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God Speed You Black Emperor! - Sl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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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을 양보한 것도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였고, 전철 안은 붐볐다. 나는 장애인 휠체어석 벽에 기대 『호모 사케르』마지막 장을 읽고 있었다. 내 옆에는 유모차를 세워둔 여인이 있었다. 기척도 없는 아이. 막 전철에 오른 두 노인 중 더 나이 드신 분께, 나는 "여기 기대시겠어요?" 하고 벽을 내어준 것뿐이었다. 노인은 좌석이 아님에도 기뻐하며 벽에 기대섰다. 유모차 여인도 내려서 노부인에게도 "여기 기대서 계세요." 라고 빈 공간을 권했다. 노부인은 곧 내린다며 사양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낮술을 권했던 지인들을 나무라며, 술 냄새가 나지 않느냐며 입을 가리고 부끄러워했다. 공항철도를 타러 가는데 사람들이 잘못 가르쳐줘서 헤맨 이야기를 풀어냈다. 취기 같은 이야기가 편했다. 낯선 도시에 온 방문자들이 겪는 흔한 경험과 통로 중앙에서 내내 떠들어대는 중국인 관광객 일행의 대화 소리들까지, 이야기들도 서로 만나고 있었다. 방문자의 난처한 경험을 나 또한 잘 알기에 책을 덮고 노부인의 말에 맞장구도 치며 귀를 기울였다. 사람은 어디에서 낯설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노부인이 내리기 전에 서두르며 내게 말했다. 좋으신 분 같다고. 본인도 봉사활동 많이 다녀봐서 안다고. 좋은 사람은 금방 알아본다고. 그리고 눈시울까지 붉히며 붉은 뺨을 하고 떠났다. 나는 당황했고, 이상하게 점점 서글퍼졌다. 이 작은 호의에 그토록 고마워하는 사람이 나는 금세 그리워졌다. 내 자리를 양보 받긴 했으나 나를 의식해 어정쩡하게 서 있던 노인에게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알려주고, 나도 내렸다. 정말 내려야 될 곳을 알고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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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서점 종로점은 또 많이 바뀌어 있었다. 새로 들어온 책 코너가 여러 벽으로 조목조목 나뉘어 있었고, 계산대에는 번호표까지 등장해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온 게 그리 오래되었나. 눈에 띄는 책은 없어 음반 코너를 쭉 보다가 오노 요코의 음반을 발견했다. 오노 요코 음반을 하나쯤 갖고 싶었는데 번호표까지 뽑아서 계산까지 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오프라인 중고서점 10% 할인쿠폰까지 쓸 좋은 기회였는데, 곧 광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다시 오면 되겠지 싶어 서둘러 나갔다. 하지만 그건 큰 판단 착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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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빙의 다큐멘터리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3시간 50여 분 정도 소요되었다. 곧바로 이 영화를 추천한 정성일 평론가와의 대화 시간이 2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점심도 먹지 않고 물도 챙겨오지 않은 나를 꾸짖어봐야 늦은 일이었다. 이미 밤이었고, 나는 극장 안에서 밤이 오는 지도 모르고 그렇게 있었던 거다.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내게 오고 갔는지……

<철서구>(2003, 다큐, 611분), <원유>(2008, 다큐, 840분)를 보게 되면 또 무슨 생각 속에 빠져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성일 평론가의 21세기 영화에 대한 물음 ㅡ 서사가 사라진 뒤에 오는 것, 왕빙의 윤리적인 영화 태도 다 공감하면서도 나는 미결의 영역에서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 한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방법적인 선택일지라도, 우리 최초의 선택과 최후의 주권들 앞에 속수무책일 것이므로.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더 많은 이들이 미치고, 더 많은 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너무도 오래. 그동안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ㅡAgalma

 

 

 

 

 

 

 

 

 

 

 

 

 

 

 

 

 

 

 

 

 

 

 

 

 

 

 

 

 

 

 

 

 

p116
잠재성이란 행사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복종이란 복종을 가능케 하는 제도들보다 선행한다.(메레,『역사』pp311)

p137
내버리다abandonner, 이는 어떤 주권 권력에 위탁하고 위임하거나 인도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의 추방령ban 즉 그의 포고, 소환, 판결에 위탁하고 위임하거나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법을 향해 내버려진다. 내버려진 존재의 빈궁함은 그가 직면해 있는 법의 무한한 엄격함을 통해 알 수 있다. 내버려짐이란 이런저런 법원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법 그 자체이자 전체성으로서의 법 앞에 무조건 출두하라는 강제이다. 마찬가지로ㅡ동일한 것이지만ㅡ추방된다는 것은 특정한 법 조항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법 앞에 소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의 절대성 앞으로 불려 나온 추방된 자 또한 법의 모든 판결 외부로 내버려진다(……) 내버림은 법을 존중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바가 없다.(낭시,『정언명령』,pp149~150)

p215
추방된 자의 삶은 - 신성한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 법과 도시와는 무관한 야생적 본성의 일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짐승과 인간, 퓌시스와 노모스,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이자 이행의 경계선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두 세계 모두에 거주하는 늑대 인간의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삶이 바로 추방된 자의 삶인 것이다.

p150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교의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착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유력한 가설은, 이 교의가 최근의 것이며, 허약해진 서양의 전통이 상실한 신성함을 우주론적인 불가입성不可入性 속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최후의 착란적인 시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폭력 비판론』,p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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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행하기 쉬우면서 쉽지 않은 세상이에요. 저도 어제 지하철 탔다가 주말에 사람이 왜 이리 많아하고 놀라면서 알라딘서점에 갔었죠.^^

AgalmA 2015-02-09 12:04   좋아요 0 | URL
선행이란 큰 말보다 사람간의 情 정도일텐데...이 정도도 선행이 되는 지금 사회가 너무 슬펐단 말이지요. 내 가족이라면 누구든 그러지 않았겠어요? 타인이라서 그게 선행이 되어야 하다니...
종로점이셨습니까? 알라딘 얄미우면서도 시내 구석구석 갈 곳 만들어줘서 그건 좋아요. 운좋으면 책도 얻고.
책 팔고 그 4배를 살 때 계산하던 직원이 저를 바라보던 시선이 잊혀지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