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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독서 지침은, 이 현실을 유지시키고 곧잘 그 믿음을 붕괴시키는 나/타자/사회가 함의하고 있는 매우 의타적인 동인(動因)을 살피는 것이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더 늦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하는 심경으로.
그동안 내 독서는, 다변화를 모색했다 해도 필요와 호기심과 취향이 모인 괴상한 모습이었다. 누구를 돕거나 알릴 것이 아니었으므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독서였다. (네, 우물안 베짱이였죠)
세상은 한 가지만 파기에도 무궁무진했다. 전문가여, 오타쿠여, 그래서 행복합니까.
탐구와 취향의 다른 편에는 자기 계발과 현실 안주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와 개체 그리고 정신 두루 살피는 독서가들은 생각보다 많이 보이지 않는다. 풍부한 지성이 있다해도 관용과 배려가 어우러져 있는 이도 참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알려지지 않기가 쉽지 않고, 숨어 있다면 그들은 뭘 하고 있는걸까. 아는 만큼 회의론과 결정론에 빠지기 쉬워 말을 아끼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공부가들은 그럼에도 말하는 책임을 감수하며 말하는 것일테다.
내 무식하고 자의적인 표본 관찰 속에서 우리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요즘 이걸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전화위복이 돼줄까?
아무튼 ‘모든’과 ‘완벽’을 꿈꾸며 추구하는 동안 우리는 카운트다운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호는 이 무수한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 원자폭탄이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천안함침몰, 용산사태, 국정원 부정선거 무수히 겪어도 당면한 사건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 세월호 참사가 마지막일 거 같지 않아 우리는 더 불길해하고 있다.
무엇이 우릴 그토록 강박하게 만드는지 나대로 계속 생각해왔다.
생명의 소중함.
전 세계 곳곳에서 실시간으로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을 위해 매일 걱정하고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건 매우 속인주의적인 태도다. 지장보살이 아니고서야 전 세계의 죽음을 위해 매일 눈물 흘린다는 건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간 생명 뿐 아니라 전 지구의 생명을 우린 재점검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정부의 온갖 무능과 비리와 부조리함들.
왜 이런 정부, 이런 사람들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나. 일제 청산도 안했는데 없는 게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기회주의와 탐욕은 굳이 ‘경제’라는 거대담론으로 얘기하지 않아도 인간의 내재성이다. 자본주의 치하 아래 이 현실을 욕하고 외면하는 이들과 제 이익 좇기 바쁜 이, 모두가 함께 이 결과의 지렛대질을 한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더 울분에 싸이는 거겠지. 죄인이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세상. 죄를 제대로 벌할 수 없는 세상.
주권을 박탈당한 채 끊임없이 희생물로 바쳐지는 "호모 사케르" 피해자들.
[자신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제3자인] 우리는 촛불을 들고 각종 후원을 하고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얘기하고 사건의 명확한 해결 촉구를 요구하지만 매번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연일 혹독한 수모와 실제 고통의 호모 사케르적인 삶은 모두 사건 피해자들이 살고 있다.
예방을 바라고 대책을 세우는 것은 표면적이다. 세월호 피해자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또한 호모 사케르이기 때문이다. 비굴하게 이 땅에, 이 삶에 예속되어 있으니까.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홍철기씨는 우리 표면 깊숙이 내재화되어있는 우리 의식의 썩은 뿌리를 적시해줘서 반가웠다. 이 책을 덮을 때까지 이것이 정확히 제시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적은 지면이지만 적절한 지적이었다.
『눈먼 자들의 국가』 기획 의도는 "우리는 과연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
총체적 난국 속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눈먼 자들의 국가』는 이 시점의 정리와 질문을 대신해준 셈이다. 정답 제시가 아니었기에 각각의 부족함과 한계들은, 독자인 우리도 갖고 있는 것이므로 결점으로 보지 않으려 했다.
상징적인 표현임에도 나는 "기억하자"는 구호를 경계한다. 그것은 자칫 감정적 연민으로 끝날 수 있다. 이 연민에 대한 경계를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한 바 있다. '가만히 있으라'처럼 감정적 정지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을 끊임없이 "관심"으로 현실화시켜야 한다.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2014), 『금요일에 돌아오렴』(창비, 2015) 속속 관련 책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인과관계의 실타래가 복잡한 상태지만, 이후 더 체계적이고 더 다양한 층위 분석이 꼭 제시되어야 한다. 고통스러운 미증유의 우울함 속에서 나 또한 찾아나가야 한다.
말로만 내지르는 질타와 호소는 쉬운 법이다. 그조차도 모르고,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홍철기씨의 의견처럼 우리는 '공적으로 보여주고 보는 능력'을 기르고 의사소통의 길을 바로잡아야 한다.
행동에 있어서도 우리 난관은 이어진다. 불의에 대한 진정한 미움과 거부는 내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나’라는 타협점을 빌미로 ‘자신의 삶’으로 후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는 변함없는 인류의 질문이다.
입으로는 조화와 화해와 긍정을 말하지만 허상적인 주체성으로 똘똘 뭉쳐 이익과 경쟁과 시기를 일삼는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용기를 얼마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이 또한 근대 이후 계속 되어온 질문이다.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린 매번 궁지에 처할 것이다.
우리가 세월호에 대해 어떤 해결을 보느냐가 향후 한국의 미래일 텐데, 사건 해결은 바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간과하는 것이 너무 많이 보여,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 정체(停滯)들이 너무나 섬뜩하다. 더한 것도 겪었다는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 흔하게 말하는, 자유 · 행복 · 삶 · 사람 … 이 저 우주의 별보다도 점점 더 멀게만 느껴져 뼈저리다.
과거 사람들의 희생과 교훈 따로, 내 인생 따로 그렇게 스스로 분리되어서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내 몸처럼 진정 세상의 전반을 [보]살펴야 할 때다.
좋은 질문이 좋은 답을 찾는다고 한다. 나는 좋은 질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그에 부합하는 행동도 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무수한 실패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좋은 질문을 찾아야 한다. 의타(依他)가 아닌 의지(意志)로서.
ㅡAgal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