분되지 않았다. 호루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여서 매의 얼굴이 지워지고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광기가 빚어낸 파괴였다. 담에는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남긴 낙서들이 눈에 띄었다. 따라서 이집트 유적들을 지나는 나일 강 유람 여행은 소멸과 낙서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150여 년 전, 젊은 플로베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유적의 파괴에 대해 한탄했다. “신전들에 여행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 유치하고 무익한 짓에 놀랄 따름입니다. 저희는 이름을 새기지 않을 겁니다. 돌에 얼마나 깊이 새겼던지 꼬박 사흘은 걸렸을 법한 이름들도 있었고, 우리가 어디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워지지 않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들은 지워지고 신의 얼굴들은 도려내졌다.




 

# 자아와 외부

미치오 카쿠 <마음의 미래>에서도 보았듯 인간의 뇌는 ˝미래 예측 도구˝로서 인과성을 끝없이 계산하는 구조이다. 자기 존재의 필연성(정체성, 자기 보존)을 확신하는 메커니즘이 나온다. 희생도 그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성스러운 테러>에서 예수의 희생이 테러리즘과 만나는 접점을 말하며, ˝자아˝와 ˝숭고˝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아의 치명적 손상으로 고통받는 순간이 더 풍요로운 자아를 회복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숭고는 죽음과 부활의 반복을 포함한다. 이 두려운 힘은 우리를 일종의 비존재로 용해시키지만, 개별적 특징들을 상실한 후에야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황량한 공허가 아니라 신의 그것처럼 충만한 공허이다. 위협받고 억압받는 개별 자아들이 그 바닥에 이르러 정반대의 존재로 변한다. 이런 저런 공격에 노출된 취약하기 그지없는 대상이 무한한 주체로 변신하는 것이다.˝(p83~84)

위 내용은 한병철과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재발명˝과 상통한다. 타자를 통해 주체가 거듭나는 과정. 타자성을 IS는 부정적으로 흡수했다. 자살 폭탄 테러를 영웅적이며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하며 타자를 투쟁할 적으로만 상정한다.
개인과 국가의 폭력, 공인된 폭력과 비공인된 폭력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테러리즘˝을 ˝악˝으로 단순화해서 외부로 해석하는 건 위험하다. 상대화, 상반화를 낳는 우리 내부의 특성으로 신중히 살펴야 한다.
˝폭력의 내재화 - 타협의 부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만큼 이 시대 중요하게 고민해 볼 문제다.




#공정성

프랑스 테러 사건에 대한 추모 이미지들은 어쩐지 선정성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사진-이미지의 선정성과 폭력성, 바라보는 자의 관음증을 비판했다. ˝상상력과 공감의 실패˝의 결과처럼 도착하는 사진들. `군국주의와 종교적 파시즘 세력의 신념을 강화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그것과 싸우는 데 어떤 기여도 못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타인의 고통> p25)을 남기는 사진들. 표현 영역이 그때보다 넓어진 지금, 이미지는 초과와 부재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우리는 모두에게 최대한 공정한가.
중동 아프리카의 수많은 테러와 전쟁에 대해서도 그 만큼 연대하는가.
먹고사니즘을 앞세워 서방 선진국 행태에 동조자이거나 방관자이진 않는가.
뉴스와 사건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대비는 갖추고 있는가.
세계와 자신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외부로 내보내기 전 무엇을 점검하는가.
세계에 무엇을 던지는가.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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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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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23: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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