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건 시전집
전봉건 지음, 남진우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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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 남진우 시인은, 50년대 모더니즘 시문학에서 김수영, 김춘수, 김종삼, 전봉건의 사각형 구도가 완성형이라고 본다. 당시 서정주나 청록파 같은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은 시 노선과는 확연히 차별적인 시인들이란 것이다. 60년 대 중반 이후 문학계에서 50년 대 모더니즘 시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는데, 무분별한 서구 추종과 난해한 현실도피성 무국적성 등이 그 지적이었다(지금 미래파에 가해지는 비판과 시류와 비슷한 것이 흥미롭다). 이 비판의 폭풍 속에 굳건히 살아남은 시인들이 이들 네 사람이라고 남진우 시인은 전한다.

이들 네 사람도 여러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의미/무의미의 지향점에서 보면 김수영 전봉건 대 김춘수 김종삼이 될 것이고, 그 속에서 김수영과 전봉건은 "남성적 호흡의 스케일", 김춘수와 김종삼은 "섬약성과 내면성이 돋보이는 여성주의적 시"풍으로 대조된다. 김수영과 전봉건 두 시인의 의미 지향점도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김수영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현실과 대결을 통해 의미를 추출해내려 했다면, 전봉건은 심미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를 현실에 부과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다."  

네 시인의 시 접근 태도로 나눠보면, 김종삼과 전봉건의 시쓰기는 "자연적 생리적 성격"이라면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쓰기는 "자각적이며 인공적"이다. 그 속에서 김종삼과 전봉건은 "서정적이고 낭만적" 특성을 지닌다면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념적이며 산문"지향적이다(김수영과 김춘수의 시론들을 생각해보라). 김종삼과 전봉건의 낭만적 성향은 이북 출신으로 실향의 정서가 깊이 배어 이곳 유배지가 아닌 초월적 세계를 꿈꿀 수 밖에 없는 숙명성에 기인한다.

남진우 시인은 네 시인의 시적 근원을 이렇게 말한다. "김수영은 현실에 대한 가열한 비판의식", 김춘수는 존재에 대한 탐구", "김종삼은 보헤미아니즘으로 집약되는 방황과 소외의식", "전봉건은 감각적 리리시즘". 전봉건의 시는 "재래의 감정적 주정적 서정시"과 구분되는 "이미지의 선명성과 상상력의 역동성"을 보여 준다. 

 

네 시인 가운데 전봉건 시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 아쉬운만큼 그 놀라움도 크다. 김춘수 「처용단장」(外 김구용 「구곡」, 송욱 「하여지향」, 성찬경 「화형둔주곡」)과 비견될만한  전봉건 長詩「춘향연가」,「속의 바다」도 흥미롭다. 수석애호가이기도 했던 전봉건은 많은 양의「돌」연작시도 발표했는데, 프란시스 퐁주 사물시의 한국판이라고 봐야 할까 싶다. 그리고 「6·25」연작시를 비롯해 戰場詩들은  한국의 서정성과 전쟁의 실존적 참상이 빼어나게 기록된 기념비적인 시편들이다.

 

 

ㅡAgalma

 

 

 

 


 

 

 

 

 

옥수수 환상가

 

   1

 

옥수수의 잎사귀가 날린다.

다산형 공주님을 지키는 늙은 무사의 큰 칼날이다.

 

   2

 

나는 여러 가지의 마음을 가졌다.

한 대의 옥수수가 그 많은

씨앗을 가졌듯이.

 

   3

 

옥수수가 익자

길은 바다로 트이고

그 위에 낙인처럼

찍힌 그림자.

포플러나무의 진한 그림자에

넘쳐나는 푸름.

나는 거기서도

샘물 소리를 보았다.

 

   4

 

내가 먹은 옥수수도

번갯불과 장마와 아침 달이 만들었다.

돌 부스러기, 벌레, 대낮의 해가 만들었다.

썩은 개 뼈다귀와 저녁 별,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바람이 그랬다.

한량없는 꿈과 어둠을 먹고 살찌는

한량없는 욕정의 흙이 만들었다.

내가 먹은 옥수수는.

 

   5

 

무엇을 줄까.

어느 것일까.

가장 성스러운 잔인함으로 하여

너의 미각을 꽃잎처럼 피어나게 하고

눈부시게 할 것이.

진주의 목걸이와

한 대의 옥수수와.

 

   6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랑의 남자 속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 속에 들어 있는 한 대의

옥수수.

 

   7

 

태양은 몇 개나 있어서

매일 아침 새것이 뜨는 것이었을까.

어떻든 옥수수 한 대의 옥수수 씨알마다

태양은 하나씩

빛나고 있었다.

 

   8

 

옥수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밤길이었다.

한 사람의 여자가

한 사람의 남자에게

말했다.

    "비가 내렸으면

     자고 갈 건데……"

검은 밤길에 잠시

젖빛 같은 것이 번졌다.

