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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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고티의 서문 中 

(p17)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적인 사고는 신학 속에 파묻혀 수도원에서 잠자고 있었다. 에로티시즘과 형이상학은 동시에 발전한다. 종교는 전투적이며, 형이상학은 에로틱하고 관능적이다.

 인간을 전투적이고 호전적이게 만드는 것이 종교성이거나 아니면 인간을 종교적이게 만드는 것이 전투성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형이상학적 본능이다. 결국 이 원죄가 인간을 관능적이게 만들었고, 이브처럼 선악을 알려는 열망인 형이상학적 본능을 일깨운 것 또한 바로 이 관능성이다. 그 후에 전투성의 관능성에서 탄생한 종교의 형이상학, 즉 신비주의가 나타난다.

 크세노폰이 『회상』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었던 저 아테네의 창녀 테오도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리를 탄생시키는 산파술을 개발한 소크라테스의 진리 탐구 방법에 열광하여 그에게 자신의 중매쟁이가 되어 남자 사냥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스어 교수인 우나무노 선생님에 따르면 테오도타의 남자는 사냥의 동반자인 신테라테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처럼 흥미롭고 교육적인 정보는 그에게 빚진 것이다.) 창녀 테오도타와 산파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철학이 상당 부분에서 매춘업이며 매춘업 역시 철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두 직업 사이의 내적인 연관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이 소설의 주제는 꽤나 일찍 나오는데 그것은 우나무노의 성마른 특질에서 비롯된 듯하다. 

빅토르 고티에게 서문을 맡겨 놓고 곧바로 뒤에다 고티의 서문이 맘에 안 든다고 투덜대는 서문을 다는 거 보고는ㅋㅋ

『안개』의 주제는 바로 아래 34페이지에 직접적으로 나온다.

 

 

(p34) 주님, 매일 매일의 무수한 사물들을 저에게 주옵소서.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안개 같은 것. 인생은 구름 같이 모호한 것이다.■

 

 

내가 본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아우구스토의 현학적 철학이 어떻게 사랑과 현실을 재단하고 비극을 자초하는가이다.

자주 느끼지만 사랑과 찌질함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 같다. 철학과 현실의 관계처럼.

요즘 헤겔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풍문으로 들었던 것과 매우 판이했다. 정-반-합도 도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입문서나 해설서의 2차 터널로 우회하지 말고 번역의 1차 터널만 감수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또다시 했다.

....안개 속을 헤쳐 해를 건지려는 헤겔.

오, 철학이여.

 

ㅡAgalma

 

 

 

 

 

 

(p25~26) 우산을 케이스 안에 있을 때는 잘 접힌 채 맵시있고 우아한데, 펼치면 미워 보인다.

  아우구스토는 생각했다. '인간이 사물을 이용한다는 것, 즉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사물의 가장 숭고한 기능은 단지 그것을 바라볼 때에 있다. 먹기 전의 오렌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러한 문제는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진지하게 신을 명상하고 신 안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볼 때 바뀔 것이다. 여기 이 가련한 인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신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이용하는 데 급급하여 우산을 펴듯 신을 펴서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고 할 뿐이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는 바지를 걷어 올리려고 몸을 굽혔다. 그리고 마침내 우산을 펴고,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오른쪽으로 아니면 왼쪽으로?' 왜냐하면 아우구스토는 보행자가 아니라 인생을 산책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p122) "인생이야말로 유일한 인생의 스승이야. 그보다 나은 교육은 없어. 오직 살면서 사는 법을 배우는 거야. 인간은 각자 새로운 인생 수업을 다시 받아야 해……"

"그렇다면 많은 세대가 수세기에 걸쳐서 남겨놓은 유산은 어떻게 되지요?"

"유산이 있다면 환영과 환멸, 그 두 가지밖에 없어. 그 두 가지는 우리가 조금 전에 만난 곳에서만 발견되지. 성당에서만 말이야. 확신하건대 자네를 그곳으로 데려간 것은 큰 환영 아니면 큰 환멸일세."

"두 가지 다지요."

"그래그래, 둘 다지. 왜냐하면 환영과 희망은 환멸과 추억을 낳고, 환멸과 추억은 또한 환영과 희망을 낳지. 친애하는 아우구스토, 과학은 현실이고 현재야. 이제 나는 결코 현재에서는 살 수 없어. 나로 말미암아 희생된 내 가련한 아폴로도로ㅡ이 말을 할 때 그는 목이 메었다ㅡ죽은 이후로, 그러니까 자살한 이후로 내겐 어떤 현재도 없어. 어떤 과학도 어떤 현실도 내겐 아무런 가치가 없어. 난 그 애를 기억하면서 또는 기다리면서 살 수밖에 없네. 그래서 모든 환영과 환멸의 집에 머물러 있는 걸세. 성당에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신앙이 있으시단 말인가요?"

"난들 알 수 있나!"

"그럼 없으시다는 건가요?"

"내겐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기도를 하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해 질 무렵 묵주기도를 드리러 성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몇 명 있지.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 그들 역시 나를 모르지.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내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연대감을 느끼고 있어. 지금은 돼먹지 못한 인간들에게 천재들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하네."■

 

 

 

(p276) "희극에서는 자신을 왕이라고 믿는 자가 그 역을 맡게 되지."

"그런데 자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자네 기분을 풀어주려는 거야. 게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만일 우리 얘기를 듣고 있는 숨어 있는 소셜가가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 기록해 두었다면, 소셜의 독자는 비록 한순간일지라도 자신의 실체를 의심하게 되어 우리와 같이 자신이 단지 소셜적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게 되지."

"그것은 어째서지?"

"그를 위해 내기 위해서지."

"그래, 나는 예술의 가장 구원적인 요소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 기분 전환하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지……"

"아니야, 예술의 가장 구원자적인 요소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데 있어."

"존재한다는 것이 뭔데?"

"자, 보라고. 이제 너는 치료가 되는 중이야. 너를 삼키기 시작하고 있어. 이런 질문이 그걸 증명하는 거야. '사느냐 죽느냐……!'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중 하나인 햄릿이 한 말이지."

"그런데, 빅토르. '사느냐 죽느냐.'라는 말은 내게 항상 엄숙한 공허로 보일 뿐이야."

"문장은 심오하면 심오할수록 더욱 공허한 법이지."

"바닥이 없는 우물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어. 자네가 보기에 가장 진실한 것은 뭐지?"

"음…… 음…… 데카르트의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아니야. 그것은 단지 이런 말이야. A는 A와 동일하다."

"하지만 그 말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기 때문에 가장 진실한 것이야.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지. 그러나 너는 데카르트의 저 헛소리를 그렇게까지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렇고말고……!"

"좋아. 그걸 말한 사람이 데카르트였나?"

"그렇지!"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단지 허구적 존재로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졌어.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어……."

"그러면 누가 그 말을 했어?"

"아무도 그 말을 한 적이 없지. 그것은 그 자체로써 말해졌던 거야."

"그렇다면 존재하고 사고했던 것이 생각 그 자체였단 말이야?"

"물론이지! 생각해 봐. 그건 존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

"그렇구나!"

"그러니 아우구스토, 생각을 하지 마.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만일 계속 생각하게 되면……."

"그러면?"

"너를 삼켜버려!"

"말하자면 자살하란 말이지……?"

"거기까진 끼어들고 싶지 않아. 잘 있어!"

빅토르는 골똘히 생각 속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아우구스토를 남겨둔 채 나가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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