 

    9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람 한점 없는 옥수수밭의

옥수수 알들일지도 모른다.

 

 

 

 

 

 

 

암흑을 지탱하는

 

 

  그날 총알에 가슴으로 피를 뿜는 친구를 어깨에 걸쳐메고 나는 부러진 총부리와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불타는 거리를 더듬어 가끔씩 생각난 듯 눈먼 유탄(流彈)이 와서 박히는 한 건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문지방을 넘으니 발바닥에 마루인 듯한 널판자가 밟혔고 널판자는 숨죽인 신음 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그런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 위에서 꿈틀거린 그를 고쳐메고 소리나는 어둡고 긴 마루를 지나 마침내 방인 듯한 곳에 이르렀으나 그곳도 역시 어두워 안보이는 눈을 껌벅거리며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깜깜하던 어둠이 차차 엷어지면서 희뿌연 밝음 속에 하나둘 나타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 의자 대야 부엌비 그런 것들이었고 또 호미 변기 사진 이불장 옷장 경대 그런 것들이었다. 아 등신대 크기의 경대에 반쯤만 남아서 붙은 거울 거기 비친 내 몰골 피 흘리는 몸뚱이 하나 어깨 위에 짊어멘 내 몰골은 마치 망령과도 같았다. 발끝에 걸리는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저고리 치마 속옷 그런 것들이 아무렇게나 널린 두툼한 이부자리였다. 나는 그 위에 조심스러이 몸을 구부려 어깨에 걸쳐멘 그를 내려뉘었다. 이미 임종이 가까운 그의 두 눈은 그저 크게 뜨여 힘없이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또 자취도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었던가. 텅 비어 있음에 다름아니던 그 두 눈에 빛이 고리고 바람도 이는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이 깃들이고 그 푸름도 깃들였다. 성좌(星座)가 아롱지는가 했더니 강물이 흘렀고 나뭇잎을 흔드는 숲이 들이차기도 했다. 훤하게 트인 길을 거느린 해안과 산맥이 굽이치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그의 두 눈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잔잔한 미소마저 띠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두 눈에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로 둘러싸인 샘물이 떠올라 넘칠 듯 넘칠 듯한 바로 그때였다. 그는 검붉은 피 엉겨 찌든 손가락을 들어 어슴푸레한 방 한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거기엔 무엇이 있었던가.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항아리였다. 항아리 하나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기 위하여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그런데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시 눈떠 본 것은 항아리가 아니라 한 여자였다. 가느다란 모가지 고운 젖무덤 늘씬한 허리 풍만한 엉덩이 한 젊은 여자가 거기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풀어내는 스스로의 살빛으로 피냄새 절은 어슴프레한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이 모를 것은 넘칠 듯 넘칠 듯한 샘물을 둘러싸고 어우러진 꽃덤붗 듬뿍 이슬 머금은 꽃덤불의 짙은 꽃향기가 내 가슴팍에 젖어들고 아랫배에 젖어드는 일이었다. 이윽고 무지개처럼 광채 영롱한 성욕이 내 정수리를 눈부시게 꿰뚫은 그때였다. 나는 등뒤에서 날카롭게 뜨겁게 솟구치는 절규 한마디를 들었다. 그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한마디가 무슨 소리였는지 그것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그는 또 한번 절규를 하려는 듯이 급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안간힘을 써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잠시 뒤틀리고 일그러졌을 뿐 절규를 내뿜지는 못하였다. 총알에 뚫린 가슴의 상처가 울컥 검붉은 한줌 핏덩이를 쏟아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는 그 방을 나오면서 어슴푸레한 어둠의 한두석으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거기서는 항아리 하나가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내 귀는 다시 등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이제 절규가 아니라 그지없이 평화스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무슨 말이었는지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목소리 그 한마디가 한 여자의 아름다운 이름에 다름아니었음은 분명했다.

 

 

  그뒤로부터 나는 확신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흙 우리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처절한 죽음과 엄청난 피로써 얼룩진 암흑이라 할지라도 철 따라 과목을 꽃 피게 하고 열매도 맺게 하는 것은 그것이 희고 맑은 젖빛 스스로의 살빛을 풀어내는 항아리 또는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해서 지탱되어 있는 까닭이라는.

 

 

 

 

 

 

 

 

겨울에

 

 

 

찬 하늘

커피 한 잔

눈 눈 눈 눈 눈

구름이 흔들려서 날리던

김광섭의 눈

혹은 다시금 또 보이고

다시금 또 보이는…… 영(嶺) 기슭에

한 잎 또 한 잎 내려서 덮이던

김소월의 눈

또 혹은 북국 강녘에 밀수입 마차

지나는 소리 들릴 제 퍼붓던

김동환의 눈보라

이 문득 몰아치는 6·25의 눈보라

찬 하늘 닿은 첩첩 산등성이 퍼붓는 그 눈보라 속에 터지던 눈보라

새빨간 피보라 터지고 또 터지던 하얀 눈보라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찬 하늘 춤고 떨리고 춥고 떨려서

비발디 <사계>의 <겨울>에서 불붙은 화로 따끈한 제2악장만 따내고

박용래의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는 저녁 눈과

서정주의 괜, 찮, 타, …… 괜, 찮, 타, …… 그렇게 수부룩이 내리는 눈발도

그리고 춘향이 흰 무릎 같은 눈송이 몇 개

황진이 흰 허리 같은 함박눈도 몇 송이

그리고 불붙인 담배

니코틴이 적은 썬 한 개비

그리고 따끈한

커피 또 한 잔

 

 

 

 

 

 

 

 

봄에

 

 

 

구름 한점

햇살 한줌

진달래 몇 송이

(스스로 죽은 김소월)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자락

(갇혀서 죽은 윤동주)

복사꽃 한 송이

(미쳐서 죽은 이중섭)

모란꽃도 한 송이

(눈먼 총알 맞아 죽은 김영랑)

저 6·25 한 달 전이던가 두 달 전이던가

삼팔선을 넘다가 총 맞고 낭떠러지 떨어져 죽은

한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꽃잎처럼 꽃잎처럼 날리면서

떨어져 죽은 그 소녀의 기억도 한 토막

그러고 보니 슬픈 피비린내 역겨워

<춘향가>에서 "긴 그네줄을 섬섬옥수로 이리저리 갈라쥐고 몸을 날려 올라 한 번 굴러 앞줄이 높고 두 번 굴러 뒷줄이 높아 점점 높아 공중에 소소쳐……"

그 한 가락 따내고

비발디의 <사계>에선 <봄>만 따내고

비닐하우스에서 나온 별로 맛없는

그러나 덩치 큰 딸기 몇 개

말라붙은 쥐포 두어 장

언제나 시린 속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주 한 병

 

 

 

 

 

 

 

봄 이제(二題)

 

 

보리밭

 

희멀건 것이 스친다

미끈하기도 하고

두루뭉실하기도 하다

검은 점, 두 개가 떠오르더니

햇방울로 흔들리다가 스러진다

바람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인다

바람 아닌 것이 움직이는 자리가

파란 불길이다.

 

 

안개

 

말하지 않는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지도 않는다

다만 적실 뿐이다

쇠줄에 매인 작은 배를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을 적실 뿐이다

부드럽게 촉촉이 적실 뿐이다

작은 배에 실린 검은 어둠에

한두 점 핏방울 같은 것이 돋는다

그것만은 적시어지지 않는다

바다도 하늘도 목베인 잿빛이다

 

 

 

 

 

 

 

돌 2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 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 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6 · 25  13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총소리가 터지고 대포 소리가 터졌다 안방에서 터지고 건넌방에서 터지고 문간방에서 터졌다 마루방에서 터지고 사랑방에서 터지고 마구간에서 터졌다 때는 유월 이른 새벽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 수없이 많은 총소리가 터졌다 대포 소리가 터졌다 곳간에서 터지고 움 속에서 터지고 부엌에서 터지고 그리고 아궁이 속에서도 터졌다 그렇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에서도 터졌다 햇살보다 먼저 터졌다

 

 

 

 

 

 

6 · 25   17

 

 

우리는

물동이를 버리고

가마솥을 버리고

논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밭으로 가는 길도 버렸다

삽과 갈쿠리도 버렸다

닭을 버리고 돼지를 버리고 개도 버렸다

낫을 버리고 도리깨를 버리고 멍석을 버렸다

책과 책상과 연필과 지우개도 버렸다

비도 걸레도 버렸다

진달래가 우거졌던 언덕을 버리고

개나리가 들이찼던 골짜구니도 버렸다

우리는 버리고 또 버렸다

하나하나 우리는 죄다 버리고 그리고 떠났다

동트는 6월의 이른 아침에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다 버리고 떠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시던

또 내가 마시던

샘물도 버리고 떠났다

촉촉이 내린 이슬비 젖은

햇살이 퍼질 때에

우리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6 · 25   25

 

 

어머니는

솥뚜껑을 열어놓고

보리밥을 푸다가

죽어 있었다

 

 

누렁소는

가래를 멘 채

밭이랑을 베고

죽어 있었다

 

 

아버지는

밭머리에 앉아서

막걸리 바가지를

기울이다가 죽어 있었다

 

 

어린 동생은

제 머리통만한

개구리참외 반쯤이나 먹다가

죽어 있었다

 

 

모두

그렇게 죽어 있었다

죽음 밖의 죽음을

죽어 있었다

 

 

 

 

 

 

 

6 · 25   33

 

 

 

문이

열리면

드륵

 

 

새가

날아도

드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지붕 위에서

햇살이 번쩍거리면

드르륵

 

 

여울물에서

달빛이 들썩거려도

드르르륵

 

 

길 아닌 데서

그리고 물론 길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기만 하면

드륵 드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꽃덤불이

흔들려도

드르르르륵

 

 

우리는

총을 쏴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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